태풍아 불어라 지각이다!! 일어나자 마자 시계를 보는 순간 악 소리가 나올 뻔 했다. 허둥지둥 미친 듯이 옷을 꿰어 입으며 한 수저라도 뜨고 가라는 어머니의 말씀을 흘러들었다. "지옹아!! 밥이라도 한 숟갈 뜨고 가!!!" "미안, 늦었어요!!" 벌써 몇 달 동안 아침마다 운동장 10바퀴를 돌고 나니, 지각이라는 것이 세상이 무너지는 것보다 더 끔찍하게 가슴에 와 닿는다. 신발을 아무렇게나 꿰어차고는 문을 열고 나가려다 아차 하고는 헐레벌떡 되돌아 왔다. "다녀오겠습니다." "녀석.. 아무튼 간에 그렇게 깨워도 일어나지 않는 건 지 아빠 꼭 닮았다니까.." 꾸벅 인사를 마치고 바람처럼 달려나가는 지옹에게 어머니의 중얼거림이 들릴 리 없다. 어찌되었건 지각은 면해보자 라는 심보로 100미터 달리기보다도 더 숨가쁘게 뛰기 시작했다. 이제는 아주, 달리기가 정겹다. 앞도 제대로 보지 않고 바람처럼 달려나갔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재미있다는 듯 킥킥거리며 이쪽을 쳐다보지만, 쪽팔리는 것 신경 쓰다가는 오늘도 운동장 10바퀴다. 운동장만 10바퀴 도는가? 쓰레기도 치워야 한다. 잘못 걸리면 담임한테 엉덩이 20대. 창문에 다닥다닥 붙은 여학생들의 킥킥거림도, 지나가는 길에 들려오는, -쟤 걔 아니야? 아침마다 운동장 달리는 애. 라는 말도.. 이제는 정말 안녕 하고 싶다고!! ......라는 생각을 부르짖으며 학교 문턱에 가까워질 때쯤이었다. 저 앞 골목 모퉁이에서 굉장한 장신의 남자가 걸어가는 것이 지옹의 시야에 들어왔다. 일부러 지름길을 택하느라 으슥한 담 쪽으로 돌아왔기 때문에 인적이 거의 없는 길이었다. 제길, 확실히 저 모퉁이만 돌아서면 학교다. 처음 보는 교복을 입은 그 녀석은, 뒷모습부터가 범상치 않았다. 뒤에서 봐도 굉장한 거구. 게다가, 지옹이 다니는 학교 쪽으로 발걸음을 놀리고 있다. 느릿느릿한 걸음걸이 자체가 '불량하다' 라는 기운을 팍팍 내뿜고 있었다. 꼭 '불량하다' 까지는 아니더라도 분명, 평범한 녀석은 아닌 듯 싶었다. 오늘, 한지태 그 불량스런 녀석이 타 학교 학생과 패싸움이라도 하는 걸까? 아니면 그 개차반 같은 채관형이? 잔뜩 긴장한 지옹은 자신도 모르게 발걸음이 서서히 늦춰졌다. 어쩐지 다가가면 한 대 얻어맞기라도 할 것만 같았다. 인생 모토가 '비굴해도 소심(?)껏 살자' 인 지옹으로서는 참새가 벌레를 잡아먹듯, 염소가 풀을 뜯어먹듯 당연하고도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 갑작스레 거구의 그 녀석이 발걸음을 멈췄다. 그와 함께 지옹의 숨도 멈춰 버렸다. 조금 뒤를 돌아볼 것도 같은 제스처를 보이자, 그만 다리가 부들부들 아니, 후들후들 떨렸다. 순식간에 오만가지 생각이 휘리릭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만약 이 상황에서 저 녀석이 '야, 너 거기, 이리 와 봐.' 라는 말을 한다면? 다가가야 하는가, 잽싸 튀어야 하는가. 만약 튀다가 뒷덜미라도 잡히면, 아니, 재수 없게 다리라도 꼬인다면 그땐 두 배로 맞지 않을까? 그렇지만 만약 다가갔을 때 갑작스레 멱살을 잡는다는 둥, 다짜고짜 주먹을 날린다면 얼마나 아플까? 죽을만큼? 설마 쪽팔리게 기절하진 않겠지? 서지옹. 기절만은 참아줘라.. 아니야, 기절 한 척 하면 보내줄지도 몰라. 아니, 아니. 기절을 하는 건 아무리 인생 모토가 '비굴해도 소심껏 살자' 인 자신이라도 너무 추한 행위다. 그래. 무슨 말을 해야지 안 맞고 무사히 학교에 도착할 수 있을까. 그걸 생각해야해. 생각해 내, 서지옹!! 머리가 어질했다. 현기증이 날 것만 같았다. 차라리 꿈이면 얼마나 좋아. 제길. 조금만 일찍 일어났다면.. 아니, 조금만 더 지각했더라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제기랄, 제기랄!! ..라며 지레 겁부터 먹고 끔찍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지옹은, 곧이어 거구의 그 녀석이 멈춰 선 이유를 알게 되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학교 양아치 녀석들 몇 명이 어디서인지 모르게 튀어나와 거구 앞을 막아서고 있었던 것이었다. 낯이 익은 몇 명 녀석을 보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어야 할 지, 아니면 저주스러운 자신의 운명을 욕해야 할 지 막막해졌다. 그 녀석들은 일진에 속할만한 재목들은 못 되지만, 그래도 꽤나 흉악한 날라리들이었던 것이었다. 놀라울 것도 없었다. 워낙 지옹이 다니는 학교가 주먹으로 유명했다. 게다가 학교 내에서는 물론 타 학교까지 원정을 나가 싸운다는 소리가 있었다. 선생님들도 건들지 못할 만큼 비밀스럽게, 그리고 흉폭하게 진행되는 그 '사내녀석들의 지역 다툼' 은 위험하기도 위험했지만, 은연중에 입을 타고 흘러내리는, 지옹 같은 녀석들로서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할 만한 '신비스럽고 전설적인' 싸움이었던 것이었다. 누가 처음에 생각해 냈는 지는 몰라도, 싸우다 가끔씩 결판이 나지 않으면, 영화 '이유없는 반항'에서 제임스 딘 및 그 외의 기타 녀석들이 하던 위험한 놀이를 흉내낸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 위치는 어디인 지 알 리가 없지만, 굉장히 무시무시한 벼랑 앞이라고들 했다. 떨어지면 즉사일 정도의. 금을 그어 놓고 오토바이로 시속 100킬로가 넘는 속도로 달리다가 벼랑으로부터 가장 가까운 거리에 멈춰서는 사람이 이긴다는 그런 이야기였는데, 이유없는 반항을 감동스레 본 지옹으로서는 꿈에서나 볼까 말까 한 이야기였던 것이었다. 아무튼, 꼭 그 정도로 날고기는 녀석들이 아니래도, 분명 지옹의 학교에서 '날라리 양아치' 정도로 인정될만한 녀석들이라면, 굉장히 비열하고 흉악한 녀석들임에 틀림없었다. ?? 아마도, 오늘 타 학교 학생과 양아치들이 한판 붙는 날인가 보다 싶었다. 이 순간엔 정말 에라 모르겠다 숨는 수밖에 없었다. 재빨리 커다란 전봇대 뒤에 숨는 자신이 비굴했지만, 입술을 깨물고 '아냐, 이건 내 생존 방식이야!!' 라 위안하며 그들이 가기만을 지켜보던 지옹은 어쩐지 이상스런 대화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건 또 어디 교복이래? 야, 너 뭐야?" 학교를 하도 빨빨거리고 휘젓고 다녀서 얼굴을 기억하는 녀석이 거구 앞에 다가서며 말했다. 주춤하는 것이, 지들이 아무리 지광고 양아치들이더라도 거구가 무섭긴 무섭나보다. "...비켜, 지각이다." 사람의 귀를 울리게 끔 하는 목소리로, 녀석이 대답했다. "지각? 너 어디 학굔데 이 길로 지나가는 거야? 누구랑 맞장 뜨러 왔냐?" "시끄러워. 비켜." 4명이 우르르 자신의 몸을 에워싸고 있는데도, 녀석은 전혀 긴장한 구석이 없었다. 때문에 녀석들이 조금 쫄았는지, 다른 한명이 말까지 조금 더듬으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뭐..뭐? 이 새끼 말하는 뽄대 좀 보게나.. 씨..씨발.. 너 어디 학교야? 우리 학교 앞에 혼자 왔음 뭔가 믿는 구석이 있어선가 본데..." 어라? 저 자식. 진짜 비겁하군. 말하다 말고 갑작스레 난데없는 발차기를 시도하는 양아치들을 바라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어쩐지 얼굴도 모르는 거구의 녀석을 응원해 주고 싶은 기분이 들어, 지옹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그 쪽을 기대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녀석이 발차기를 한 손으로 막고, 주먹을 들어 녀석들의 얼굴을 사정없이 때리자, 녀석들을 낙엽처럼 우수수 떨어진다.... 티브이에서 늘 보던 장면이었다. 하지만 그런 지옹의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져 버렸다. 거구의 그 녀석은 형편없었다. 힘껏 날아든 발차기를 허리께에 고스란히 다 맞고, 그에 기세 등등해진 다른 녀석들이 쏟아 붓는 주먹에 맥도 제대로 추스리지 못하고 힘없이 꺾이는 것이었다. 하도 심하게 맞기에, 차마 그 광경을 볼 수 없어 눈을 질끈 감았다. '퍽퍽' 대는 소리가 귓가에 메아리쳤다. 제발.. 빨리 끝내고 어서 가라고. 오금이 다 지릴 정도였다. 싸움은 이제 정말이지 진절머리가 난다. "이 새끼. 너 끝까지 어디 학교 인 지 말 안해? 졸라 별로 인 게.." "괜히 덩치에 쫄았잖아.. 씹새끼." 양아치들이 숨을 헐떡이며 자신들의 승리에 기고만장해 한껏 욕을 하기 시작했다. 여유로운 지 낄낄대기까지 한다. 그런데 그 순간,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양아치들이 침을 탁탁 바닥에 뱉으며 발로 몇 번 바닥에 쓰러진 그 녀석을 툭툭 건들자 갑자기 완전히 쓰러진 줄 알았던 그 녀석이 으르렁대며 바닥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 씨팔!! 아프잖아!!" 순식간이었다. 눈 깜짝 할 사이에 방심하고 건들대던 4명의 양아치들이 바닥에 널브러졌다.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어, 자신도 모르게 손을 들어 눈을 쓱쓱 비벼보았다. 하지만 여지없는 사실이었다. 한쪽 손은 가방을 비스듬히 움켜쥐고 거침없이 발로 녀석들을 차대자 마치 갈대가 꺾이듯 무너져 바닥에 뒹굴었다. "교복은.. 어차피 바꿀 거니까 상관없긴 하지만, 가방 찢어진 거 보여? 어제 산 거란 말이야!! 우리 영감탱이 지갑에서 꼽쳐서 산 건데 이거 어떻게 할거야? 앙?" 멀리서 보면 티도 나지 않을 정도로 작은 흠이었다. 하지만 거구의 녀석은 용서해 줄 마음이 조금도 없나 보다. "야, 주머니 까. 손해 배상을 하란 말이야.. " 그러면서 바닥에 널브러진 녀석들의 주머니에 인정 사정 보지 않고 손을 집어넣어 지갑을 꺼내는 것이었다. "돈도 많네, 새끼들. 에헴. 이건 가방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비.." 어디서 또 들은 건 있다고. 쪼그리고 앉아 양아치들의 지갑을 나란히 바닥에 정렬해 놓고는 각각 5천원 씩 꺼내며 '손해배상' 따위의 말을 중얼거린다. 만원짜리 밖에 없는 녀석에게는 다른 녀석의 지갑에서 꺼낸 5천원을 끼워 넣어주는 것이었다. 양아치들은 찍 소리도 하지 못한 채 눈을 굴리며 녀석이 하는 짓을 지켜볼 뿐이었다. "이건, 교복 세탁비. 아무리 버릴 거라지만, 소중한 추억이 담겨져 있는 것이니 받을 건 받아야지, 암. 니들, 내가 오늘 이 교복을 입고 온 걸 다행으로 생각해. 앙?" 아까 집어넣었던 그 5천원을 다시 꺼내며 -그럴거면 왜 집어넣었냐고!!!- 각각 10000원 씩 빼앗는다 싶더니 다시금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아, 참 참.. 가장 중요한.. 정신적 피해 보상비를 가져가야지.." 즐거운 듯 중얼거리는 그 목소리가 악마의 목소리처럼 느껴졌다. 녀석은 서슴치 않고 녀석들 지갑에 있는 모든 돈을 다 꺼내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짜아식들, 돈도 많네. 갑부 집 자식들이구나?" "아.. 안돼.. 그.. 그거... 식비란 말이야..." 한 녀석이 거구 녀석의 만행을 지켜보다 결국 조그마하게 힘없이 말했다. 바닥에 웅크리고 앉아 네 개의 지갑에서 각각 돈을 계산하던 그 녀석은 그 말에, '앙?' 하며 말을 꺼낸 녀석을 향해 으르렁댔다. "아.. 아니야.." "야, 걱정마. 내가 설마 다 가져 가겠냐?" ....라고 잘도 지껄이며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뒤적였다. 동전들이었다. 동전이 꽤 많은 지 한참동안 또다시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4명분을 각각 나누더니, "점심은 굶으면 안 되지." 라며 만족스러운 듯 해괴한 웃음소리를 내뿜는 것이었다. 지켜보던 지옹마저 오싹해질 정도로 무시무시한 녀석이었다. 삥을 뜯으면서 저렇게 즐거워 할 수가.. 저렇게 당당할 수가.. 혹시 저런 구실로 삥을 뜯기 위해 일부러 맞아줬던 게 아닐까... 라는 의심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머릿속으로 지금 자신의 주머니에 얼마가 있는 지 계산을 해 보았다. 헉!! 그러고 보니, 어젯밤 어머니가 자신에게도 급식비를 넣어줬다. 겁이 질린 지옹이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치는 순간, 우지끈 하고 발 밑에 깡통이 밟혔다. 제에에기이이라아알!!! 정말 천재적인 악운이라니까!! 그 소리에 거구의 녀석이 이 쪽을 본 것은 두말하면 잔소리였다.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지옹은 숨을 헉 하고 삼켰다. 기괴스레 웃는 녀석의 얼굴은 악마, 그 자체였다. 저런 녀석에게 덤볐다니.. 양아치 녀석들.. 바보가 아닌가! 얼어붙은 나머지 다리도 후들거리지 않을 정도로 미동조차 하지 않는 지옹을 향해, 녀석은 마치 먹이를 찾는 하이에나 마냥 위험스레 다가왔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점점 가까이 다가올수록, 지옹은 그만 접시 물에 코 박고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마침내 손을 뻗으면 닿을 정도의 거리에 다다른 순간, 녀석이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너..." "허억.. 나.. 나 아무것도 못 봤어.. 나.. 나는.. 나는 말이지..." "거꾸로다?" ".....그러니까.. 나는... 어?" 한참을 횡설수설하던 지옹은 난데없는 녀석의 말에 눈을 왕방울 만하게 떴다. '거꾸로다..' 라니.. 그게 무슨 말이지. 서.. 설마.. 그.. '거꾸로 가는 보일러'를 뜻하는 건가? 이.. 이 자식.. 보일러 집 아들? 하지만.. 아무리 보일러 집 아들이라도, 사람 얼굴만 보면 무슨 보일러를 쓰는 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단 말인가!! 자신도 모르는 그 사실을!! 머릿속은 이미 블랙홀이었다. 눈을 연속으로 껌뻑거리며 뭔가 중얼중얼 내뱉는 지옹의 멱살을 녀석이 움켜쥐었다. 그 순간 지옹은 정말 오줌이라도 지려버릴 것만 같았다. "왜.. 왜애애.. 나.. 나는... 나는 그냥 학교 가는 길이었고.. 그게...." 이젠 아예 울먹이려는 지옹을 빤히 바라보는 녀석의 '악마적 눈'에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 지 몰라 식은땀만 주르륵 흘렀다. 손을 몇 번이고 주물럭대며 식은땀을 없애보려 했지만, 긴장이 풀릴 리 없다. "너.... 이거...." 녀석이 뭔가 말하려는 순간, 최대한의 용기를 내어, 정말 미친 척 하고, 걸리면 죽는다 라 생각하고, 있는 힘, 대략 17년 전쯤까지 젖 먹던 힘을 다 해 멱살을 쥔 녀석의 팔목을 뿌리쳤다. 그리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리기 시작했다. 계속해서 녀석이 무언가 소리쳤지만, 들릴 리 만무하다. 조금씩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학교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살았다는 생각이 커져만 갔다. 교문 앞에 도착했을 땐 눈물 콧물 땀 범벅이 되어버린 얼굴로 선도부 선생님을 붙들곤 만세까지 불러댔다. "마안세?? 이 새끼가.. 지각이 일상이지? 응? 일상이야?" "서.. 선생님..." 숨을 헐떡이며 방금 전에 있었던 사건을 얘기하려는데, 갑작스레 뒤에 한기가 느껴졌다. 지각한 녀석들이나 복장 불량으로 잡혀 한쪽 벽에 서 있던 녀석들 눈이 왕방울만해 진다. 심상치 않은 기운에 천천히, 마치 슬로 모션의 영화를 보듯 몸을 돌리자, 그 자리엔 아까의 그 녀석이 너무나 당당한 기색으로 서 있었다. "너... 누구냐?" 선도부 선생도 녀석의 큰 키에 당황 했는 지, 말을 더듬으며 외쳤다. "전학생인데요." 허리를 숙여 인사를 꾸벅하자, 선생은 그제야 정신이 드는 지 헛기침을 쿨럭거리며, '그래? 들어가 봐.' 라고 중얼거렸다. 오싹한 기운을 억누르며 간신히 서 있는 정도의 지옹의 등을, 녀석은 툭 하고 한번 치더니, "재미있는 녀석." 이라 중얼거리곤 터벅 터벅 ?학교 쪽으로 걸어가는 것이었다. 재미있다니.. 무슨 뜻이지? 설마 썰렁한 쌍팔년도 개그, '쨈 있는 녀석' 따위를 내뱉은 게 아니라면, 도대체 저 녀석이 왜 내게 재미있다고 할까. 설마.. 찍혔다는 녀석만의 독특한 의사 표시인가? 남아있는 아이들이 술렁대자 선생은 완전 회복이 된 듯 들고 있는 막대기로 애들 머리를 탁탁 때리며, "다들 조용히 안 해? 뭘 잘했다고 떠들어, 떠들긴!!" 하고 소리쳤다. 그리곤 그때까지 블랙홀에 빠진 채 텅 빈 눈동자로 멍청히 녀석의 말을 중얼중얼 음미(?)하던 지옹을 가리키며 외쳤다. "이 쌔끼!! 넌 뭐야? 오냐, 이젠 니 얼굴도 정겹다. 재미있다 이거지? 아주.. 교복 셔츠까지 거꾸로 입고는.. 자알~ 한다. 너 이러고 학교까지 온 거냐? 칠칠맞은 녀석 같으니... 새끼, 넌 운동장 추가 10바퀴 더야!!!" 그랬다. ............'거꾸로' 의 의문이 풀리는 순간이었다. ? "승질나." 무거운 가방을 책상위에 탁 하고 올려놓으며 큰 소리를 내며 의자를 뒤로 끌고 자리에 털썩 앉았다. 그 때까지 책상에 엎드려 잠을 자던 녀석이 스르르 머리를 들고 이쪽을 쳐다본다. ? "일찍 좀 와라. 내가 몇 번을 말했냐? 이 새끼는 야밤에 뭐하고 맨날 아침까지 쳐 자?" 빈정거리는 목소리에 열이 또 확 뻗친다. 그래도 대꾸하지 않고 가방 위에 머리를 턱 올려놓은 채 의미 없는 눈동자로 초록색 칠판을 머엉 하게 바라보았다. "야, 너 교복!!" "아 참!" 관형의 말에 재빨리 교복 단추를 쓱쓱 풀곤 옷을 뒤집어 꿰었다. 옆에서 한심하다는 코방귀 소리가 들린다. "몸도 졸라 빈약한 새끼가 어디서 훌떡 훌떡 벗어? 자알 한다. 야, 세수는 했냐?" "맞다." 의자를 드르륵 다시 끌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사물함에 가 부스럭거리며 비누와 칫솔을 꺼내자, 관형은 다시 질렸다는 듯 중얼댄다. "졸라 더어러운 새끼. 저 머리에 떡진 것 좀 봐. 씨발.. 오늘 자리 바꿔달라고 하던지 해야지. 진짜 더러워서 같이 못 앉겠네." "니가 앉은 거잖아." 투덜대는 목소리에 담담하게 대답한 뒤 화장실을 향해 나서자, 그렇게 지껄이다가도 졸래졸래 따라온다. "뭐야?" "화장실 간다, 왜?" "쳇." 귀찮다는 듯 투덜거리자 관형은 그런 지옹의 뒤통수를 탁 때리곤, 생각이 났는지 쓱쓱 교복 바지에 문지른다. "이 새끼, 너 많이 컸다? 예전엔 졸졸 따라다니면서 찍소리도 못 내던게..." "내가 언제?" ...라지만 찔리는 구석은 있다. 중학교 때까지만 해도 학교에서 꽤나 잘나가던 관형이 말을 걸었을 땐 기뻤다고나 할까? 녀석과 함께 다니면 괴롭히는 녀석들이 줄어들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지옹은 이것저것 갖다 바치며 얄팍한 우정이 지속되기 위해 최선을 다했었다. 하지만 역시나 저주받은 운명. 이 녀석이랑 다닌 후로부터 노골적으로 괴롭히는 녀석들은 사라졌지만, 문제의 근원지라고 해야 할까.. 싸움이 끊이질 않는다. 물론 옆에서 하는 것 없이 가방만 붙들고 지켜보는 게 다이긴 하지만, 굉장히 피곤한 일이었다. 게다가 관형 주위의 녀석들은 모두들 학교에서 내로라하는 깡패녀석들. 학교 제일의 악당 한지태, 그 녀석도 이 놈과 친우다. 부딪친 적은 없지만, 그래도 어마어마한 녀석들을 알고 있다는 게 지옹으로서는 대단해 보이기도 한 한편, 짜증나고 귀찮기도 했다. 3년을 알고 본 녀석은, 싸울 때 빼고는 멋있는 점이 하나도 없는 최악의 인간성. 이런 녀석이 이지메를 당하지 않는 건 다 주먹 탓이다. 젠장할. 한쪽 벽에 기대 담배를 피우고 있는 녀석들이나, 어디서 가져 왔는 지 겉표지부터가 풍성(..)하기 짝이 없는 잡지를 들고는 침을 질질 흘리는 녀석들을 옆에 둔 채, 거울을 보며 치카치카 이를 닦고 세수하는 와중에도, 관형은 옆에서 계속 험악하게 중얼댄다. "씨발.. 어제 또 한 건 했더니 어깨 아파 죽겠네. 이따가 좀 주물러 봐." "아, 씨..." "어쭈?" "졸립단 말이야." "넌 그렇게 자고 매일 졸립냐? 도대체 뭐 하는 거야, 밤에? 종일 딸딸이라도 치는 거냐?" 하얀 치약 거품을 입에 물고 거울을 지그시 노려보자, 녀석은 재미있다는 듯 낄낄거린다. "새끼, 유난스럽긴.. 너 딸딸이 안 쳐? 안 치냐고? 다 치면서 내숭이야, 내숭은?" "누.. 누가 내숭 떨었다고 그래? 암튼.. 그.. 그런 말 쓰지 말랬잖아, 내가!!" 버럭 버럭 거품을 튀기면서까지 소리치자, 녀석의 눈빛이 험악하게 바뀐다. 살인적 눈빛이다. "야." 갑작스레 음산한 목소리다. "니가 쓰지 말라고 하면 내가 쓰지 말아야 하는 거냐?" 그 나직한 음성에 쫄아 버린다. 어쩔 수 없이 쫄아 버린 지옹은 미약하게나마 고개를 가로젓고는 거품을 세면대에 뱉었다. 세수까지 마치자, 녀석이 씩 웃으며.. "머리도 감아. 안 그러면 죽는다." 라고 스산하게 말했다. 어쩔 수 없이 대걸레 질 따위를 하는 세면대에 머리를 기울이고 비누로 벅벅 감았다. 한여름이 다가온다지만, 씨발.. 이가 시린다. 골이 띵 한 게 어지럽기까지 하다. 지옹이 머리를 감는 동안, 관형은 천천히 창가로 다가가, 어느새 끝내주는 누님이 예술적 자태를 뽐내고 있는 잡지를 바라보며 침까지 흘리고 있는 녀석들에게서 날렵하게 빼앗았다. "아, 씨발. 죽이네.. 야, 이거 내가 보고 주마." "아.. 나 아직.. 다 안 봤는데..." "그래서, 싫어?" ....저게 저 녀석 일상이다. "나 아까 굉장한 녀석 만났어." 국어 선생의 중얼 중얼대는 듯한 목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조그마하게 속삭이자, 엎드려 있던 관형이 눈을 게슴츠레 치켜 뜨며 '뭐가 굉장한데?' 라고 물었다. "굉장한 녀석이야. 오서방 자식 있잖아. 그 자식하고 그 옆에 턱에 사마귀같은 점 난 자식하고.. 키 작고 안경 쓴 녀석.. 암튼.. 걔네 패거리.." "오정환하고 김민중네 말이냐?" "응. 걔네랑 싸우는 거 봤는데, 진짜 눈 깜짝 할 사이에 쓰러뜨리더라. 게다가 돈까지 뺏는데... 완전 악마 같았어. 웃음소리도 '우겔겔겔...' 아니다, '크하하하..' 아니다, 아아.. 어떻게 웃더라? 암튼 굉장히 소름 끼치게 웃는데.." "너 또 전봇대나 나무 뒤에 숨었었지?" 정곡을 찌르는 그 말에 잠시 말을 멈추곤 얼굴이 시뻘개졌다. 그러자 '킥, 그럴 줄 알았어.' 라는 비웃음이 직격으로 돌아온다. 그래, 나 그런 놈이다. 찔끔해서 재빨리 말을 돌렸다. "아.. 아무튼 간에.. 괴물 같은 녀석이었어. 키도 한 185는 될 것 같더라. 적어도 확실히 180은 넘어. 몸도 진짜 캡 좋고.. 무슨 운동선수 같던데?" "어디 학굔데?" "우리학교." 지옹의 말에 관형은 피식 웃고는 다시 책상에 엎드렸다. "뭐.. 뭐야, 그 웃음은?" "너 잠이 덜 깼냐? 그딴 녀석이 우리학교에 어디 있어? 이 몸과 한지태를 빼면 1,2,3학년 통틀어 그런 녀석은 없다고. 또라이 새끼, 눈깔도 해태눈깔 인 게..." 씨발.. 이 새끼는 해태가 어떻게 생겼는 지도 모르는 주제에... 부글부글 끓지만 애써 억누르고 다시 입을 열었다. "아냐. 오늘 전학 왔다고 했어." 그러자 다시 고갤 든다. "전학?" "응." "이 여름에 전학을 왔다고?" "아씨.. 진짜.. 못 믿겠음 오서방네 불러서 물어봐 봐. 걔네 엄청 깨졌어." 지옹이 씩씩거리며 말하자, 관형은 뭔가 생각이 잠긴 듯한 얼굴로 한참을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곤 곧바로 우습다는 듯 고개를 휘휘 저었다. "뭐야?" "아니.. 오정환 새끼네는 원래 졸라 약해. 그 새끼들 쓰러뜨렸다고 해서 굉장한 놈이라고 말하는 건 오바다, 새끼야." "하지만...." 하지만 니가 그 녀석 못 봐서 그래.. 너보다 셀지도 모른다고.. 아니, 한지태 보다도... 게다가 4대 1이었는데.. ...라고 말을 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수업도중 짐승 한 마리가 날뛰게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하던 말을 억눌렀다. 어쩐지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또다시 졸음이 몰려와 지옹은 눈을 감았다. 손에 나른하게 힘을 준 채 펜을 쥐는 자세로 스르르 눈을 감았다. 이제는 단련되어서, 이 자세로도 굉장한 숙면을 취할 수가 있다. 관형이 자식은 뭐하러 그렇게 힘들이며 조냐고, 차라리 자기처럼 엎드려 자는 게 훨씬 숙면의 효과를 이룬다고 자랑스레 얘기하지만, 씨발.. 그게 학생으로서 할 짓이냐? 최소한 선생에 대한 예의는 보여야지.. 지옹이 입을 다물고 미라처럼 굳어버리자, 관형은 다시 책상에 머리를 파묻곤 잠자는 포즈를 취했다. 이렇게 한 4교시까지는 잔다. 1교시가 끝나면 교실 안은 쥐 죽은 듯 조용하다. 한번은 쉬는 시간 어떤 녀석이 굉장한 소음을 내며 의자를 드르륵 끌고 일어나 멋모르고 떠들다 관형에게 죽도록 맞은 후부터는 점심시간 전 쉬는 시간은 항상 이렇듯 조용하다. 때문에 잠도 더 잘 온다. 거의 수면제가 뿌려진 듯한 분위기다. 아이들이 말을 할 때 조용조용 속삭이는 소리가 그 수면제 효과를 두 배로 가중시킨다. "저기...." 누군가 어깨를 톡톡 치며 속삭였다. 깜짝 놀라 눈을 뜨자, 쉬는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고개를 뻣뻣하게 든 채 펜을 잡고 졸고 있는 자신을 깨달았다. "어?" "미안한데... 관형이 좀 깨워줄래?" "어? 어.." 같은 반 앞줄에 앉는 녀석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지옹에게 부탁을 했다. 지옹은 옆에서 지 안방처럼 편안하게 잠들어 있는 관형의 어깨를 탁 쳤다. "아, 씨발.." "야, 일어나 봐." 으르렁대던 관형이, 깨운 사람이 지옹이라는 걸 알고는 조금 얼굴이 풀어진다. "왜, 씨발.. 매점은 2교시 끝나고 가." "아니.. 그게 아니라.. 야, 너 할 말 있다며?" 책상 옆에 서 있는 소심한 녀석을 바라보며 묻자, 그 녀석은 점점 더 혈색이 없어지는 얼굴로 조그맣게 말했다. "저기.. 한지태가 2교시 끝나고 좀 들리래." "뭐? 왜?" "그.. 그게.. 1반에 어떤 애가 전학 왔는데.. 걔 때문인 것 같아.." "야, 1반에 전학 왔는데 9반 놈이 왜 난리야?" 그.. 그건 내가 어떻게 알아... ..라는 표정을 지으며 말을 전달한 녀석 얼굴이 하얘진다. 이 녀석 이름이 뭐더라... 김.. 김상택이었나? "상택아, 됐으니까 가 봐." "어? 어..." 그 말이 반갑다는 듯 돌아서던 녀석은 잠깐 멈추더니, '근데.. 난 상탠데...' 라고 조그마하게 중얼거린다. 그리곤 재빨리 자신의 자리로 쭈뼛쭈뼛 돌아가는 것이었다. "저, 븅신 새끼 뭐야? 씨발.. 이름 잘못 부를 수도 있는 거지.." 그런데 왜 니가 지랄이냐. 관형이 으르렁대자 지옹은 관심을 분산시키기 위해 애써 말을 돌리려 노력했다. "야, 아까 내가 말한 녀석이 1반으로 전학 갔나 보다." "씨발.. 전학생 한 두 명이야? 왜 난리냐고 한지태 그 녀석은." 말은 이렇게 하지만 분명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것이 틀림없다. 안 그러면 신경도 안 쓰고 다시 책상에 누워 잠을 잘 녀석인데 눈을 부릅뜨고 중얼거리는 걸 보면 말이다. "하여간.. 한지태 그 새끼도 졸라 나대." "좋아하면서.." 책상에 엎드리며 툭 하고 내뱉자, 녀석 안색이 싹 변한다. "뭐.. 뭐?" "너 한지태 좋아하잖아." "씨발..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호모냐? 고추달린 새끼를 좋아하게." 목소리가 좀 크다 싶었다. 주위 녀석들이 조그마하게 떠들다가 화들짝 놀라 이쪽을 의아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잠자던 녀석들이 신경질을 내며 깼다가, 소리지른 것이 관형이라는 걸 알고는 다시 책상에 얼굴을 묻는다. "조용히 좀 말해." "니가 먼저 헛소릴 했잖아!!" "아~ 씨.. 진짜 그게 그런 뜻이냐?" "어쭈? 지금 '씨' 라고 했냐? 씨 뭐? 씨 뭐라고 하려고? 씨발? 씨부랄? 씨팔놈?" 분위기 보니 완전 스팀 돌았다. 이런 성격 개차반 같은 새끼랑 같이 지내려니 골이 다 띵하다. 지는 매일같이 입에 달고 사는 게 쌍시옷으로 시작되는 언어들이면서.. 어쩔 수 없이 다시 책상에 얼굴을 묻고 엎드렸다. 이럴 땐 자는 척 하는 게 상책이다. 괜히 맞받아 쳤다간 수업시간 내내 시비 걸 게 분명하다. 게다가 어찌나 소심한지, 잘못 했다간 꼴에 또 삐지기까지 해서 한 주 내내 힘들지도 모른다. "야, 야.. 너 말 끝내. 이렇게 하면 내가 잊어줄 줄 알아? 자는 척 하지 말고 일어나란 말이야, 새끼야." "...." "아무튼 너, 앞으로 말 조심해. 남들이 듣기에 오해 살 만한 헛소리하지 말란 말이야." 니가 큰 소리로 떠들지만 않았더라도 남들 다 몰라, 이 등신새끼야. "아.. 씨.. 또 9반까지 가야 하잖아. 졸라 먼데.." 계단만 올라가면 9반이다. "너, 2교시 끝나고 매점 갈 거지? 올 때 불고기 버거 사와." 책상 옆에 무언가 탁 올려졌다. 분명 천 원 짜리 지폐 2개일 것이다. 씹새.. 불고기 버거는 2300원이란 말이다. 수요일은 싫다. 특히나 오전 수업은 최악이다. 첫 시간인 국어시간을 제외하면 2교시 체육, 3교시 영어, 4교시 수학이다. 제일 싫어하는 과목이 주르륵 나열된 것을 떠나서라도, 오전에 잠을 제대로 잘 수 없다는 건 정말 곤욕이다. 특히나 체육. 체육 시간이 정말 싫다. 딱히 운동을 싫어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수선스럽게 옷을 갈아입는 것도 싫고, 늦게 나갈 때 마다 선착순으로 운동장 뛰어야 하는 것은 정말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짜증이 난다. 게다가 자신은 망할 놈의 어떤 성격 개차반 같은 새끼 때문에 매번 운동장을 뛰어야 하는 것이다. 아침에 지각해서 뛰는 것으로도 모자라, 선착순으로 뛰어야 하는 것. 완전 생활이다. "아씨.. 진작 좀 말하면 얼마나 좋아!!" 투덜거리며 교실문을 드르륵 열었다. 이미 거의 다가 운동장으로 빠져나가 텅 빈 상태다. 책상에 엎드려 있는 징글맞은 한 놈 빼고는 말이다. 옆 반에서 체육복을 빌려다 책상위에 탁 올려놓자, 그때까지 자고 있던 관형이 스르르 일어나 교복을 갈아입는다. "늦었잖아!" 뭐얼 잘났다고 승질이냐, 승질이!! 진짜 마음 같아서는 죽도록 패 주고 싶지만 몸이 허락하질 않는다. 주먹을 부르르 떨며 교복 단추를 풀자, 어느새 녀석은 바람과도 같은 속도로 체육복을 갈아입고는 벌써 교실문을 나서고 있다. "야아~ 같이가아~!!" 소리쳐도 소용없다. 결국 교실 열쇠가 덩그라니 놓여져 있는 책상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체육복 갈아입기에 집중한다. 입술을 깨물며 중얼거렸다. "씨팔놈. 저건 사람 새끼가 아니야. 악마야, 악마." 2교시 체육인 걸 왜들 진작 알려주지 않냐고. 망할 놈의 관형이 새끼 때문에 쥐도 새도 모르게 체육복을 갈아입고 나가는 녀석들 탓에, 2교시 체육인 걸 깜빡했다. 결국 3분도 채 남지 않은 쉬는 시간에 어떤 녀석이 스르르 다가와, "저.. 근데 이번 시간 체육이거든? 탁자 위에 열쇠 있으니 잠그고 나와.." 라는 말을 마치고 나가버렸다. 그 말을 듣자 마자 관형은, "야, 체육복 빌려와. 사이즈 큰 걸로." 라며 태연히 책상에 얼굴을 묻는 게 아닌가. 빌어먹을 자식! 결국 교실 문을 잠그고, 창문까지 꼭꼭 잠겼는지 확인 한 후 엄청난 속도로 복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신발 꿰는 것도 잊고 미친 듯이 운동장으로 달려가자, 이미 배가 불룩 튀어나온 체육 선생이 우스꽝스러운 붉은 색 모자에, 스파르타 식 선글라스를 끼고는 방망이를 휘두른 채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또 너냐?" 문제는 이 체육교사가 학주라는 거지. 아침마다 만나는 체육선생은 질렸다는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운동장 10바퀴 뛰고 와." "선생님..." 아무리 그래도 10바퀴는 좀 심하다. 조금 애원섞인 목소리로 선생을 가련하게 바라봐도, 가차없다. "뛰지 않고 뭐해? 다른 녀석들은 농구를 하던지 배구를 하던지.. 아무튼, 그늘 밑에 앉는 녀석 있으면 저 녀석이랑 같이 뛴다. 알겠나?" '예에~!!!' 소리가 운동장에 우렁차게 메아리쳤다. 열 받은 얼굴로 관형을 쳐다보자, 녀석은 '안됐다..' 라는 얼굴로 피식 웃은 후 농구공을 팡팡거리며 농구골대로 뛰어갔다. 저건 진짜 웬수다. 어쩔 수 없이 교실 열쇠를 반장에게 주고 운동장을 뛰기 시작했다. 이젠 단련이 되어서 인지 10바퀴 뛰어도 가슴이 벌렁 벌렁 대지도 않는다. 아침 햇살은 유난히 뜨겁기에 눈이 부셨다. 옆 한 귀퉁이에서 발야구 연습을 하고 있는 여자 반 애들이 이쪽을 보며 키득거린다. 쪽 팔리다고. 정말. 하얀색 티셔츠에 하늘색 반바지 체육복을 입은 여자애들은 같은 옷을 입었지만 사내녀석들과는 영 딴판이다. 한쪽에 삼삼오오 모여 이쪽을 보며 웃고 있는 긴 생 머리의 여자애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순식간에 목덜미가 뜨거워졌다. 1학년 때부터 마음속으로만 찍어둔 천지영이었다. 학교 퀸카에도 공부도 잘하고, 게다가 도도하기까지 해서 남자애들이 쉽게 건들지를 못한다. 그 때문인지 인기는 끊이지 않고 상승세다. 타 학교 학생들도 간혹 교문 앞을 서성일 정도이니.. 그 인기가 하늘을 찌를 정도였다. 자신 같은 녀석은 그저 마음속 깊이 사모하고 흠모하며 바라볼 뿐이지만, 그래도 이렇듯 자신을 바라보며 - 비록 놀리는 듯한 시선이라도 - 웃고 있는 예쁘장한 얼굴에 가슴이 뜨거워지고 숨이 가빠오는 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게다가 관형과는 초등학교 5, 6 학년 같은 반 동창이라서 스스럼없이 인사를 나누기 때문에 항상 그 옆에 있는 자신을 모를 리가 없다. 관형이 자식. 복도 많은 새끼. 학교 내에서 천지영이 스스럼없이 인사를 나누는 남자녀석은 관형이 자식 밖에 없는 듯 했다. 왜 하필 가련한 천지영은 그 초등학교를 나와서 저런 깡패 말 뼈다귀 같은 채관형과 아무 스스럼없이 인사를 나눈단 말인가! 지옹이 관형에게 꼼짝 못하는 것은, 물론 그 녀석 주먹이 핵 주먹이라는 문제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천지영과 잘 안다는 점에서 어쩔 수가 없었다. 아직까지 관형은 지옹이 천지영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지만 만약 그러한 사실을 알게된다면 서지옹 인생이 왕 쪽 나는 것은 불 보 듯 뻔한 일이었다. 약점이랍시고 쥐고는 얼마나 괴롭히겠는가. 그 녀석의 사디스트 같은 행태는 이미 겪을 만큼 겪어왔다. 결국 10바퀴를 다 뛰고 관형이 아이들과 함께 농구하고 있는 농구골대 쪽으로 터벅 터벅 걸어갔다. 풀썩 하고 옆에 주저앉아 농구하고 있는 녀석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저 새끼 좀 보라지. 개 버릇 남 못 준다고, 농구 할 때도 엄청난 태클에 반칙을 일삼는다. 감히 무서워서 관형 옆에 다가가지도 못하는 아이들. 정작 본인은 뭐가 즐거운 지 땀을 흘리며 웃고 있지만, 주위 녀석들 표정은 암울하기 짝이 없다. 한번 관형에게 잡히면 체육시간 끝날 때까지 농구를 해야 한다. 부상자가 속출하는 걸 둘 째 치고라도, 녀석은 도중에 빠져나가는 녀석들을 가만두지 않기 때문에 더 끔찍한 게임이다.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자, 퍽퍽 팔꿈치로 애들을 치며 골대에 골인시킨 녀석이 씨익 웃으며 성큼 성큼 다가왔다. "야, 다 뛰었냐?" "씨.." "씨이?" "..." "너 또 한번만 욕하면 나한테 죽는다." "내.. 내가 언제 욕했다고 그래?" 물론 속으론 골백번도 더 씹었지만.. 자신 앞에 그늘을 드리우고 서 있는 녀석이 두려워 버벅 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지를 툭툭 털자, 녀석은 등을 툭 치며, "이번 시간 끝나자 마자 뛰어가서 콜라랑 햄버거 사와." ..란다. 씨발.. 2000원 줘 놓고.. 2교시 끝나자 마자 그 전쟁터에 들어가야 하는 건 둘째치고, 갔다 오면 교복 갈아입을 시간도 없단 말이다. 최소한 세수할 시간은 줘야 하는 거 아니야? 짜증스러웠지만 내색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괜히 한소리 했다간 또 피곤한 사태가 벌어질 게 뻔했다. "허억!!!" "뭐야?" 날카로운 목소리에, 지옹은 고개를 푹 숙였다. 주머니에 돈이 없다. 체육 시간 끝나자 마자 뛰어가서 사오려고 돈을 주머니에 넣어왔는데, 아까 뛰는 와중에 3000원이 빠진 것 같았다. 하얗게 질린 지옹은 정신없이 운동장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어딘가에 1000원짜리 지폐 3장이 다소곳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으리라 위안했지만, 넓은 운동장에서 3000원 찾기가 쉬운 일이 아니다. 행여 어떤 녀석이 벌써 그 돈을 주웠다면?? 미친 듯 운동장을 돌아다녔지만, 세종대왕님의 얼굴이 도무지 보일 생각을 하지 않는다. 차마 천지영네 반 애들이 있는 곳까지는 가기가 뭐해서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쓰디쓴 눈물을 삼키며 돌아서자, 채관형이 저쪽에서 물끄러미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웬 쇼냐고 묻고 싶은 듯한 얼굴이었다. 차마 돈을 잃어버렸다고 말 할 수 없었다. 분명 말을 했다간, '지가 잃어버려 놓고 난리야?' 내지는 '자알 찾아봐라..' 라는 식의 속 터지는 말이 다일 터였다. 결국 체육선생이 일찍 들어간 틈을 타 재빨리 반장에게 열쇠를 받아 쥐고는 교실을 향해 뛰어갔다. 차라리 아까 뛰기 전에 돈도 반장에게 맡길걸... 하는 후회감이 마구마구 치밀어 오르는 것이었다. 간신히 쉬는 시간 종이 울리기 전에 지갑에서 돈을 꺼내 번개같이 매점 쪽을 향해 뛰어갔다. 아직 아무도 없다. 숨을 헉헉 내쉬며 불고기 버거 하나와 콜라 한 개, 요구르트 하나를 사서 콜라는 한쪽 겨드랑이에 끼웠다. 자신도 콜라를 마시고 싶지만, 돈이 없다. 차마 양심상 버거는 끼울 수 없어 손에 쥐었지만, 콜라 한 개는 땀에 젖은 겨드랑이에 놓고 마구 비볐다. 이런다고 냄새가 배일 리 없지만, 어쩐지 마음이 조금 풀리는 것이었다. 씨익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요구르트에 빨대를 꽂는 순간, 투욱 하고 누군가와 부딪쳐 요구르트가 바닥에 뒹굴었다. 꽤나 요란한 소리를 내며 퍼억 바닥에 떨어진 요구르트는 이미 알루미늄 껍질이 터진 후였다. "앗!! 내 요구르트으으!!!" "어라. 넌?" 바닥에 철푸덕 주저앉아 운명하신 요구르트를 붙들고 부르짖는데, 머리 위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드니, 아니나 다를까, 아침에 본 그 거구녀석이다. 역시나 악마 같은 얼굴에 기겁을 하고 앉은 자세에서 한 걸음 뒷걸음질쳤다. 아침의 사건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간다. "교복 거꾸로 입은 녀석." 쳇, 젠장. 그런 건 일일이 기억하지 말라고! "아아.." 입이 멋대로 한숨같은 탄성을 지르자 녀석은 꼴사납게 나뒹굴고 있는 자신을 가볍게 들어 자리에서 일으켰다. "넌 몇 학년 몇 반이냐?" 어쩐지 사실대로 말하면 큰일 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거짓말을 한다면 한 학교 내에서 부딪치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는데, 들키는 날엔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솔직하게 입을 열었다. "아.. 2.. 2학년 5반.." "너도 2학년이냐?"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녀석이 씩 웃었다. 그 웃음이 무섭기만 한 지옹으로서는 한기가 이는 걸 애써 억누르며 겨드랑이에 끼고 있던 콜라를 천천히 빼냈다. "따라 와, 요구르트 사 줄게." "어.. 엉?" 이 녀석이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라며 눈을 껌뻑 껌뻑 뜨자, 녀석은 다시금 어깨를 툭 친다. "요구르트 사 준다고.. 내가 웬만해서는 잘 안 쏘는데, 오늘은 용돈을 좀 받아서 말이지.." 라지만.. 이 자식, 이 무슨 재미없는 농담이란 말이냐. 니가 오늘 아침에 삥 뜯는 거,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고. 넌 삥 뜯은 걸 용돈이라 치부한단 말이냐, 이 속 편한 자식아!! 아니, 사실 그것보다.. 그 많은 돈을 삥 뜯었으면서 요구르트 하나에 생색내는 저 꼴이 더 기가 막히다. 당연히 니가 떨궜으니, 니가 사야 하는 거잖아!! ...라고 마음속에선 부르짖고 있었지만, 차마 말은 못하고 쫓아갔다. 어처구니없는 분노가 스멀스멀 올라왔지만, 녀석은 무사태평 안하무인한 얼굴로 요구르트를 주문하는 것이었다. "캬아.. 시원하다.." 매점 앞에 있는 등 없는 넓은 벤취에 앉아 시원하게 밀키스를 들이마시는 녀석은 어찌나 평화로워 보이는 지 차마, '저.. 나 수업 들어가야 하는데..' 라는 말도 못한 채 손에 쥔 콜라와 햄버거만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날씨 좋고.. 좋네, 좋아.." 늙은이처럼 교복 자락을 펄럭이며 좋아 좋아를 연발한다. 요구르트는 입에도 대지 못하고 있었다. 어쩐지 입안으로 넘기면, 이 녀석이 어떤 생색을 낼 지 두려워졌다. 척 봐도 분명 그 웬수같은 채관형 과다. 아무래도, 더 했으면 더 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땡땡이를 치면서, 게다가 버젓이 학교 내에서, 이렇게 천하태평한 녀석은 처음이었다. 선생들 사이에서 악명 높기로 소문난 그 채관형도, 이렇게까지 느긋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어라? 왜 안 마시냐?" "....." '좋다 좋아' 따위를 연발하다가 자신을 본 모양인지, 여전히 빨대가 꽂힌 요구르트를 만지작거리고 있는 지옹을 내려다보며 의아한 듯 물었다. 언뜻 본 녀석의 밀키스는 이미 끝장 난 모양인지 우그러져 있었다. 어쩐지 이 상태에서 안 마신다면, 이 괴물 같은 녀석에게 빼앗길 것만 같아 재빨리 빨대를 쪽쪽 빨아들였다. 너무 급히 마셔서인지 사례가 들릴 듯 목구멍이 아파 왔다. 기침을 애써 삼키며 요구르트 한병을 다 비우자, 녀석은 씨익 웃으며 의자에 벌러덩 눕는다. "그.. 근데.. 너 수업 안 들어가?" 조그마한 ?목소리로 기어가듯 묻자, 녀석은 클클 댄다. 도무지 저 녀석 웃음소리는 적응이 되질 않는다. "아아아~ 첫날부터 수업이라니, 말이 되냐? 원래 전학생은 첫날 쉬는 거야." 그.. 그런 게 어딨어. 이 썩어빠진 녀석아! 어이가 없어서 녀석을 멍하니 내려다보자, 녀석은 자신이 한 무시무시한 말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듯 눈까지 스르르 감고 햇살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생각이 났는지 물끄러미 자신을 올려다보았다. 어쩐지 얼굴이 붉어져, 고개를 휙 돌리자, 녀석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곤 의아한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며 이렇게 지껄이는 것이었다. "근데, 너는 왜 수업 안 들어가냐?" 몰라서 묻냐, 이 깡통같은 자식아!! 너 때문이잖아!!!! 수업에 30분이나 늦게 들어가자, 영어선생은 출석부를 치켜들다가 절뚝거리는 척 비틀대는 지옹을 보고는 스르르 내렸다. "너, 이 자식. 어디 갔다 와?" 역시. 계단을 오르며 어떻게 하면 조금 맞을까 생각한 것이 양호실이었다. 다리를 삐었다고 거짓말을 하면 그래도 좀 봐주지 않을까.. 라는 생각에 교실이 보일 쯤부터 절뚝거렸던 것이다. "야.. 양호실이요.." 거짓말을 하자니 얼굴이 벌개진다. 하지만 그것을 고통으로 착각했는지, 영어선생은 물끄러미 바라보다, '들어가.' 라는 말로 끝냈다. 다행이다 싶어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그렇지만 여전히 절뚝거리는 흉내를 내며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웬 일인지, 관형이 자식은 잠이 들어 있지 않았다. 대신 눈을 부릅뜨고는 자신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너..." "....아!" "아!!?? 너.... 죽을래?" 나직한 목소리라서 영어선생한테 까지는 들리지 않지만, 대신 주위에 있는 녀석들에겐 들렸나 보다. 관형과 지옹이 앉아 있는 자리를 기점으로 반경 2미터 내가 얼어붙었다. "....어디 갔다 왔어?" "....매점." "콜라랑 햄버거는?" "교실 뒷문 옆에 놨어." "씨발.. 바닥에 떨어진 걸 먹으라는 거야?" 조금 목소리가 커진다. "그냥 먹어.." "어디 갔다 왔냐고." 잘하면 수업도중 앰뷸란스 오게 생겼다. 어쩔 수 없이 '저어.. 매점..' 이라고 시큰둥하게 말하자, 녀석은 여전히 눈을 부라렸다. "웃기지 마. 매점에서 햄버거 만들어와도 시간 남는다고." "....콜라 만들어 왔다, 됐냐?" "뒤지고 싶냐?" '죽는다' 보다 더 무서운 말이다. 침을 꼴깍 삼키고, 고개를 도리 저었다. "매점에서.. 누구 좀 만나서.." "누구?" "아아... 그게..." 어쩐지 아침에 봤던 그 녀석이라고 말하면 길길이 날뛸 것 같았다. 때문에 애써 웃으며 말을 돌렸다. "저기.. 아까 한지태가 왜 부른 거야? 진짜 전학생 때문에?" "씨발.. 그 얘긴 꺼내지 말고. 너 말 돌리면 죽는다." 분위기 심상치 않다. 결국 한숨을 내쉬곤 사실대로 이실직고하기에 이르렀다. "매점 갔는데, 아침에 봤던 그 녀석 만나서..." 그러고 보니, 아직도 이름을 모른다. 그런 녀석과 40분이 넘는 시간을 장장 나란히 앉아 있었다니. 게다가, "점심시간 끝나면 학교 좀 안내해줘라. 내가 전학생이라서 친구가 없잖냐." 라고 라며 씨익 웃던 그 녀석 얼굴이 자꾸만 떠오르는 것이었다. "뭐? 그 녀석? 전학생이라는 그 녀석?" 순간, 교탁이 탕탕 두드려지는 소리가 교실을 울려퍼지더니, 화가 난 영어선생이 이쪽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너희 둘!! 떠들려면 밖에 나가!!" 오.. 저런, 저런.. 선생님. 실수 하셨네요. 선생이 말을 마치자 마자 기다렸다는 듯 관형은 의자를 드르륵 끌며 밖으로 성큼 성큼 나갔다. 물론, 지옹 역시 끌려나가듯 함께였다. "야.. 아파~!!" 아프다고 비명을 질러도, 관형은 멱살을 움켜쥔 손의 힘을 풀 생각을 하질 않는다. "아프다니까안!!" 손을 팡팡 치며 부르짖자, 녀석은 옥상에 다다라서야 멱살을 놓아줬다. "너 그 녀석이랑 친해?" 이게 무슨 개뼈다귀 갉아먹는 소리냐. "친하고 말고가 어딨어? 오늘 처음 봤단 말이야." "그런데 그 소심한 니가 수업까지 땡땡이 치면서 처음 만난 새끼랑 노닥거리고 왔다고?" 미친놈. 상황을 니가 잘 몰라서 말하는 모양인데.. 노닥거린 게 아니란 말이다. "무슨 소리야.. 그 녀석이 지 마음대로.." ...라고 해도, 사실 생각해보면 그런 것도 아니었다. 마지막에 녀석이, '수업 안 들어가냐?' 라고 물었던 것을 떠올리면, 억지로 잡고 있었던 것도 아니다. 단지 쫄아 버린 지옹이 어쩔 줄 몰라 멍하니 함께 앉아 있던 것 뿐이지. 때문에 항의하던 지옹은 입을 꾹 다물어버렸다. "뭐야, 지 마음대로 뭐? 녀석이 때리기라도 했다는 거야?" "그런 게 아니야." "그 새끼.. 마음에 안 들어." 얼굴도 본 적이 없으면서 마음에 안 들고 자시고가 어딨어. 속으로 투덜거리며 옥상 밑의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스산한 바람이 볼을 스치고 지나갔다. "오늘 점심시간에 그 녀석 칠지도 몰라." "..뭐?" "뭐, 지태 그 녀석은 별 흥미 없는 것 같은데.. 아무래도 같은 학교 녀석들이 전학생한테 첫날부터 맞은 게 골치 아프게 됐어. 어차피 별것도 아닌 새끼일 텐데 왜들 난리인지.. 씨발, 밑에 있는 새끼들이 하도 지랄해서 지태도 한번 보자는 식이더군." 에에에? 아무리 그래도 전학 첫날에.. "하지만..." "아.. 짜증나. 그러길래 내가 일진 같은 거 하지 말자고 했는데도... 씨발." 하지 말자고 한다고 해서 니들이 안 할 주먹들이냐? 중학교 때부터 일대에 자자한 녀석들이 어떻게 일진을 안 한다는 거야? "어쨌든, 뭐.. 일단은 천수가 알아서 하기로 했으니까 우리는 지켜볼 생각인데... 너, 조심해. 그 녀석이랑 떨어지라고. 알았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지만, 머리 속은 핑핑 돌아가고 있었다. 어차피 자신 따위, 그 녀석이 어떻게 되든 상관이야 없었지만, 그래도 '캬아.. 좋다..' 따위를 연발하며 밀키스를 마시던 그 녀석이 생각나 기분이 찝찝했다. 건들지만 않으면 그다지 나쁜 녀석 같지는 않았는데... 황천수는 비록 한지태나 채관형에 비하면 약한 녀석에 속했지만, 그래도 학교 밖을 나서면 꽤나 유명한 인물이었다. 지태나 관형 따위의 녀석들을 제외하면 져 본 적이 없는 녀석이었다. 한간에는, 중학교 때도 일진을 먹고 나왔다는 얘기도 있었다. 다만 학교 선택에 있어 지지리도 운이 없는 나머지 무시무시 천하무적의 두 녀석, 한지태 채관형과 같은 학교가 되어버린 것이 저주받은 운명이었다. 그렇게 따지고 보면 자신은 저주에 저주 곱하기 그 제곱인 녀석임에 틀림없었다. 한가한 바람이 좋긴 하다만, 이 시간이 끝나면 영어가 뭐라고 난리를 쳐 댈지 상상만 해도 한기가 흘렀다. 물론, 채관형에게 얻어맞는 것 보단 낫겠지만. 휴우..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영어 선생한테 불려가서도 여전히 거만한 자세로 질문에 대답도 하지 않는 관형을 보며 속으로 욕설을 내뱉았다. 이 자식은 뇌가 무엇으로 되었는지, 한번 따봐야 한다. 아무렇지도 않고 창문 쪽을 보며 한 귀로 흘려듣는 폼이, 귀라도 파면 완전 딱, 그것이었다. "알았어, 몰랐어, 이 자식들아!!" 사실 무슨 말을 했는 지는 모르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옆구리를 쿡 찌르자, 관형 역시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럼 내일 아침 9시까지다." 말을 마친 영어선생은 하얀 종이를 수북히 내밀었다. 엉겁결에 받긴 했지만, 도무지 이걸로 뭘 하라는 건지 이해가 가질 않아 눈을 동그랗게 뜨고 멀뚱멀뚱 서 있자, 영어선생이 소리쳤다. "뭐 해, 이 자식들아. 가 봐. 빈 공간 있으면 두배다.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따위의 말만 가득 채워 놓아도 마찬가지야. 알았어?" 허억. 이거, 완전히 재수 황이다. 그 유명한 영어의 반성문 아닌가! 반성문을 써 봤자,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 따위의 말로 채우는 게 고작인데, 그게 행여 반복되어 써져 있으면 가차없이 '다시!' 라고 소리치기로 유명하다. 영어 선생이 아니라 국어선생으로 태어났어야 할 정도로 감수성 가득한 반성문을 바라는 게 이 선생의 특징이었던 것이었다. "제기랄.." "뭐가 제기랄이야? 이게 다 네 탓이잖아." "누가 늦게 들어오래?" "무슨 소리야? 늦게 들어오는 거랑 수업도중에 끌고 나가는 거랑 뭔 상관이냐고!!! 너 때문에 이게 뭐야. 이거 다 써야 하잖아. 나 글 못쓰는 거 알면서!!" 악에 받쳐 와락와락 소리지르자, 지나가는 저학년들이 관형에게 꾸벅 인사를 하다가도 놀랍다는 듯 지옹을 쳐다보았다. 감히 채관형에게 소리를... 이라는 표정이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대신 써달라 이거야?" "몰라, 모른다고!! 아, 진짜 내일 아침까지 이거 어떻게 다 써!! 어떻게 다 쓰냐고오오!!" 바락 바락 질러대는데도, 관형은 물끄러미 지옹을 바라볼 뿐이다. 헉 했다. 좀 과하게 난리쳤나?.. 라고 반성하고 있는데, 쳇, ?하고 투덜댄 관형이 지옹의 종이를 받아들었다. "그만 쨍알대, 새끼야. 남들이 보면 계집앤 줄 알겠다." "뭐? 계.. 계집애? 야, 너 이만한 계집애 봤어? 키 1미터 75에 이렇게 우람하고 건장한 계집애 봤냐고!!" "우람하긴.. 좇까네.." 피식 하고 빈정대는 그 신랄한 말에 기운 빼고 싶지도 않았다. 단지 자신의 종이를 받아 쥐는 관형의 손을 바라보았다. "뭐야?" "애들한테 시키면 되니까 그만 해. 참 나.. 새끼 졸라 귀찮다니까 암튼.." 하.. 하지만 아무 죄 없는 니 밑의 녀석들만 등골 빠지게 생겼잖아....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마음이 가벼워 진 것은 사실이기에 이내 성큼 성큼 걸어가는 관형의 뒤를 쭈뼛 쭈뼛 따라걸었다. 그러고 보면 자신들의 관계는 비단 오야붕과 꼬붕의 관계가 아닌 듯 했다. 적어도 관형은, 이런 일들을 자신에게 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지옹이 못할만한 일들은 다른 녀석에게 윽박 질러서라도 시키고 마는 것이었다. 조금 흐뭇해져서 걸어가는데, 저 멀리 복도에서 하얀 얼굴의 아름다운 소녀가 이쪽으로 사뿐 사뿐 걸어오고 있는 게 지옹의 시야에 들어왔다. "안녕, 관형아?" "...그래." "그리고.. 너.. 서지옹 맞지?" 자신의 천사에게서 이름이 불리우자, 지옹의 가슴은 두근 반 세근 반.. 아니 터질 것처럼 쾅쾅거리기 시작했다. "어? 어어..." 얼굴이 붉어진 채 고개를 조금 숙이며 천지영의 눈을 피하자, 지영은 하얀 손을 들어 입을 가린 채 조금 웃었다. "있잖아. 혹시.. 이거 네 돈 아니야?" 그리곤 3000원을 쓱 내민다. 깜짝 놀라서 돈과 지영의 얼굴을 번갈아가며 쳐다보자, 지영은 하얗게 웃으며 말했다. "아까 네가 마지막 바퀴 돌 때 떨어지는 것 봤는데, 너무 빨리 뛰어가서 말하지 못했어. 네 돈 맞지?" "..어.. 어.." 말이 나오지 않아 버벅거리며 고개를 끄덕이자, 지영은 3000원을 든 채로 얼른 받으라는 듯 내밀었다. 짜릿 하고 전기가 흐르는 줄 알았다. 지영의 하얗고 맑은 손이 자신의 손과 조금 스치듯 맞닿았다. 덜덜덜 떨리는 손으로 3000원을 자신의 주머니에 집어넣으며, 두근 두근 뛰는 가슴을 부여잡고 있는데, 천지영은 채관형에게 돌아서며 말했다. "너 요즘 또 싸움하고 다니는 거 아니야?" "....아냐." "아니긴.. 너 자꾸 그러면 아줌마한테 이를거야." "...안 싸운대도? 그리고 그 이른다는 말 좀 그만 해. 이젠 귀에 딱지 붙겠다고!!" "그럼 안 싸우면 되잖아, 바보." 혀를 낼름 내밀곤 친구들 있는 쪽으로 사뿐 사뿐 뛰어간다. 머리카락에서 나는 향그러운 샴푸냄새가 아직까지 남아있는 듯 싶어 코를 벌름거렸다. 주머니 속에 넣은 3000원을 계속해서 만지작거리며, 오늘은 죽어도 손을 씻지 않겠다고.. 아니, 언제까지고 영원히 이 맞닿은 손은 씻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이 3000원은 절대 쓰지 않을 것이다. 결의와 희열이 섞인 자신의 얼굴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지도 모른 채 지옹은 멍하니 천지영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니.. 이 얼마나 감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겠는가!! 한참을 그렇게 서 있자, 사라진 천지영과 지옹의 모습을 번갈아 보며 바라보던 관형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야." "...." "야, 서지옹!!" "어.. 엉?" "너, 뭐야?"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관형의 눈을, 차마 마주치지 못해 묘하게 굴려대자, 턱을 잡고는 자신과 눈을 마주치게 한다. "너, 지영이 좋아하냐?" "어?" "좋아하는 구나?" "뭐.. 뭐라는 거야, 이 녀석!!! 떽끼!! 그.. 그런 말도 안.. 지... 지영이는.. 예쁘고, 사랑스럽고, 귀엽고, 깜찍하고.. 에.. 아무튼.. 그런 말도 안 되는.." 우물거리며 자신조차 무슨 말을 하고 있는 지 모를 정도로 얼굴이 빨개져서 중얼거리자, 관형이 쿡 웃는다. "역시 좋아하네." "아.. 아니래도!!" "호오.. 그랬단 말이지? 그걸 여태까지 모르고 있었다니.." 재미있다는 듯 사악한 미소를 짓고 있는 관형이 두려워, 지옹은 속으로 눈물을 삼켜야만 했다. 도대체 앞으로 얼마나 더 험난한 시련을 주려고, 신은 이렇듯 자신을 테스트 하신단 말인가!! ?? "지옹아.. 누가 너 찾는 것 같은데?" 해영이라는 녀석이 다가와 어깨를 톡 치며 말했다. 마침 관형은 자리에 없었다. 점심시간 종이 울리지 마자 밥도 안 먹고 지태네 반에 갔다. 아마도 싸움 구경 간 게 틀림없었다. 평소라면 그런 건 알아서 처리할 거라고 신경도 쓰지 않을 녀석이, 어쩐일인지 조금 서두르는 기색이었다. "점심시간 끝나고 학교 앞 공원으로 오라고 했다니까 뭐.. 일찍 나가야 학주한테 안 걸리지." 라던 관형이었다. 그런데..... 그런데 왜 정작 당사자가 여기 있는 거냐고!!! "너.. 너...." "너 이름 뭔지 몰라서 키 요만하고 갈색 빛 나는 머리에 동글동글하게 생긴 녀석이라고 말했더니 바로 널 불러왔네. 푸하.." "너..." "응?" "너, 왜 여기 있는 거야!!!?" 버럭 소리를 치자, 거구의 그 전학생은 어깨를 으쓱한다. "뭐야, 아까 약속했잖아. 점심시간에 네가 날 안내해 주기로.." "하.. 하지만..." 하지만 너랑 담판 짓는다고 나간 우리학교 일진 녀석들은 뭐냐고. 그 녀석들 화나면 정말 무섭단 말이다. 특히나 채관형과 한지태. 스물스물 한기가 일 정도로 부들부들 떨고 있는데도, 녀석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팔을 턱 하니 잡았다. "가자. 배고프니까.. 뭐부터 먹어야지. 너 점심 먹었냐?" "아.. 아직 급식시간 아니야.. 10분 정도 기다려야 해." "흐음. 급식은 나중에 먹고, 도시락 먹자." "도시락?" "야아.. 굉장하다!!" 휘황찬란하고 거대한 녀석의 도시락을 바라보며 감탄사를 내지르자, 녀석은 머리를 긁적이더니 젓가락을 내밀었다. "먹어." "우와.. 너 이런 것 매일 먹는 거야?" "....뭐... 먹지 않으면 내가 다 먹는다."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재빨리 입 안에 밥과 반찬을 집어넣는 녀석은 굉장한 속도로 먹어치워댔다. 이에 질새라 처음엔 쭈뼛거리던 지옹도 그 환상적인 맛에 저도 몰래 녀석의 속도와 맞춰 도시락을 해치웠다. "배불러." 만족스러운 듯 눈을 가늘게 뜨고서 벽에 기댄 녀석이 배를 툭툭 두드린다. 한적한 옥상은 나른하기 짝이 없었다. "근데.. 너 이름 뭐냐?" "나?" "응." 갑작스레 이름을 질문받은 지옹은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서지옹." "지옹?" "응." "특이한 이름이네." "...그.. 그러는 넌?" "난.." 가만히 눈을 감고 있던 녀석은 지옹을 보며 씩 웃었다. "려태풍." "려태풍?" 굉장한 이름이다.. 싶었다. 눈을 껌뻑거리자, 녀석이 또다시 그 특유의 이상한 웃음소리를 냈다. "뭐, 형들에 비하면 별로지만, 그래도 이름이 좀 그렇지?" "형들?" "응." "형들은 이름이 뭔데?" "좀 웃긴데.." "엥?" 이름 얘기가 나오자 녀석이 조금 망설이며 묘한 웃음을 짓더니, '웃지 마.' 라고 당부하는 것이었다. "괜찮으니까 말해봐." 사실 별로 궁금하지도 않았는데, 이 녀석이 약간 쑥쓰럽다는 기색을 보이자 얼마나 대단한 이름일지 궁금해졌다. "첫째형은 태왕, 둘째형은 태양, 셋째형은 태해, 넷째형은 태산, 다섯째형은 태천, 막내형은 태국" "허억!!??" 자신도 몰래 엄청난 감탄사가 터져나왔다. 그렇다는 건, 즉.. 사내녀석만 일곱이란 말인가? "치.. 칠형제?" "좀 많지? 나도 가끔은 까먹어. 순서를.." 이 녀석 부모님은 어떤 분일지 갑자기 궁금해졌다. 그 많은 사내자식을 줄줄이 낫는 것을 둘째치고라도, 그 이름들, 너무 화려하잖아? 특히나 태양이라던지 태왕이라던지.. 감히 그런 이름을 어떻게 붙인다는 거야. "대단하다." 외동아들인 자신에겐 꿈같은 현실이었다. 자신도 형제가 있길 바랬는데, 그렇게 많이가 아니라 단 하나만이라도.. "부럽다.." 계속 굉장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보자, 태풍은 의아한 시선으로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부럽다고? 부러울 것도 못 돼. 그 녀석들. 얼마나 시끄럽다고. 게다가 그런 녀석들은 있으나 마나야." 형들에게 서슴없이 그 녀석들이라고 말하는 녀석은, 졸립다는 듯 다시금 눈을 스르르 감고 햇살을 맞았다. 아까는 무서워서 감히 쳐다도 못 봤는데, 손가락과 팔이며 다리등이 길쭉길쭉한 것이 굉장히 남자답게 느껴지는 골격이었다. 시멘트 바닥에 놓여진 손등은 남성적인 힘줄이 불거져 있었다. 이 손으로 그 녀석들을 한방에 보내버렸던 것이다. "근데.. 아까 공원으로 나오라는 소리 못 들었어?" "앙?" "아니, 사실.. 우리학교에서 좀 논다는 녀석들이 너한테 학교 앞으로 나오라고 했다면서.. 점심시간 시작되자 마자 우르르 거기 몰려갔거든." "아아, 그거?" 심드렁하게 중얼거린 녀석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기지개를 쫙 펼쳤다. "으으.. 날씨 조오~타!!" "야.. 너 안 가면 죽을지도 몰라." 그 녀석들이 얼마나 악랄한 녀석들인데. 대표적인 예로, 채관형. 그 자식은 복수는 만 배로 갚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뼛속부터가 악랄한 자식이다. "죽긴 왜 죽어." 저 태평한 목소릴 봐라. 옥상 난간에 기대서 멜로디까지 흥얼대는 폼이 즐거운 어린아이의 그것이었다. "하지만..." "날씨가 좋긴 하지만, 역시 서울은 답답해." "에?" "나 간다. 나중에 또 보자. 서지옹." 멍하니 녀석을 보던 지옹은 순식간에 녀석이 계단 쪽을 향해 사라지자, 당황했다. 도대체.. 저 녀석은 무슨 생각 인 거야? 점심시간이 끝나기가 무섭게 교실로 씩씩대며 달려들어 온 관형이 포효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씨발. 그 새끼. 잡히면 죽여버릴거야." 이를 갈 듯 으르렁대는 관형의 말에, 지옹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감히 도망을 쳐?" 5교시 끝나기가 무섭게 1반에 달려갔다 온 모양이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점심시간 때 가방 메고 가버렸다는 허무한 말 뿐이었다. "개자식.. 죽을 줄 알아." 계속해서 욕설을 내뿜는 관형이 무서워, 지옹은 그런 관형의 뒤를 졸졸 쫓아가고 있었다. "도대체, 뭐야. 그 새끼."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닌가보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가볍게 한판하고 오지.. 라는 식의 여유를 부리던 관형이 얼굴이 울그락 붉으락하며 주먹을 꽉 쥐었다 폈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럼.. 난 이만.." 갈림길에 이르러서야, 간신히 나직한 목소리로 관형에게 말했다. 하지만 들리지 않는 지 계속해서 뚜벅뚜벅 걸어간다. 그냥 집으로 가 버릴까 했지만, 내일 만나면 려태풍, 그 녀석 못지 않게 반 죽여버릴 거라고 으르렁댈 관형이 떠올라 조금 더 큰 목소리로 관형을 불렀다. "저.. 저기 난 이만 집에 갈게." 그러자 관형이 걷던 걸음을 뚝 멈춰서고 휙 돌아섰다. "어딜가?" "지.. 집에.." 그럼, 내가 이 시간에 어딜간단 말이냐. 너 같은 날라리도 아닌데.. "오늘 술 좀 마시자." "....뭐.. 뭐어?" 술이라니.. 갑작스레 악몽이 떠올랐다. 술을 못 마시는 건 아니었다. 못 마시는 건 자신이 아니라 이 채관형 자식이었다. 녀석은 술 한동이를 마실 것 같은 얼굴을 하고는, 사실상 맥주 한잔에 맛이 가 버리는 허약한 음주 체질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웬 만해서는 술을 절대 마시지 않는데, 행여 마시고 싶을 땐 꼭 자신을 끌여 들이는 것이었다. 다른 녀석들 앞에선 왕 카리스마 있게 행동하는 주제에, 정작 추한 모습이란 모습은 죄다 이쪽에 쏟아붓는 듯 했다. 한번은 관형과 함께 술을 마시러 갔다가, 테이블에 쓰러진 거구를 집까지 운반하느라 죽을 뻔 한적도 있었다. 우라지게 무거웠던 그 때의 무게가 느껴지자 눈물이 볼을 타고 흐를 듯 했다. 하얗게 질린 지옹의 얼굴을 봤을 텐데도, 관형은 여유롭기까지 했다. "하.. 하지만 난 교복이고.." "우리집에 들려서 갈아입으면 되잖아." "오.. 옷 사이즈가.." "동생 꺼 입고 가면 되지." 태평하게 말하며 반항은 죽음이다라는 분위기를 풍긴 관형이 돌아서서 뚜벅뚜벅 걷기 시작했다. 제.. 젠장할. 네 동생은 계집애잖아!! "싫어. 안 입을 거야!!" "이거 세미 힙합이라서 허리도 넉넉하다고. 입어." "아.. 아무리 그래도 재형이 옷을 어떻게 입어!!" "잘만 입더니, 반항이냐?" 눈썹을 올리며 눈을 부라린다. 관형의 동생 재형은 171의 늘씬한 몸매를 자랑하는 미인이다. 아무리 그래도 허리 사이즈가 맞지 않을 거라고 바락 바락 소리 질러봤지만, 어디서 찾았는지 허리가 넉넉한 옷을 들이민다. 게다가 메탈리카 얼굴이 그려진 무시무시한 흰색 면 티셔츠를 내밀었다. 지는 저렇게 빼 입고.. 시원하고 고급스러워 보이는 회색 빛 여름정장에 목까지 오는 하얀색 차이나 칼라 와이셔츠는 눈이 부실 듯 했다.. (옷만..) 만족스레 머리를 매만지는 관형의 뒷모습을 죽어라 노려보았다. 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휘파람마저 분다. 속에서는 욕설이 아우성쳤지만, 차마 입밖에 내밀지는 못하고 주섬 주섬 갈아입기 시작했다. 눈물이 다 날 지경이었다. "내가 쏜대도 그래. 하여간, 기집애처럼 입 내미는 건 알아줘야 해." 도대체 누가 기집애냐고. 말 끝 마다 기집애 기집애 하는 것도 진절머리가 난다. 속으로 계속해서 궁시렁거리며 옷을 갈아입자, 녀석은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인상을 찌푸린다. "암만 봐도 고삐린데.." 그럼, 내가 대학생이냐? 옷만 후다닥 갈아입으면 직장인으로 변신하는 네 놈이랑은 차원이 다르다고!! "뭐, 환우형 가게니까 상관없나.." 말을 마친 녀석이 거울을 한번 쓱 훑어보더니 머리를 젤로 살짝 매만진 뒤 방을 성큼 성큼 나섰다. 젠장. 이래서 내가 이 녀석과 나오기 싫다는 거야. 사복 차림의 녀석과 지옹은, 학교에서의 갭보다 100배 이상은 차이가 난다.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녀석을 한번 봤다가, 그 다음 지옹을 보고는 갸웃거린다. 도대체 고등학생인지, 대학생인지 구분이 안 간다는 표정이다. 물론, 외모적인 차이에서도 비롯되겠지만. 녀석은 결단코 잘 생긴 얼굴이 아니다. 암만 봐도 지옹에겐 악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훤칠한 키며, 느긋함이 엿보이는 외모에서 이미 점수를 따고 들어가는 것이었다. 녀석과 두 세 번 와 본 중심가의 삐까뻔쩍한 락카페에 와서야 조금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늘 올 때마다 가슴이 철렁 철렁 떨어지는 것 같다. 하지만 여기 사장이 같은 중학교를 나온 선배라서 그런지 웬 만해서는 '도로빠꾸'를 받지 않았다. 특히나 이 녀석과 함께라면 말이다. 차라리 뺀찌라도 맞으면 얼마나 좋아. 도무지 이런 녀석과 술집에 가기 싫다고. 엄연히 미성년자의 권리를, 이 녀석은 무참히 짓밟는 것이었다. 가게 안에 들어서자 시끄러운 음악소리가 귀에서 고동친다. 제기랄 하며 귀를 양 손으로 막고 있는데, 저 쪽에 낯익은 얼굴을 발견하고 말았다. 우오어으~!! 정말 마주치기 싫은 녀석들. "여어.. 관형아. 너 여기 웬 일이냐?" 가운데에는 한지태가 느긋하게 앉아 담배를 물고 있었고, 양 옆으로 학교에서 논다는 녀석들이 술잔을 기울이고 있다가 관형을 보았는지 손을 흔들며 말했다. 역시, 이 녀석들은 사복차림으로 나오면 감히 고교생이라 물을 수 없는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모두들 패셔너블한 정장 차림에, 키도 크고 다들 길쭉길쭉 한지라, 어쩐지 힙합바지에 메탈리카의 얼굴이 그려져 있는 티를 입고 있는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스르르 관형 몰래 몸을 돌리고 도망이라도 치려고 했는데, 어느새 눈치챈 건지, 뒷덜미를 콰악 잡혀버리고 말았다. "어딜 가려고?" "아.. 자.. 잠깐 화장실에..." "가방 내려놓고 가." 험악한 목소리에 기가 죽어 메고 있던 가방을 관형에게 건넸다. 그러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녀석들과 동석을 하는 것이었다. 정말, 운도 지지리 없다. 한지태는 정말 감당하기 힘든 녀석이다. 눈이라도 마주칠라 치면 간담이 서늘해져서 저도 몰래 손이 덜덜덜 떨리는 것이었다. 애써 화장실 안으로 숨다시피 들어가 거울을 보며, 어떻게 하면 이 위기를 탈피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는데 갑작스레 문이 활짝 열렸다. "청소해야 하니까 잠시만 비켜주세요.." 라는 목소리. 어디서 많이 들었다. 휙 고개를 돌리자, 아니나 다를까. 려태풍 그 녀석이 웨이터 복을 입은 채 대걸레로 바닥을 문지르고 있는 게 아닌가. "야, 너.." 깜짝 놀라 검지손가락으로 녀석을 가리키며 소리지르자, 녀석 역시 놀랐는 지 흠칫 하다가 지옹임을 확인하고서야 씨익 웃는 것이었다. "어라, 너 여긴 웬 일이냐?" "그.. 그러는 너야 말로..." "나? 나야 여기서 알바하고 있지." 무사태평한 목소리에 저도 몰래 '아아 그렇구나...' 하고 수긍하다가, 아차 하고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버럭 버럭 소리질렀다. "무.. 무슨 소리야!! 여기 있으면 어떻게 해!! 여기 우리학교 녀석들 있단 말이야!!" "에? 그래? 니 친구들? 그럼 인사나 나눠 볼까?" 어쩌면 이 녀석은 이리도 만사 태평인 것이지? 지옹은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며 다시 입을 열었다. "안돼, 절대 안 된다고!! 점심시간에 널 불러냈던 그 녀석들이란 말이야. 네가 그냥 집으로 가는 바람에, 녀석들 엄청 열받아 있단 말이야. 지금 널 보면 아마 죽이려고 들걸?" "에에, 말도 안 돼. 내가 뭘 잘못했다고 죽이려고 들어?" 이 녀석은 멍청한 건지, 느긋한 건지,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다. "아으윽!! 진짜, 어쩌면 좋아, 어쩌면." 채관형 그 녀석이 자신을 끌 때부터 알아봤다. 이렇게 재수없는 일이 닥치리라는 것을. "아, 맞아! 어.. 어차피 녀석들 중에 네 얼굴 아는 녀석 없을 테니까. 너랑 나랑만 아는 척 안 하면 되는 거 아니야? 그치?" "....왜?" 왜?? 가 아니라고 이 바보 자식아!! 지옹은 얼굴에 주르륵 주르륵 흐르고 있는 식은땀을 팔로 훔치며 다시 입을 열었다. "왜냐하면, 난 싸움따위 구경하는 게 진절머리가 나기 때문이야. 제발 부탁이니 날 모르는 척 해 줘. 응?" "앙?" 완전 동물에게 말하는 수준이다. 녀석은 알아듣지 못하겠다는 듯 물음표가 가득한 얼굴로 지옹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싸울 리 없잖아. 나 이거 오늘 처음 취직한 거라고. 첫날부터 잘리면 안 되잖아. 안 그래?" "그.. 그래, 그러니까.. 그러니까 모르는 척 하자고. 알겠어?" "음.. 무슨 이유인 지는 모르겠지만, 네가 그렇게 간절히 부탁하니까... 알겠어." 제기랄, 이 바보같은 녀석. 누가 간절히 부탁이라는 거야. 이게 다 네 놈 자식을 위해서인데.. "그럼, 나 먼저 나간다. 알았지? 모르는 척. 우린 아는 사이가 아닌 거야.." 몇 번이고 당부를 하고는 재빨리 화장실을 나섰다. 두리번 두리번거리자 저 쪽에 앉은 관형과 지태가 보인다. 사내 녀석들이 한 열 명 정도 앉아 있었다. 그쪽만 어쩐지 암흑의 기운이 서려있는 듯 싶었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곤 뚜벅 뚜벅 녀석들이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화장실에서 똥이라도 싼 거냐?" 다른 때 같으면 더러운 소리 하지 말라고 난리를 피웠을 테지만, 한지태가 자신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다는 걸 알기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조금 숙였다. "그런데.. 이 녀석도 이런 데 다니냐?" 이정렬이 우습다는 듯 관형에게 물었다. 물론 지옹을 가리키며 하는 말이었다. "졸라, 너도 술 마실 줄 아냐? 생긴 건 범생같이 생긴 게.." 볼을 톡톡 치면서 낄낄거렸다. 이미 술을 어느정도 마셨는지, 말할 때마다 술 냄새가 풀풀 난다. 그 역겨운 냄새에 짜증이 났지만, 티도 내지 못한 채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만 해라." 순간, 소름끼치게 차가운 목소리로 관형이 말하자, 정렬이 얼어붙었다. 그리곤 지옹의 볼을 두드리던 손을 재빨리 내리는 것이었다. "너 오늘 시간 없다며?" 여전히 한 손엔 담배를 들고 있는 한지태가 담배 연기를 후우 뱉어내고는 관형에게 물었다. 나른한 눈동자가 관형에게 추궁을 하는 듯 하다. "이 녀석이랑 먼저 약속했으니까." 심드렁하게 고갯짓으로 지옹을 가리키며 관형이 말하자, 그 눈동자가 이쪽을 향한다. 제길, 무섭다고. 우리가 언제 약속따위를 했다는 거냐. "술도 못 마시는 게 서지옹이랑 같이 술 마시러 오다니.." 졸라 영광이다. 저 잘난 한지태가 자신의 이름 따위를 기억하다니.. "누가 못 마신다는 거야?" "한잔 마시면 픽 쓰러지는 게.." "죽을래?" "해보자는 거야?" 음산한 분위기지만, 지옹은 이것이 이 녀석들의 일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심하게 쫄진 않았다. 단지 심장의 압박이 장난이 아니다. 문제의 그 녀석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주문하신 맥주 나왔습니다." 태풍이 손가락에 걸린 500잔 두 개를 내려놓자, 지옹은 죽을 것 같이 뛰어대는 심장 탓에 머리가 윙윙 거렸다. 왜 하필이면 그 많고 많은 웨이터들 중에 이 녀석이 오고 난리냐고. "뭐야? 왜 이렇게 거품이 많아?" 황천수가 맥주잔을 바라보며 소리치자, 빈혈이 올 것만 같았다. "맥주니까요." 느긋하게 웃는 태풍의 얼굴이 너무 해맑아서 눈이 다 부실 지경이다. 분위기 파악 못하는 태풍 탓에, 천수가 주먹을 으스러뜨릴 듯 세게 움켜쥐었다. 그래도 녀석은 싱글 벙글이다. "이 새끼 뭐야? 지금 환우 형 없어?" "누구 말씀이신지.." "니들 사장 말이야!" "아, 사장님은 잠시 외출중이십니다." 어쩌면 저렇게도 경쾌하게 대답하는 건지. 그런 태풍이 만만치 않게 생겨서인지, 천수는 계속해서 시비를 걸었다. "시끄러워, 어차피 니가 마실것도 아니잖아. 쟤네들이 마실건데 니가 왜 지랄이야?" 한지태가 시끄럽다는 듯 소리치자, 그제야 천수의 입이 다물어졌다. "전학생 때문에 천수 신경이 오늘 좀 날카로운 것 같네." 하얀 은테 안경을 낀 차가운 얼굴의 지민우가 잠자코 지켜보다 입을 열었다. 저 녀석은 성적도 장난 아니게 높다는데, 왜 이런 녀석들과 어울리는 지 모르겠다. "씨발.. 그 새끼 얘긴 꺼내지도 마. 아무튼, 내일 만나면 죽여버릴 거니까.." 갑작스레 떠올랐는지, 황천수가 길길이 날뛰며 맥주를 벌컥 벌컥 원샷했다. "감히 우롱을 하다니.." "뭐, 웃기는 녀석인 것은 틀림없어." "전학생이 첫날부터 땡땡이라니.." "경철이 말로는 키도 엄청 크고 무시무시하게 생겼다고 하던데? 근데 그 녀석은 도대체 어디서 전학 온 거야?" "그걸 모른다니까.. 아무튼, 천수. 많이 마시고 내일 열심히 분발해라. 완전히 반 죽여버려." 모두들 전학생 얘기에 불을 태우고 있는데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은 한지태와 채관형, 그리고 전학생 당사자였다. "넌 뭐야? 왜 안가고 남 얘기 엿 듣는 거야?" 한지태가 싸늘한 목소리로 태풍에게 말하자, 태풍은 씨익 웃은 후, "그럼, 부르실 일 있으면 벨 누르세요." 라고 말하며 뒤돌아 섰다. 문제는 돌아서기 직전 지옹을 향해 싱긋 윙크를 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정말 재수없게도 그걸 채관형이 봐 버렸다. "야, 웨이터. 너 이리 와 봐." 여태껏 잠자코 앉아 녀석들의 이야기를 듣기만 하던 관형이, 돌아서던 태풍을 불렀다. "예?" "너, 뭔데 이 녀석한테 윙크하는 거야?" "에? 과.. 관형아, 네가 잘못 봤겠지.. 위.. 윙크는 무슨..." 지옹이 재빨리 나서서 상황을 정리하려고 애쓰자, 관형의 의심의 눈길이 점점 더 짙어졌다. "어쭈? 지금 너 목소리 한 옥타브 올라갔는데? 씨발. 뭐야? 니들 아는 사이야?" "무.. 무슨 소리야? 내.. 내가 왜 웨이터랑.." "그러니까 수상하다는 거잖아, 지금." 분위기는 점점 험악해지고 있었다. 이제는 그 시끄러운 음악소리에도 불구하고 넓은 가게 안에 있는 다른 테이블 손님들까지 이쪽을 흘끔흘끔 쳐다보며 수근거리고 있었다. 순간, 언제 왔는 지 예전부터 이 가게에서 일해서 낯이 익은 웨이터가 중간을 가로막고 섰다. "죄송합니다, 오늘 처음 시작한 녀석이라서.." 고개까지 꾸벅 숙이고 사과를 하자, 관형도 어쩔 수 없는 지, '쳇' 하고 투덜거린 후 맥주잔을 벌컥 벌컥 들이마셨다. 이봐, 너 위험하다고. 그걸 다 원샷하면 어쩌자는 거야? 그때 전화가 왔는 지, 한지태가 핸드폰을 쥐고는 누군가와 대화를 나눴다. "....알았어. 지금 가마." "어? 지태야, 너 어디 가야 돼?" 정렬이 자리에서 일어서는 한지태에게 묻자, 지태는 지민우에게 눈짓을 했다. "어차피 저 녀석은 취해서 못 갈거고, 너는 나랑 어디 좀 가자." 지민우가 안경을 조금 바로 쓴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키 크고 덩치 좋은 두 남자가 일어서자, 이쪽 저쪽에서 모두 그들이 앉은 테이블을 바라보았다. "그럼, 그 녀석 부탁한다 서지옹." 이미 한쪽 팔로 머리를 괴고 있는 채관형을 턱짓으로 가리킨 후, 한지태와 지민우는 가게를 빠져나갔다. 제길!! 관형이 녀석은 기절한 상태나 마찬가지지, 게다가 친하지도 않은 사내녀석, 소위 학교 일진 녀석들 5명이 주위를 둘러싸고 앉아 있지.. 저 멀리서 절대 위험한 려태풍이 룰루랄라 서빙을 하고 있지. 보이지 않는 긴장감이 지옹의 온 몸을 휘감았다. "그 일인가?" "산울 고등학교 녀석들 때문인 거지?" "그 새끼들 요즘 장난 아니게 설친다는데..." "지태가 갔으니까, 금세 해결되겠지." "근데 경철이 녀석은 언제 오는 거야?" 무스로 넘긴 머리를 매만지며, 최영광이 말했다. 술을 마시던 녀석들은 시계를 보더니, "이제 곧 올 때 된 것 같은데.." 라고 중얼거렸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멀리서 낯이 익은 녀석이 헐레 벌떡 뛰어왔다. "미안. 씨발.. 우리 집 아줌마가 잘 때까지 기다리느라.." "하여간, 새끼. 넌 엄마 졸라 무서워 해." "마마보이." 아이들이 키득거리자, 경철의 얼굴이 울그락붉으락한다. 그리곤 재빨리 벨을 누르는 것이었다. "아.. 목말라. 뛰어왔더니, 맥주부터 한잔 원샷해야지. 어라? 그런데 이 녀석은?? 서지옹 아냐?" 자신이 이렇게 유명한 인간인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신기하다는 듯 소리친 경철은 엎드려 자고 있는 관형을 손가락으로 쿡쿡 찔러보더니, "이 녀석은 또 누구야? 벌써 뻗은거야?" 란다. 천수가 "건들지 마. 채관형이다." 라고 말하자, 곧 '히익' 하는 얼굴로 손을 뒤로 숨긴 경철은 침을 꿀꺽 삼키더니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런데 지태랑 민우는?" 급한일이 있어서 간 것 같다고 최영광이 말하자, '아아.. 그래?' 라며 벨을 한번 더 눌렀다. 곧이어 또다시 태풍이 다가왔다. "네?" "맥주 한잔 주세......" 말을 하다 말고 흠칫 얼어붙은 경철의 반응에 모두들 의아한 얼굴로 경철을 바라보았다. '맥주 한잔' 이라고 중얼거리며 계산서에 적은 태풍은 의연한 태도로 다시금 바 쪽으로 되돌아갔다. "야, 너 왜 그래?" "그... 그녀석..." "뭐?" "우리학교 그.. 전학생.. 그 녀석이 틀림없어!!" "뭐라고??" 제길! 죽었다. 이젠. 식은땀이 절절절, 아니 줄줄줄 흐르는데, 황천수가 자리에서 스르르 일어났다. 주먹을 불끈 쥐고 있는 폼이, 아무래도 이 자리에서 태풍을 죽이려나 보다. 지옹은 얼떨결에 황천수의 주먹을 두 손으로 꽉 움켜쥐었다. "저.. 저기..." "뭐야?" 일그러진 얼굴이 섬뜩하기 짝이 없었다. 땀을 삐질 흘리며 관형을 슬쩍 보지만, 상황 파악도 못하는 채관형은 탁자에 머리를 기댄 채 나직한 숨소리를 내며 잠이 들어 있었다. 제.. 제기랄! 도대체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뭐냐고?" 이미 녀석들은 아까 전의 얼빵함도 모두 어디로 갔는지 찾을 수 없을 만큼 무시무시한 얼굴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저기.. 여긴.. 그러니까 환후형네 집이니까.. 그러니까.. 사고치면.. 게다가 술집에서 만약에 잘못 되는 일이 있으면 경찰이..." 닥치는 대로 말을 하며 천수를 달래보려 노력했다. 한참을 중얼대자 그 노력이 먹혔는지, 천수의 움켜쥔 손이 스르르 풀렸다. "그래, 이 녀석 말이 맞아. 여기서 사고 치면 안되지." "맞아, 그랬다간 환후 형한테 죽을지도 몰라." "참아라 천수야." 모두들 곰곰히 생각하다가 결론이 났는 지, -다행히 좋은 쪽으로..- 황천수를 말렸다. 녀석들 모두 얼굴엔 핏대가 섰지만, 그래도 미성년자가 술집에서 난리 치다가 잘못하면 일이 시끄러워 질 수도 있다는 것 정도는 생각할 뇌가 있는가 보다. "그러니까, 저 녀석 퇴근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치자." 헉. 이건 또 무슨 소리래. 지옹은 자신의 귀가 잘못되었길 바랄 정도였다. "그럼, 적당히들 마셔라. 괜히 엄청 마셔댔다가 헛주먹질 하지 말고." 그때까지 조용히 술을 마시던 조일수가 말했다. 그 말에 황천수가 피식댄다. "저런 녀석, 술을 양동이 째 마셔도 한방에 죽일 수 있다고. 그러니까 니들은 안심하고 마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아아, 정말 어쩌면 좋단 말인가. 조바심이 난 지옹은, 어떻게 하면 녀석들의 눈에 띄지 않게 태풍을 화장실로 데려갈 수 있을 지 아무리 생각해보려 했지만, 쉽지가 않았다. 게다가 마침내 녀석이 맥주 한 잔을 들고 왔을 때, 황천수가 려태풍의 팔목을 꽈악 움켜쥐더니, "너, 밤길 조심해라." 라고 말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그 말에 려태풍은 잠시 자신의 손목을 붙잡고 있는 황천수의 손을 내려다보더니, 다른 한 손으로 자신의 팔목에 놓여진 황천수의 손을 잡았다. 척 봐도 엄청 아프겠다. "뭘 조심하라고 하셨죠, 손님?" 황천수의 얼굴이 새빨개 진 듯 했다. 어지간히 아픈 지, 말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거칠게 빼내려 노력했다. 하지만 쉽사리 빠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조용히 술 마시다가 가라, 알긋냐?" 재미있다는 듯 씨익 웃기까지 하는 태풍은 여유로움, 그 자체였지만, 황천수는 그와 정 반대인 지 악소리도 내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잡힌 손과 태풍의 얼굴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결국, 태풍이 그 손을 놓고는 태연하게 바로 돌아갔을 때, 천수는 울그락붉으락 한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개자식, 죽여버릴거야!!" 흥분에 겨워 소리지르는 통에, 주위 사람들이 놀란 시선으로 이쪽을 바라봤다. 그러자 주위 녀석들의 천수의 팔을 붙잡고 말리는 것이었다. "야, 진정해. 기다리라고." 영광이 천수를 진정시키며 말하는데도, 천수의 귀에는 그게 들리지 않나 보다. "씨발.. 개 후레자식 같으니.." "야, 그렇게 아프냐?" 분위기 파악 못하는 정렬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천수를 쳐다보자, 천수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 "죽을래? 씨발아? 아프긴 누가 아프다고 그래?" "하지만 너 거울 좀 봐봐. 얼굴이..." 더 말하려는 걸 경철이 재빨리 입을 막았다. "천수야, 참아. 이따가 죽여놔." 가운데 낀 지옹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관형을 쿡쿡 찔렀지만, 도저히 깨어날 기미가 없다. 아냐, 이 녀석이 깨어나면 주위 녀석들보다 더 할 지도 모른다. 그 생각이 번뜩 난 지옹은 더 이상 깨우기를 포기했다. 고요한 긴장감이 보이지 않게 카페를 휩쌌다. 화장실도 가기 껄끄러울 만큼 긴장된 분위기였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땀마저 흘리며 맥주를 홀짝이던 지옹은 바 뒤에서 사복으로 갈아입고 나온 태풍을 보자 눈이 왕방울만해 졌다. 하늘색 티셔츠에 흰색 야구모자를 눌러 쓴 려태풍은 바에 있는 웨이터에게 인사를 꾸벅했다. "야, 저 새끼 가려나 봐. 옷 갈아입고 나왔어." 정렬이 숨죽은 목소리로 말하자, 황천수가 쓰윽 자리에서 일어났다. "영광아, 계산하고 나와라." 말을 마친 황천수는 성큼 성큼 려태풍의 뒤를 쫓았다. 모두 일어나는 기색이자, 지옹 역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빨리 쫓아가야 하는데.. 태풍과 천수가 사라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자신의 웬수같은 친(..)우(..) 녀석을 노려보았다. 여전히 테이블에 얼굴을 기댄 채 잠이 들어 있었다. 이 새끼는 기절한 것처럼 잠을 자, 씨발. 어쩔 수 없이 지옹은 채관형의 몸을 일으켜 등에 멨다. 그 엄청난 무게에 뼈가 우지끈 소리를 낼 것 같았지만, 그래도 내버려두고 가면 다음 날 사망이다. 힘겹게 한 걸음 한 걸음 나서고 있는데, 녀석들은 이미 저 멀리 으슥한 골목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젖 먹던 힘을 다해 관형을 업고 녀석들이 가는 방향으로 따라갔다. 이미 이마엔 땀이 송글송글 배였다. "...래서 니가 안 나왔다 이거냐?" 한참을 낑낑대며 쫓아가는데, 황천수의 목소리가 모퉁이로 들리자, 지옹은 숨이 멎는 듯 했다. "아, 씨.. 내가 니들 부르면 가야 하냐?" 이 귀찮다는 목소리는 분명 려태풍이다. "어쭈, 이 새끼 말하는 꼬락서니 봐라? 너 뭔가 분위기 파악 안 되는 모양인데.." 다섯 명이 한 명을 감싸고 으르렁대고 있었다. 마치 하이에나들이 사자 한 마리를 두고 싸우는 듯한 느낌이었다. 어두운 골목에 덩그러니 놓여져 있는 가로등 밑, 그 곳에서 녀석들은 위압감을 조성하고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도 없다. 제길. 왜 하필이면 이럴 때마다 주위에 아무도 없는 거야!! 낑낑대며 관형을 들쳐 메고는 자신이 할 일을 생각해 보려 했지만, 뇌가 제대로 돌아가질 않는다. 상대는 우리학교 최고의 일진 녀석들이었다. 키도 모두들 180에 달하는 덩치 좋은 녀석들이, 려태풍 하나를 두고 이를 갈고 있었다. 제 아무리 태풍이 세다고는 해도, -게다가 사실 확인도 한번뿐이었다.- 이 녀석들을 이길 수는 없다. "너 어디서 전학왔냐?" "인천." "인천? 씨발. 촌구석에서 전학 온 게..." "인천이 서울보다는 좋아, 새끼야." 하이에나 같은 녀석들에게 둘러쌓여 있어도, 전혀 기죽지 않는 저 당당함은, 정말 본받을 만 하다. "새끼야? 너 지금 나한테 뭐라 씨부렁댔냐?" 천수가 정장 자켓을 벗었다. 그것을 옆에서 정렬이 받아 쥔다. "니들 물러나 있어. 이 새낀 내가 없앨 테니까..." 아직 주머니에서 손도 빼지 않은 려태풍과 두 주먹 불끈 쥐고 씩씩대는 황천수는 정말이지 대조적이었다. "주머니에 손 안 빼, 이 새끼야!!" 퍼억 하는 소리가 들렸다. 겁이 나서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슬며시 눈을 뜨자, 바닥에 쓰러져 있는 려태풍이 시야에 들어왔다. 가로등 불 밑에 넘어지듯 쓰러져 있는 태풍을 보자 말려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도대체 어떻게? "별것도 아닌 새끼가..." 다가선 황천수가 태풍의 멱살을 쥐고 일으켰다. 그리곤 다시 주먹을 내지르는 것이었다. 또다시 퍼억 소리가 들리더니, 태풍의 얼굴이 돌아갔다. 역시, 황천수 저 녀석은 보통이 아니다. "뒈질래? 당연히 지광고에 전학왔으면 신고식을 해야 할 거 아니야? 그것도 모자라 첫날부터 애들을 패?" 휘익 하고 바람을 가르는 듯한 소리가 공기를 타고 메아리쳤다. 어두운 골목길에서 소름이 돋을만큼 무서운 풍경이 연출되고 있었다. 다른 녀석들은 재미있다는 듯 그런 천수의 모습을 지켜보며 뭔가를 중얼대고 있었다. 그때였다. "야, 다 쳤냐?" 바닥에 쓰러져 천수의 주먹을 맞고 있던 태풍에게서 전혀 동요없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목소리에 놀란 것은 지옹만이 아니었나보다. 천수도 순간적으로 당황했는지, 멱살을 놓고 한발자국 물러섰다. "다 쳤냐고, 씨발.. 아파 죽겠네." 턱을 어루만진 태풍이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서 한 걸음 다가갔다. "짜증나게 시리.. 이런 것도 주먹이라고 쳤냐?" 말을 마친 태풍이, 주머니에서 손을 빼고는 - 그때까지 녀석의 주먹이 주머니속에 있다는 걸 깨닫곤 모두들 얼어붙었다 - 엄청난 속도로 천수의 복부 쪽을 향해 내지르기 시작했다. "이게 바로 진짜 주먹이야, 알아? 앙?" 권투선수의 포즈까지 취하며 녀석의 복부며, 어깨며, 얼굴부분을 내려치는 녀석은 무시무시할 정도였다. 게다가 오른쪽 손은 천수의 멱살을 움켜쥐고 있어서, 움직이는 건 왼쪽 팔 하나였다. "허억!!" 숨조차 쉬지 못한 채 정신없이 내리치는 주먹을 고스란히 받고 있던 황천수가 신음을 내질렀다. 예전에 고등학교 입학하자마자 황천수와 채관형이 싸우는 걸 본적이 있는데, 그때도 이렇게 고스란히 맞고만 있지는 않았었다! 퍼억--!! 결정적인 한방이었는지, 크게 동작을 해서 내지른 태풍의 주먹에 천수가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고 쓰러졌다. 그 모습에 다른 녀석들은 기가 질렸는 지, 바닥에 쓰러진 천수와 태풍을 번갈아가며 쳐다보았다. "처.. 천수야!!" 경철이 달려가 천수를 조금 흔들었지만, 쉽사리 몸조차 일으키지 못했다. 아무래도, 기절한 모양이었다. "씨발.. 너 뭐야, 이 새끼야!!" 다들 그런 천수의 모습에 눈이 돌아간건지, 다짜고짜 녀석에게 덤벼들기 시작했다. 퍼억, 퍽--!! 주먹이 공기 속을 파고드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 맞는 소리가 거세게 울려퍼졌다. 가로등 불빛 아래 검은 형체의 다섯 녀석이 미친 듯 싸우고 있었다. 영광이 태풍의 뒤에서 두 팔을 움켜쥐자, 조일수가 태풍의 얼굴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끔찍한 꼴을 볼 것 같아 눈을 질끈 감으려는데, 순간 태풍이 지렛대의 힘으로 영광에게 힘을 실은 후 두 발로 일수의 복부를 걷어찼다. 마치 영화에서 보던 기술을 현란하게 선보이며 싸우는 태풍은, 이미 인간처럼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다른 녀석들은 이미 힘이 빠진 나머지 지쳐서 헛발길질을 하는데도, 태풍은 여전히 쌩쌩한 몸동작으로 녀석들을 제압해 나갔다. 마지막으로 녀석이 영광의 목덜미 쪽에 긴 다리를 뻗어 발차기를 하자, 영광은 크게 신음을 내지르며 바닥에 쓰러졌다. 손을 탁탁 털고 자신이 입은 옷을 매만진 태풍은 바닥에 쓰러져 있는 녀석들을 향해 소리쳤다. "가만 내버려두면, 이런 일도 없었을 거 아니야!! 씨발.. 아파 죽겠네.." 턱을 어루만지며 자신의 가방을 찾는 듯 두리번거리던 태풍이, 골목 한쪽 음침한 곳에서 모든 것을 지켜본 지웅과 눈이 마주쳤다. "어, 너.." 그때였다. 갑작스런 뒷북이라고, 어디선가 호루라기 소리가 들려왔다. 얼떨결에 반사적으로(..) 지옹은 뛰어가기 시작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뛰고 있는 스스로가 대견하기 짝이 없었다. 물론 무거운 관형을 짊어지고... 태풍도 주춤하더니, 지옹 쪽을 향해 다가왔다. "튀어!" 난데없이 태풍에게 손을 잡힌 지옹은 한쪽 어깨로 미끄러지는 관형 탓에 팔이 빠질 것만 같았다. 있는 힘을 다해 어둠 속을 향해 뛰다가, 순간, 자신도 모르게 관형을 놓쳐버렸다. "어.. 어어...?" 도로 가서 데려와야 하는데.. 태풍은 손을 놔 줄 생각이 없나 보다. 관형이 알면 자신을 죽일 게 틀림없을 정도로 처참하게 바닥에 떨어진 관형은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점점 멀어져 가는 관형을 고개 뒤로 바라보며, 내일 만나면 죽었다.. 라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만약 여기서 경찰한테 걸리기라도 하면 자신은 엄마한테 끝장난다. 벌써 통금시간도 어기고 말았는데... 마음속으로 훌쩍대며 죽어라 어디론가 달렸다. 더 이상 호루라기 소리가 들리지 않을 무렵, 태풍이 천천히 걸음을 멈췄다. 숨이 버거운 지 조금 헐떡인다. 물론, 이까짓 달리기쯤이야 지옹에겐 아무 것도 아니었지만. "헉헉.. 너.. 괜찮냐?" "어? 어어..." 녀석의 말에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위아래로 훑어본 지옹이 대답하자, 태풍은 땀이 나는 듯 팔로 자신의 이마께를 쓰윽 닦아냈다. "더워.. 씨.. 너, 저런 녀석들이랑 진짜 친구 맞아?" 무슨 재수없는 소릴 하고 있는 거냐!!... 라고 소리치려다가, 문득 아까의 그 난투극이 떠오르자, 소심하게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이 녀석, 진짜 괴물이다. 사람 좋은 듯 허허거리길래 방심했지만, 생각해보면 처음 봤을 때도 그렇고, 보통 녀석이 아니었던 것이다. 채관형, 아니 어쩌면 그 악마같은 자식보다도 더 무시무시한 녀석일런지도 모른다. "그런데 왜 그런 녀석들이랑 같이 있는거냐? 앙?" 어쩐지 화가 난 듯한 목소리에 쫄아 버린 지옹은 변명하기에 이르렀다. "그.. 그게 아니라고.. 그 녀석들은 단지.. 관형이 자식 친구들이고.. 나랑은 전혀 상관도 없고.. 에.. 또 나는 그런 녀석들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술집도 관형이 때문에.." 뭐라고 하는 건지 스스로도 어이없었지만, 태풍은 처음보는 험악한 시선으로 자신의 말이 끝날때까지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쫄아서 오줌이라도 쌀 것만 같았다. "헤에... 관형이라는 녀석과 친한 모양이네?" 한참을 쫄아서 텅빈 눈으로 계속해서 변명하던 지옹은 원래 알고 있던 태풍의 태평스러운 목소리를 듣자 눈을 껌뻑했다. "엉?" "관형이라는 놈, 네 옆에 앉아있던 그 녀석이지? 술 먹고 쓰러진 녀석." "엉? 엉..." "그렇구나, 그 녀석이랑 제일 친한거냐?" "...무.. 무슨 소리야!! 그.. 그런 재수없는 소릴!! 우린.. 우린 친구도 아니고.. 그 녀석은 단지..." "...단지 뭐?" ..단지.. 뭐라고 하려고 하는 거냐, 이 멍청한 자식아!! 단지 오야붕이라고? 아니면 대장이라고? 아, 예, 저는 그 녀석의 꼬붕입니다..... 라고 말하려고 했던 거냐, 바보 같은 서지옹아!! "다.. 단지.. 그냥 친구." 가볍게 어눌한 미소를 지으며 마지막으로 '헤헤' 라는 덜떨어진 미소마저 선사하며 마무리지은 지옹은, '아아, 그래?' 라는 심플한 대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아아.. 몸 풀었더니 배고프네. 슬슬 집에 가서 밥을 먹어볼까?" 기지개를 활짝 펼친 태풍이, 한쪽 어깨를 돌리며 말했다. "나는 이쪽인데, 너는?" "아? 나.. 나는 다른 쪽.." 얼떨결에 반대편을 손가락으로 가리켜버렸다. "그래? 그럼 잘 가라. 내일 보자." 손을 살랑 살랑 흔들며 성큼 성큼 사라지는 태풍의 뒷모습을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그리곤 갑자기 울고 싶어졌다. "제.. 제기라알~!! 여기가 도대체 어디냐고!!!" 낯선 곳에 덜렁 떨어진 지옹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소리쳤다. 그러다가 문득 자신의 팔에 있어야 할 가방이 사라진 걸 알고는 또다시 비명을 질렀다. "아아악!!! 내 교오오보오옥!!!!" 미친 듯이 울리는 시계에 잠이 깼다. 무의식적으로 탁 하고 버튼을 누른 후, 조금 뒤척이다 '헉' 하고 신음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6시가 조금 지나 있었다. 다행이다!! 라고 소리치며 재빨리 세수도 하고 머리도 감았다. 평소의 지옹으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을만큼 꼭두새벽에 일어난 것엔 다 이유가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집을 찾아 들어왔긴 했지만, 침대에 얼굴을 묻고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게다가 어제 가방을 잃어버리는 바람에 그 안에 있던 교복마저 잃어버리고 말았다. 일단 교복을 오늘 맞추더라도, 하루동안은 사복이다. 사복을 입고 학교에 갈 순 없지 않은가. 때문에 생각해 낸 것이 아무도 등교하지 않는 새벽에 등교해 체육복으로 갈아입고 있는 것이었다. 어차피 여름이고 교복 셔츠도 흰색에 약간의 줄무늬가 들어가 있는 것이기에 하늘색 반바지에 흰 티셔츠 교복을 입고 있는 게 그다지 티나지도 않을 것이라는 것이 지옹의 생각이었다. 머리를 대충 말리면서, 갑자기 한기가 일었다. 도대체 이 한기의 근원이 무엇인지 몰라 오싹오싹했지만, 이내 고개를 조금 갸웃거리곤 재빨리 집을 뛰어나갔다. 어제 늦게 온 걸로 엄청난 꾸지람을 받았다. 하지만 만약 교복을 잃어버린 걸 만약이라도 알게 된다면 죽음이다. 지옹의 집은 그리 부유한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멀리 경기도에서 작은 출판사를 경영하고 있었지만, 그 출판사라는 것이 말이 출판사지, 인쇄소나 다름없었다. 아버지는 밤새 일한다고 집에 안 들어오기가 다반사였고,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를 위해 매일같이 도시락을 싸고 새 속옷을 챙겨 매일 경기도까지 왔다 갔다 하며 현모양처의 본보기임을 증명하고 계셨다. 때문에 몇 십 만원이나 하는 교복이 결코 적은 값이 아니었던 것이다!! 도대체 이 사실을 어떻게 엄마한테 말을 해야 하나 고민하면서 학교에 다다랐을 때였다. 우욱. 눈물이 나올 것 같이 무시무시하다. 아무리 한 여름이라지만 아직까지 새벽은 캄캄했다. 새벽 안개를 내뿜으며 우뚝 서 있는 학교는 마치 유령(?) 영화에 나올 것만 같은 엄청난 분위기를 뽐내고 있었다. 눈을 딱 감고 운동장을 가로질러서 학교 안으로 들어갔다. 복도부터가 관건이었다. 암흑에 쌓여 있는 복도에 조심스레 형광등 불을 켜고는 자신의 교실을 향해 살금 살금 다가갔다. 3층 복도를 지나 마침내 교실안에 당도하자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재빨리 불을 켜고 재빨리 바지를 갈아입기 시작했다. 갈아입은 옷은 사물함에 두었다. 가방을 잃어버려서 가져온 것은 실내화뿐이었다. 책은 원래 사물함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체육복으로 다 갈아입자 조금 뻘쭘해지고 심심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칠판으로 다가가 낙서를 했다. '채관형 바보새끼' 라고 조금 써 보았다. 아무도 없다. 안전하다. 이번엔 조금 더 크게 심호흡을 하고는 '채관형 븅딱새끼.' 라고 써 보았다. 역시나 아무도 없다. 안전하다. 낄낄대며 채관형에 관한 욕이란 욕은 칠판 가득 빽빽이 써 놓았다. 한번 써 보니 쓸 욕이 어찌나 많은지, 역시나 채관형은 최강이다. 결국, '최관형 나가 디져라!!' 까지 쓰고 나자 한 시간은 흐른 것 같았다. 흐뭇한 마음에 자신이 써 놓은 칠판을 바라보며 벙실벙실 웃고 있는데, 갑작스레 드르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교실 뒷문이 열렸다. 헉 하고 기겁한 지옹이 분필을 손을 부들 부들 떨구며 뒤를 바라보자, 이게 웬 일인가!! 아침 7시가 조금 넘었을 뿐인데 웬수같은 채관형이 머리를 거칠게 쥐어뜯으며 교실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렇게 깔끔한 그 녀석이, 오늘은 어쩐지 약간 폐인 분위기다. 아직까지는 자신을 못 봤는 지 자신의 자리에 털썩 가방을 내려놓는 채관형. 긴장된 분위기였다. 지옹은 감히 움직이지도 못한 채 분필을 들고 부들부들 떨며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서지옹.. 개새끼.." 그 순간 숨이 멎는 듯한 기분이었다. "...만나면 죽여버리겠어.." 하지만 다행히도 말을 마친 녀석은 책상에 몸을 엎드렸다. 아무래도 잠을 자는 포즈였다. 다... 다행이다... 이미 눈가엔 눈물이 맺혀 있을 정도였다. 사슴같이 날렵한 솜씨로 쓱쓱 칠판을 지웠다. 행여 녀석이 뒤척이라도 하면 쫄아서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일단은 다행이라지만, 분명 이 녀석이 깨면 좋을 일이 하나도 없었다. '만나면 죽여버리겠어.' 따위의 무시무시한 말을 던지고, 이 녀석은 어찌도 이렇게 잘 잘수가 있단 말인가. 어제의 그 일을 깜빡하고 있던 지옹은 녀석이 들어오는 동시에 기억하고 말았다. 교복 때문에 정신이 없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아침의 한기는 이 녀석 탓인가 보다. 재빨리 칠판을 모두 닦고 나서 관형의 옆에 슬그머니 다가가 앉았다. 멀뚱멀뚱 숨조차 제대로 내쉬지 못하고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아이들이 하나 둘 씩 들어올 때 마다 녀석이 깰까봐 깜짝 깜짝 놀랐다. 놀라고 당황한 것은 지옹뿐이 아니었다. 지각을 간신히 면하는 채관형이나, 일찍 등교한다는 것과는 저언혀 거리가 먼 서지옹이 나란히 아무도 없는 빈 교실에 턱하니 앉아있던 것이었다. 잠든 채관형은 둘째 치고라도 멀뚱멀뚱 앉아 있는 서지옹은 어쩐지 가여운 분위기마저 흘러나왔다. 안절부절못하며 아이들이 들어 올 때마다 검지 손가락을 치켜들고 입술에 가져가며, '쉬이..(화장실의 그게 아니다)' 따위를 제스처하는 지옹은, 확실히 안타까운 그것이었다. 쉬이--를 하도 많이 해서 피곤하고 졸리다. 게다가 이 꼭두새벽에 일어났다. 평소의 지옹으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었다. 자면 안되는데, 몸이 서서히 굽어지면서 한쪽 뺨이 딱딱한 나무 책상에 가서 엉겨 붙었다. 자기 좋으라고 의자는 제일 낮은 것과 책상은 가장 높은 걸 갖다놓은 최상의 수면환경이 자신을 유혹했던 것이었다. 분명 말하지만, 지옹은 성적이 중간이다.(뭐가 자랑이라고.) 눈이 스르르 감겼다가 안 된다는 의지가 불쑥 밀고 들어와 번쩍 떠 졌다가,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다시 스르르 감겼다가 또다시 번쩍 떠졌다가, ........그리곤 기억이 없다. "...발, 이 새끼 봐라." "...zzz" "야, 이 씹어먹을 자식아!! 안 일어나!!??" 어디선가 욕설이 들려오고, 그 욕설의 주인공이 낯익은 목소리라는 것에 지옹은 눈을 번쩍 떴다. 아이들이 겁에 질린 눈으로 이쪽을 쳐다보며 찍소리도 못하고 있었다. "뭘 봐, 새끼들아. 하던 일 안 해?" 관형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하던 일 따위가 있을 리 만무한 아이들이 주섬 주섬 교과서를 보는 척 칠판을 닦는 척 난리도 아니다. "너, 이 개새끼.. 너 때문에 내가 얼마나 좇 됐는 지 알아?" 알아.. 안다구.. 감히 일어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책상에 여전히 눌린 뺨을 댄 채 눈만 동글동글 굴리던 지옹은 벌벌 떨면서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씹.. 내가.. 썅..." 주먹을 부르르 움켜쥐고는 지옹이 여전히 뺨을 대고 있는 책상을 쾅 하고 쳤다. 그 반동에 움찔한 지옹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곤 천천히 한 걸음씩 뒷걸음질 쳤다. "너.. 이.. 썅.." 위협적인 동작으로 한걸음씩 다가오는 관형 탓에 소름이 오도도독 돋아버렸다. 누가 제발 나 좀 구해줘. 라고 주위를 돌아봐도, 눈이 돌아버린 관형을 말릴 수 있는 녀석이 있을 리 만무하다. 섬뜩한 숨을 쉬익 쉬익 내 뿜으며 관형이 한 발자국씩 다가왔다. "너... 씨발.. 아침에 눈떴는데 바로 코앞에 차가 씽씽 달리는 기분, 알아?" 켁. 그.. 그런 일이.... 가만히 생각해 보니, 어제 그 녀석을 내던진(..) 곳이 차도 옆이었다. "인생 다 산 줄 알아." 저 핵주먹에 한방 맞으면 인생 진짜 조진다. 그 생각이 번쩍 들자 지옹은 덥썩 자리에 주저 앉아 관형의 두 다리를 움켜쥐었다. "미안.. 나도 그러려던 게 아닌데.. 그 때 상황이... 흑흑..." "상황? 무슨 상황?" 다리를 움켜쥐고 있는 지옹을 떨구려는 듯 거세게 발로 찬다. 쿵 하고 바닥에 넘어지자 녀석이 눈이 커졌다. "씨발.. 병신자식. 힘도 졸라 없는 게 어딜 움켜쥐어!!" 머리를 제대로 박아서 눈물을 찔끔 흘리며 머리를 감싸쥐자, 녀석이 다가와 소리쳤다. 지가.. 지가 차 놓곤.. 이 엿 같은 녀석... 사실 조금 아팠다. 하지만 녀석의 반응에 졸라 오바하기 시작했다. "악!! 아파.. 아파 죽겠네..." 그렇다. 이것이 지옹의 인생관을 반영하는 예라고 할 수도 있다... 오바하면서 뒹굴자, 관형은 지옹을 번쩍 안아들었다. 역시, 이 녀석한테 개기면 안 된다. 키 차이도 5-6 센티 밖에 안 나는데, 이 몸을 이렇게 번쩍 안는 걸 보면. "씨발, 교련 오면 양호실 갔다고 해." 아.. 이.. 이게 아닌데.. 공중에 붕 떠서 멍하니 생각했다. 근데 교련? 목요일 1교시는 화학인데.. 교련이 아니라... 교련은.... 교련은....2교시!! 허억!! 내가 1교시 끝날 때 까지 잤단 말이야?? "반성문!!!!" 발버둥치며 소리지르자, 자신을 안고 힘차게 달리던 관형이 우뚝 멈춰섰다. 그리곤 기묘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바닥에 쿵 떨궜다. 이번엔 진짜 아팠다. "뭐.. 뭐야!!" "너. 지금 나 갖고 놀았냐?" "허억." "이게 이젠 꾀병까지 부려?" 그.. 그게 아닌데.. "호오~ 어차피 내가 아니더라도 넌 죽었어, 새끼야. 반성문 다 썼냐?" 건들거리는 그 목소리에 한기가 확 일었다. 역시, 이 새끼는 악마다. "그.. 그건 니가.." "몰라, 너 알지? 내 인생 모토. 복수는 만배로 갚는다. 난 아까 9시 정각에 가서 반성문 내고 왔지." 뭐엇!!?? 크큭거리는 악마같은 웃음소리에도 혼이 나간 것 같은 멍한 기분이었다. 이 나쁜 자식. 어제 내가 왜 교복까지 잃어버리며 그 지랄을 치게 된 건데. 다 니 자식이 싫다는 나를 억지로 끌고가서 그런 거잖아!!! 하지만 입안에 맴도는 메아리일 뿐이었다. "씨발.. 내가 진짜 저 새끼 때문에 미쳐. 미치고 말지." 결국 영어 선생한테 가서 죽도록 맞았다. 변명을 하는데도, 들어줄 생각을 안 한다. 반성문은 20장으로 늘어났다. 이걸 오늘 학교 끝날 때 까지 다 마무리 지어야 한다. 때문에 점심시간 내내 미친 듯이 손을 굴리고 있는 것이었다. 배고파 죽겠는데... 씨이... 텅 빈 교실에 앉아 미친 듯이 반성문을 쓰고 있는데, 교실 문 앞에 똑똑거리더니 어찌보면 원흉이라고 볼 수도 있는 녀석이 씩 웃으며 들어왔다. "뭐해? 밥 안 먹고?" "...." 어제 날 미아로 만들어버린 데다가, 채관형을 내팽개치고 도망치도록 유도한 녀석이었다. 하지만 녀석이 커다란 도시락 통을 들고 달랑거리자, 차마 소리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어제 그 싸움이 꿈이 아니었다는 걸 알았을 때부터 녀석에 대한 경외심 비스무리한 것이 마음속에 파고들었다. 문제는 이녀석이 왜 자신에게 이렇게 잘해주느냐는 것이다. 전학 와서 아는 녀석들 없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녀석과 지옹의 반 사이는 굉장히 멀었고, 이런 스스로의 입으로 말하긴 뭐하지만.. 자신같이 비굴하고 소심한 녀석들은 1반에도 깔리고 깔렸다. 하지만 어느새 발걸음은 태풍의 뒤를 졸래졸래 따라 걷고 있었다. 옥상에 털썩 주저앉아 도시락 뚜껑을 열자 자신도 모르게 군침이 돈다. "와아.. 괴.. 굉장하다." 오색반찬이 가지런하게 담겨 있는 태풍의 도시락 반찬들은 정말 진심으로 먹음직하게 생겼다. 게다가 밥이 들어있을 뚜껑을 열자 한가득 김밥이 빛을 내며 담겨있는 게 아닌가. "기.. 김밥!" "에. 김밥이네." 어딘가 모르게 심드렁한 목소리다. "왜? 김밥이 얼마나 맛있는데.." 이미 개가 된 포즈로 헥헥 거리자, 녀석은 심드렁하게.. "시금치가 들어있잖아. 젠장.. 이란다. 이 커다란 덩치의 녀석이 뽀빠이가 좋아하는 시금치!!를 설마 편식한다는 건가. 어쩐지 조금 귀여워져서 김밥 하나를 입안에 집어넣었다. "와.. 진짜 맛있다. *우동에서 파는 김밥같아. 너도 먹어봐. 진짜 진짜 맛있는데?" 하나를 집어 녀석 입가에 가져가자 녀석은 잠시 김밥을 노려보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안으로 가져갔다. "맛있지?" "....." 표정은 일그러졌지만, 그래도 씹고 있다. 어쩐지 밝은 햇살과 시원한 바람. 김밥 도시락까지.. 마치 소풍을 나온 듯한 기분이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우울하고 참담하기 짝이 없었는데, 이렇듯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비록 덩치는 크고 싸울 땐 기가 막히게 무섭긴 하지만 평소엔 조금 좋게 봐 주면 귀엽기까지 한 녀석과 함께 있자 기분이 조금 풀렸다. "근데.. 너.. 도대체 어떻게 하면 그렇게 잘 싸우냐?" 문득 녀석에게 생각하던 걸 소리내어 말해놓고는 아차했다. 하지만 녀석은 별로 신경을 안 쓰는 표정으로, '뭐.. 그냥.." 이란다. "그냥?" "형들이 워낙 많잖아. 어렸을 땐 맨날 맞고 살았지. 지금도 다 모이면 내가 가장 약해. 그래도 태천이 형한테는 한두번 이기곤 하지만.." "아아.." 어쩐지 멋진 사내형제들의 세상인 듯 해서 입을 헤 벌리고 있자, 녀석이 조금 피식 웃었다. "재미있는 녀석. 그런 건 왜 물어?" "아니.. 그냥..." "형들 때문만은 아니야. 우리집은 원래 그렇게 다 세야만 해." "아아, 그래?" ..라지만 도대체 왜 집안이 다 세야만 하는 지 알 리가 없다. 멍청히 대답한 후 녀석을 보다가, 결국 궁금해했던 것을 물었다. "그런데 말이야. 넌 왜 나랑 같이 밥 먹는 거냐?" "앙?" 우물우물 단무지를 씹다가 녀석이 '뭐?' 라는 시선으로 이쪽을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너희 반 애들도 있을 텐데, 왜 하필이면.." "..넌 재미있으니까." "뭐?" 재미있긴 뭐가 재미있냐. 그러고보니 어제도 이 녀석이 이런 말을 했더랬지. '쨈 있는 녀석' 이었길 바랬던 그 때가 떠오르자 조금 웃음이 나왔다. "내가 재미있어?" "응. 그리고..." 잠시 말을 멈춘 녀석이 하늘쪽을 바라보았다. 지옹도 녀석의 시선을 따라 하늘에 시선을 돌렸다. 맑은 하늘에 두리뭉실한 구름 몇 개가 떠 있었다. 참으로 화창한 날씨가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닮았어..." 도대체 뭐가 닮았다는 건지, 알 리가 없는 지옹이었지만, 고독한 모습으로 하늘을 보고 있는 태풍의 뒷모습 뒤에 서서 그저 멍하니 덩달아 하늘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음.. 밥도 먹었으니, 슬슬 교실로 돌아가 볼까?" "응." 붕붕 어깨를 휘두르며 계단을 내려가는 태풍의 뒤를 졸졸 쫓으며, 역시 이 녀석 덩치가 장난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굉장한다.. 이 녀석. 근육하며.. 굵고 길쭉길쭉한 뼈하며.. 아무렇게나 들쑥날쑥하게 자란 머리카락이 그 나름대로 녀석의 분위기(..)에 동화되어 있었다. "조심해. 멍하니 서 있다가 코뼈 부러진다." ...하필이면 코뼈냐. 섬뜩하게 시리.. 자신이 잠시 정신을 놓고 계단을 내려가는 사이, 하마터면 발목이 삐끗할 뻔한 걸 태풍이 두 팔을 꼭 잡아주어 살았다. 역시.. 이 녀석은 채관형 그 싸가지없는 새끼랑은 차원이 틀리다. 새삼 존경스러운 마음에 눈을 글썽이며 녀석을 올려다보자, 녀석은 지옹의 얼굴을 보더니 씨익 웃으며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쓱쓱 쓰다듬어주었다. "바보. 조심해라." "....조심해야 할 건 이게 아닐까, 서 지 옹" 이름 석글자를 딱딱 끊어서 부르는, 언제 들어도 정겹...긴커녕 정 떨어지는 이 목소리는.. 켁. 채관형? 허거걱 놀라 아래를 내려다보자 채관형이 계단 바로 아래에 험상궂은 포즈로 서서 이쪽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너.. 감쪽같이 날 놀렸겠다. 이 새끼, 서지옹. 너 어제 이 녀석이 그 전학생인 거 알고 있으면서도 입 꾹 다물었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어도, 믿어줄 리 없다. 그 특유의 신랄한 미소를 지으며, 녀석이 한 계단 한 계단 올라왔다. "게다가 날 바닥에 내팽개치고 가 버린 게 이 녀석 탓이었겠다?" 아니라고, 계속해서 고개를 붕붕 젓는데도, 채관형의 미소가 점점 더 일그러졌다. "아니야? 그럼 어제 황천수네가 그토록 맞은 건 누구한테서야? 응? 말해봐 서지옹." 그.. 그게 말이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한발자국 물러나려 해도 태풍이 여전히 자신의 두 팔을 움켜쥐고 있는 상태다. 핫, 하고 소리지르기도 전에 관형이 그것을 본 듯했다. 다소곳하게 태풍의 두 팔에 안겨있는 자신의 두 팔을, 채관형은 이마에 핏대까지 드리세우며 노려보았다. "뭐. 하냐, 지금." "아.. 이건 아무것도 아니고.. 사실 나는 그냥.." "너 죽었어." "그.. 그게 아니래도..." 미친 듯이 머리를 휘젓는데도 씨발, 이유를 모르겠다. 자신이 왜 사내자식에게 두 팔이 붙들린 것에 대해 변명하고 있는지.. "니가 관형이냐?" 멀뚱히 이 사태를 옆에서 지켜보던 태풍이 입을 열었다. "....그래." 이빨 으드득 가는 소리가 들릴 것 같은 대답이었다. "지옹이의 '단지 그냥 친구' 인 채관형. 맞지?" 이.. 이 자식이 무슨 소리래. 그건... 문득 어제 태풍에게 그런 식으로 변명했던 자신이 떠올라 입을 꾹 다물었다. 눈치가 빠른 관형이 그 속내를 파악 못할 리 없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관형의 시선이 재빨리 지옹에게 내리 꽂혔다. 설명할 수 있으면 설명해 보라는 시선이다. 내가 뭘 어쨌다고 다들 난린게야!!!! "호오.. 너, 그딴 식으로 말했단 말이지? 엉?" "그게... 그게 아니라.." "너는 나중에 보겠고, 너. 전학생 이름이 뭐야?" "나? 려태풍." 자신은 그 이름을 듣자마자 깜짝 놀랬었는데, 관형은 동요조차 하지 않는다. 오직 눈썹을 약간 치켜세우더니, "그래? 따라 나와. 네가 우리 학교 녀석들 건든 것만도 벌써 9명째야.. 알아?" 라고 나직하게 말했다. 태풍은 잠시 관형을 바라보더니, "과연 그거 때문이야?" 라고 내뱉었다. 그 말에 그 때까지 냉정한 얼굴로 태풍을 바라보던 관형의 얼굴이 조금 움찔했다. "뭐?" "그것 때문이라면 상관없겠지만..."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이 새끼가.." 도대체 얘네가 뭔말 하는 지 모르겠다. 위기와 긴장의 분위기가 계단을 휩쌌다. 오죽하면 지나가던 다른 학생들이 쫄아서 도로 다른 계단을 이용하려는 듯 사라지는 것이었다. "야, 니들 지금 뭐하는 거야?" 저 멀리서 한 선생이 그런 태풍과 관형, 지옹을 봤는지 다가오면서 삿대질을 하며 말했다. "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저희는 그냥 이런 저런 이야기를.." 재빨리 지옹이 나서서 선생님께 변명을 하자, 미심쩍다는 얼굴로 관형과 태풍을 번갈아가며 바라보았다. 이내 선생도 이 두 사람의 덩치에 쫄았는지, 타겟을 지옹으로 잡고 소리쳤다. "넌 교복 어딨어?" "저.. 전..." 당황해서 눈알을 굴리는데, 관형이 여전히 태풍을 노려보면서 조용히 말했다. "다음 시간이 체육시간입니다.." 그 말 한마디에 선생은 '그래? 그럼 어서 가서 다음 시간 준비 해.' 라더니 어디론가 사라졌다. "학교 끝나고 교실에서 기다리고 있어." 관형이 태풍의 어깨를 의미심장하게 툭 치며 지옹의 팔을 거칠게 빼내며 말했다. 관형이 하도 세게 손목을 움켜쥐어서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차마 놓으라는 말도 못하겠다. 질질질 끌려가듯 관형에게 잡혀가며 마음속으로만 비명이란 비명은 모두 내질렀다. "씨발.. 진짜 개새끼. 너 때문에 내가 미쳐버려." 도대체 뭐 때문에 이렇게 길길이 날뛰는 지 알 수가 없다. "젠장, 진짜.. 뭐가 이렇게 골치아픈 거야." 지옹이 자리에 앉자 마자 뭔가를 툭 책상위에 올려놓는다. 헉. 이건.. 내 교복이다!! "이.. 이거 어디서?" "젠장.. 니가 니 책가방 내 팔에 꿰어놓고 달아났잖아." 덕분에 그 촌스러운 가방 들고 집까지 갔다 왔다고.. 라고 중얼거린 관형은 수북히 쌓인 종이를 또다시 지옹의 책상위에 올려놓았다. "이.. 이건..." "반성문이다. 갖다 내." 태어나서 이 자식이 이렇게 이뻐보이긴 또 처음이다. 감격의 눈망울로 녀석을 올려다보자, 녀석은 그 커다란 손으로 지옹의 눈가를 툭 가렸다. "미친 놈. 그 이상 야리꾸리한 눈깔 안 치워? 대신 조건이 있어. 너 이거 받고 싶음 앞으로 저 태풍인지 폭풍인지랑 다니면 죽어. 알겠어?" 하.. 하지만 그건. "대답 안 해?" 망설이며 대답을 못하고 있자, 눈가를 가리고 있던 손이 떼어지면서 어느새 무시무시한 핵주먹으로 바뀐다. 미친 듯이 고개를 세로로 끄덕인 건 딱 2초후의 일이었다. "어제 지태랑 민우가 완전 박살났어." 학급회의 시간에 아이들이 조용 조용 관형의 눈치를 보며 의견을 건의하고 있는데, 점심시간 끝나고부터 심각한 표정으로 엎드려있던 관형이, 역시나 엎드려 있는 지옹을 보며 말했다. 이렇게 엎드려서 눈 마주치는 것도 참... 공포가 아닐 수 없다. "뭐? 지태랑.. 민우가?" 그 녀석들이 박살났다니, 박살났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이지? 설마 누군가에게 당했다는 건가? 그 괴물들이? "어제 누군가가 산울 녀석들한테 우리학교 녀석들이 당하고 있다는 전화를 받고 나갔는데, 그게 완전 함정이었대. 30명도 넘는 녀석들이 각목 같은 걸 들고는 모여 있었다니.. 또라이 같은 새끼들.. 그런 거 보면 잽싸 튀어야지, 그걸 일일이 다 상대하겠다고 덤비다니.. 지들이 슈퍼맨이야?" "헉, 그래서?" "그래서는 무슨 그래서야. 지금 그 두 녀석, 학교도 못 나오고 집에서 요양중이란다. 소문엔 전체 8주라는 얘기도 있고... 나도 아직 안 만나봐서 몰라. 오늘 가 봐야지. 하여간 한지태 그 새끼는 빙신 새끼야." 서.. 서른명도 넘는 녀석들.. 컥. 자신이라면 그런 녀석들이 서 있는 반경 100미터 내에도 안 들어간다. 그런데 그런 사실을 알고도 싸웠다니.. 한지태, 그 자식 정말 평범한 녀석은 아니다. "덕분에 씨발, 지광고 한지태를 산울 같은 양아치 새끼들이 쓰러뜨렸다는 게 소문이 쫘악 나 버렸어. 산울 녀석들이 나대는 건 둘째치고, 여태껏 우리한테 깨진 다른 녀석들도 모두 산울 밑에 들어가려는 조짐이 벌써부터 일고 있다고.." "자.. 장난 아니다.." "아무튼 산울 새끼들 죽여버리긴 해야 하는데.. 문제는 그 새끼들이 절대로 떨어져서 다니는 일이 없다는 거야. 매일 30명씩 우르르 몰려다닌다니.. 그 새끼들 좀 또라이들 아냐?" "...그렇네.." "게다가 어젯밤도 아무도 없는 곳에 일부러 한지태와 지민우를 불러들였던 거야. 30명이 두 명 쳤다는 게 소문이라도 날까봐 말이지." 그 말을 듣고 나니까 소름이 쫙 돋았다. 고등학생 녀석들 중에 그런 사악한 놈들이 있었다니. 물론 채관형도 사악한 놈으로 치자면 둘째가기가 서럽다는 녀석이지만,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조금 몸을 으슬으슬 떨자, 관형이 피식 웃으며 한 손을 들어 지옹의 머리를 쓱쓱 비볐다. 역시나.. 한쪽 뺨을 책상위에 대고 두 눈을 마주보고 있다는 것 자체가 공포다. "쫄긴, 새끼." "아.. 안 쫄았어." "그래? 오줌싸진 말고.." 키킥 거리더니, 곧이어 눈을 스르르 감는다. 녀석, 속눈썹이 완전 계집애다. 사실 저번에도 말했다 시피, 녀석은 잘생긴 얼굴이 아니다. 결코!! 지옹에겐 그냥.. 그냥 악마같은 얼굴일 뿐이었다. 하지만 간혹 이렇게 아무런 말을 하지 않은 채 잠을 잔다거나, 생각에 잠겨 있을 땐 좀 봐줄 만 하다. 짙은 눈썹하며, 속 쌍꺼풀이 새겨진 조금 길고 진한 눈. 반들반들 쭉 뻗은 콧날하며 비틀릴 때를 제외하고는 한번 만져보고 싶다고 생각이 들 만한 부드러운 입술. 도대체 이런 녀석은 왜 여자친구가 없는걸까. 당근 지랄같은 성격 탓이지. ?(-_-) ㅗ 아아, 납득하고는 지옹도 눈을 스르르 감았다. 꿈에서 태풍이 엄청나게 큰 문어를 도시락으로 싸왔다. 뚜껑을 열자 도시락 속에서 문어가 튀어 나왔는데 살아있는 것이었다. 태풍이 힘겹게 칼을 뽑아들고 문어를 썰기 위해 애를 써 봐도 문어의 힘이 장난이 아니다. 이리저리 꿈틀 꿈틀하며 태풍을 향해 먹물을 쏟아부었다. -안돼애애!! 하고 외치는데, 문어가 그 말을 들었는 지 맨들 맨들한 머리를 그 수많은 다리 중 하나로 쓰다듬으며 곧장 이쪽을 향해 걸어 온다. 그리곤 점점 그 형태가 변하더니, 무시무시한 채관형으로 바뀌는 것이었다. 허억.. 하고 숨을 멈춘 채 채관형을 바라보자, 채관형은 특유의 신들린....이 아닌 신랄한 미소를 지으며 주먹을 꿈틀거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교문 앞에서 싸움났다!!!! 에? 번쩍 눈을 뜨자 남아서 청소하던 애들이 운동장 쪽을 향해 다닥다닥 붙으며 소리치는 것이었다. "채관형이랑, 산울 학교 애들인데?" "한지태는 어딜 간 거야?" "걔 오늘 학교 빠졌대. 어제 산울 애들한테 깨졌다는데?" "설마, 말도 안 돼. 그 한지태가?? 그 녀석 무패잖아." "근데 저 녀석들 간도 크다. 선생 나오려면 어쩌려고..." 이미 수업은 끝나 있었다. 옆을 보자, 관형의 책가방은 남아있는 상태다. 자신도 머뭇머뭇 창가쪽으로 달려가자, 과연 채관형과 산울 녀석들이 우르르 몰려와 교문에 서 있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우리학교 아이들이 빙 둘러싸고 그들을 가리고 있었기 때문에 제대로 보이지가 않았다. 재빨리 쪼르르르 교문쪽으로 달려갔다. "그래서, 지금 니들이 날 치겠다는 거냐?" "소문 들었을 텐데? 한지태 그 녀석은 이미 우리한테 무릎을 꿇었단 말씀이지." 그 말에 관형이 피식거렸다. 같잖다는 듯한 미소다. "그래서, 혼자 남은 채관형을 눕히는 건 식은 죽 먹기라 생각했던 거냐?" 한지태도 왕창 깨졌다는 그 말에 완전히 쫄아 있던 지옹은 관형을 말려보려 했지만, 지옹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관형은 예의 그 눈빛으로, '끼어들면 죽을 줄 알아' 광선을 내뿜었다. 어쩔 수 없이 한쪽 구석탱이어 서서 그들의 싸움을 넋놓고 구경하게 생겼다. "니들이 잘 몰라서 그러나본데..." 관형이 한쪽 손가락으로 턱 근처를 어루만지며 중얼거렸다. "30대 2로 싸우는건." 순식간에 그 중 가장 덩치가 큰 녀석에게 발을 날렸다. 덩치가 퍽 하는 소리로 맞자, 단말마의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에 쓰러졌다. 하지만 관형은 자비심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 볼 수 없는 동작으로 덩치의 허벅지를 자신의 긴 다리로 내리찍었다. "아악!!!" "...아무나 다 해, 알아?" 그 모습을 본 산울 녀석들이 당황했는 지 얼어있는 틈을 타서, 다른 녀석의 멱살을 붙잡곤 재빨리 바닥에 내던졌다. 합기도며 유도며 쿵푸를 배웠다더니.. 진짠가 보다. 중학교 시절 도복은 들고 다니면서 맨날 땡땡이만 치기에 말 뿐인 줄 알았었는데... 쿠웅 소리가 나면서 그 녀석이 교문 옆 시멘트에 내리 꽂히자 억소리도 지르기 힘든 지 넘어진 채 낑낑댔다. 지켜보는 같은 학교 학생들이 '와아...' 하는 감탄의 비명을 질렀다. "한지태 그 녀석은 말이야.." 이번엔 조금 세 보이는 녀석에게 다가가 발을 내뻗었다. 녀석이 재빨리 몸을 피하자 그 순간을 노렸다는 듯 왼 팔로 녀석의 어깨 관절을 사납게 붙잡고는 오른쪽 주먹으로 붙잡힌 어깨 관절을 집요하게 연달아 때리는 것이었다. 녀석이 비명을 지르고, 질러서 기절할 지경이 되어도, 관형은 놓아줄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 몸께서 유일하게 인정하는 녀석이란 말이다." 지태를 생각해서 눈이 돌아버린 건지, 그 때부터 관형은 폭주모드였다. 많은 학생들 앞이라 차마 한꺼번에는 덤비지 못하겠는지 주춤 주춤 하는 사이에 한명 씩 한명 씩 차례로 쓰러뜨리기 시작했다. 어째서 주먹으로 때렸는데 피가 나는 거지.. 라고 생각하면서도, 앞으로 다시는 관형에게 깝죽대지 말아야겠다고 재차 다짐하는 지옹이었다. "덤벼, 왜, 더 할 생각 없어?" 역시 관형도 인간인지라 지칠만도 한데, 녀석은 숨을 가쁘게 내쉬면서도 한쪽 손으로 까딱까딱 거리며 덤빌 녀석 있으면 덤비라는 포즈를 취했다. 남은 것이라곤 겨우 몇 명. 그것도 굉장히 약해 보이는 녀석들. "거기, 뭐야?" 저 쪽 운동장에서 호루라기까지 불며 미친 듯이 뛰어오는 선생들이 보이자, 지옹은 움찔했다. 하지만 여전히 살기가 감도는 눈으로 녀석들을 노려보며 한걸음씩 다가가는 관형에게는 들리지 않나 보다. 지옹은 눈 딱 감고 재빨리 관형에게 달려들었다. 관형이 무의식적으로 주먹을 들어 쳐 내려다, 그것이 지옹인 걸 알고는 눈이 서서히 커졌다. "야, 튀어. 선생들 온단 말이야." 애원조의 목소리로 말하자, 그제야 사태를 파악했는지, 재빨리 지옹의 손을 끌고는 튀기 시작했다. 평소엔 그렇게도 느릿느릿 한게, 튈 때만은 지옹보다 100배 1000배 빠르다. 바람처럼 달려가는 녀석 탓인지, 달리는 것 하나만은 자신 있는 지옹 역시 숨이 가빠와 헉헉댔다. 교실 안에 들어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거울을 보며 흐트러진 머리며 흘러내린 땀을 정리한 관형을 새삼 존경심과 두려움 섞인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데, 문이 벌컥 열리더니 학주가 으르렁거리며 들어왔다. "아까, 운동장에서 다른 학교 녀석들이랑 싸움한 자식 나와." 눈은 이미 관형에게 가 있지만, 심증은 있되, 물증이 없던 지 눈을 희번덕대며 말했다. "아, 운동장에서 누가 싸움했나요?" 어째서 이 녀석은 이런 연기파 배우인 거지? 느긋한 목소리로 가방을 주섬주섬 싸는 관형은 자신과는 전혀 무관하다는 듯 심드렁하게 말했다. "니들, 도대체 지금 이 시간까지 왜 남아있는 건데?" 여전히 의심을 버리지 못하고 학주가 말하자, 관형은 빙긋 웃어보이며 - 젠장, 빛이 날 지경이었다 - 까지 말했다. "바보같이 종례 시간에 졸아버렸지 뭐예요. 지옹이가 짝꿍인데, 지옹이도 잠이 들어서.. 깨어나보니 아무도 없더라구요." 정말 환장하겠다. 저 녀석이 '바보 같이' 라던지 '짝꿍' 이라던지.. 의 소녀들이 쓰는 듯한 말투를 쓰다니.. 완벽한 이중인격자다. 속이 뒤집어 질 것 같다. 봉다리가 필요하다. "아.. 빨리 나가. 그리고 앞으로 종례시간에 졸면 나한테 맞는다. 어찌 된 것들이.." 뭐라고 중얼중얼 거리며 사라지는데 철렁 내려갔던 심장을 다시 끌어올리느라 지옹은 여전히 굳어있었다. "빨리 일어 나. 씨발.. 뒤졌어." 교실문이 드르륵 닫히자마자 관형의 얼굴이 180도 바뀌어버렸다. 여전히 살기 섞인 그 얼굴로 성큼 성큼 교실문을 나서는 관형의 뒤를 졸졸 쫓으며 더듬더듬 중얼거렸다. "저.. 이제 그만 집에 가자..또 싸울려고? 하.. 하지만 이미 싸움은 끝났다고. 완전히 니가 이긴거야.." 그 말에 뚜벅 뚜벅 앞서가던 관형의 발걸음이 뚝 멈춰버렸다. 그리곤 험악한 인상으로 뒤를 돌아서서 지옹을 노려보는 것이었다. "어쭈구리? 지금 보호하는 거냐?" "뭐.. 뭐얼!!" 내가 산울 같은 녀석들을 왜 보호해, 이 빙딱같은 새끼야.. 단지 나는 너랑 같이 또 있다가 어떤 무시무시한 일을 당할 지 몰라서... "그렇단 말이지? 겨우 안 지 이틀됐는데 그 새끼를 감싸고 돈다, 이거냐?" "무.. 무슨..." 그러다가 아까 점심시간 끝나기 직전 관형이 태풍에게 했던 말이 떠올라 입을 다물었다. 맞다. 녀석들, 방과후에 한판 붙기로 했지? "그래, 그 새끼 어디가 그렇게 좋은데? 그렇게 잘 싸워? 엉?" "무슨 소리야.. 내가 언제.." "왜, 나랑 그 새끼랑 붙어서 그 새끼가 이기면 그 새끼한테 달라붙으려고? 네 녀석 하는 생각 뻔하지.. 씨발.." 갑자기 복도 중앙에 있던 분필털이를 발로 거세게 내리쳤다. 콰당 하는 소리와 함께 분필털이가 쓰러졌는데도 성이 안 치는 지 벽을 무지막지하게 차는 것이었다. 제.. 제길... 학교 무너지겠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야, 너.. 도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너...." 관형을 말리기 위해 뒤에서 관형의 가슴께를 두 팔로 붙들곤 제지하려 하자, 그때까지 발로 벽을 차던 관형이 멈칫 섰다. 휴우.. 다행이다.. 싶어서 손을 쓱 빼내며 식은땀을 닦았다. 그리곤 속으론 신음하며 태풍네 반쪽으로 걸어갔다. "내가 왜 그 녀석한테 달라붙어.. 친구가 달라붙고 안 달라 붙고가 어딨냐? ?너는 너고, 그 녀석은 그 녀석이라고.. 사람이 사람 사귀는데..." 계속 중얼중얼 녀석에게 변명하며 걷고 있는데, 뭔가 조금 이상해서 휙 뒤를 돌아보자, 저 멀리 분필털이 옆에서 돌이 되어 버린 관형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헉. 또 내가 뭘 잘못한 걸까? 어쩐지 다가가기가 겁이 나 멍청히 서서 관형 쪽을 바라보자, 관형이 슬그머니 오른손을 들더니 손바닥으로 자신의 심장 께를 어루만졌다. 자신이 두 팔로 붙들었던 그 부분이다. 저거.. 지금 열 받아서 그러는 거 맞지? 마치 넋이 나간 것 처럼 계속해서 가슴을 어루만지는 녀석 탓이, 점점 공포가 배가되기 시작되었다. 분명 저건 황당해서 말도 안 나온다는 뜻!! 조금 있으면 포효하며 자신에게 달려들 녀석을 떠올리자, 심장에 대한 압박이 장난이 아니다. 두근 두근 두근.. 녀석이 천천히 시선을 들어 자신의 손바닥을 바라보다가 지옹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스르륵 시선을 피한다. 주먹마저 불끈 움켜 쥔 게, 지금 갈등하는 건가? 날 패야 할 지, 아님 그냥 참아야 할 지... 이도저도 못하고 선 자세에서 돌이 되어 버린 지옹은 땀을 뻘뻘 흘리며 관형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조금의 움직임이라도 있다면 뒤도 안 돌아보고 튈 생각이었다. 아무도 없는 복도에 관형과 지옹 둘이 대략 10미터정도의 빈 공간을 사이에 두고 고요히 바라보고 있었다. "가... 가자, 싸우러!!" 오른쪽 주먹까지 움켜쥐며 태풍이 녀석을 상기시켜도 녀석은 멍청히 저 멀리 서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미안하다, 려태풍. 내가 살려면 널 희생시킬 수 밖에 없단다. 미워하려면 내가 아닌, 우리의 짧고도 얄팍한 우정을 미워해다오. 속으로는 태풍에게 용서를 빌며, 관형을 재촉해도, 관형은 한 발자국도 움직일 생각을 안 한다. 그거 한번 만진 것 같고 진짜... 너무하네.. 라고 생각하면서도 얼굴은 억지 웃음이 피어난다. "과.. 관형아?" 땀이 주르륵 등을 타고 흐르는 듯 했다. 조금 더 크게, '채관형!!' 하고 소리치자, 그제야 정신이 들었는 지 움찔하며 몸을 움직였다. "앞으로..." 앞으로 척척 걸어가면서 녀석이 입을 열었다. "응?" "앞으로.. 날 함부로 만지지 마." 등을 보이며 재빨리 걸어갔기에, 녀석의 얼굴을 볼 수 없었으나, 지옹은 속으론 계속해서 째째하고 소심한 채관형이라고 욕을 하고 있었다. 그거 만진다고 닳냐? 누가 만지고 싶어 만졌냐? 니가 씨발 성요리나 전지연이면 또 몰라. 하여간.. 유별난 새끼라니까. 투덜 투덜 대며 1반 앞에 다다르자, 관형이 벌컥 문을 드르륵... .....열려고 했다... 그렇지만 웬 걸. 문은 굳게 잠겨있었다. "뭐야? 씨발.. 왜 문이 안 열려?" 욕설을 내뱉으며 앞문 쪽으로 가 보아도 문이 열릴 리 만무하다. 려태풍. 너 진짜 존경스럽다. "아.. 씨발.. 이 개새끼.. 또 튄거야???" 어쩌냐, 려태풍. 이번엔 채관형, 정말 열 받았다. "진짜야, 오늘은 금방 가봐야 한단 말이야. 어젯밤에도 새벽에 들어가서 엄마한테 죽을 뻔 했단 말이야." 관형에게 애걸 복걸해 보아도, 놓아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태풍이랑 내일 싸우면 안 돼? 엉? 내일 싸워라. 어차피 내일 학교에서도 보잖아." 애원조로 말하자, 성큼 성큼 걸어가던 관형이 척 멈춰섰다. 찌릿 하는 눈동자에 소름이 돋겠다. 학교를 나선 후부터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지옹의 뒷덜미를 움켜쥔 채 어디론가 걷기만 했다. 이 녀석과 길을 나선다는 건 분명 무슨 일이 벌어진다는 증거다. 때문에 엄마 핑계를 대며 애원을 해보았지만, 돌아오는 건 이렇듯 무섭게 노려보고 있는 관형의 두 섬뜩한 눈동자였다. "야." "어? 어어... 그.. 그냥 가지.. 뭐.. 어.. 어차피 시간도 좀 있고..." 없는 손목시계를 있는 척 들여다보며 하하 웃자, 녀석이 입을 다물었다. 그리곤 다시 척척 걸어가는 것이었다. "병신. 려태풍인지 뭔지 하는 녀석은 내일 본다. 오늘은 한지태 만나러 가는 거야." "뭐? 하.. 한지태?" 상대가 한지태라면 더더욱 싫다. 아아. 그 녀석의 시선을 받아내기가 두렵다. 하지만 눈물을 머금고 관형의 뒤를 쫓는 수 밖에 없었다. 으리으리한 병원 앞에 다다라서도, '미.. 미안한데 난 아무래도 집에...' 라고 뒷걸음질 쳐 봤지만, 예리한 관형이 그것을 내버려 둘 리 없었다. 지그시 노려보는 눈동자에 얼어붙어, 결국 관형을 따라 병원안에 들어가고 말았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한참을 올라갔다. 땡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자, 관형은 뒤도 보지 않고 성큼 성큼 앞장섰다. 병실 앞에 도착하자, 녀석은 문을 드르륵 열었다. 한쪽 침대에 얼굴에 온통 붕대를 칭칭 말고 있어 형체도 알아보기 힘든 것은, 분명 한지태, 그 녀석이었다. 숨을 허억 들이마시곤 겁먹은 눈동자로 관형을 올려다보는데도, 녀석은 미동 없이 쓰윽 훑었다. "어.. 어떡하냐. 완전히..." "여어, 왔냐?" ...병신 다 됐네... 라고 말하려는데, 뒤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휙 돌리자 한 손엔 하드바를 들고 다른 한 손으로 여유롭게, '여어..' 라고 내뱉는 한지태가 있었다. 뭐야, 저 침대에 누워있는 건 누구야? 깜짝 놀란 지옹이 지태와, 지태 뒤에 서 있는 민우를 번갈아 가며 보자, 한지태도 지옹을 알아챘는지 조금 표정이 굳어졌다. 멀쩡하잖아? "자알 한다. 고작 산울 새끼들한테 얻어맞아서 입원까지 하냐?" "뭐, 이 참에 학교도 빠지고.. 좋지." 빈정거리는 관형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침대에 털썩 앉으며 아이스크림을 할짝인다. "근데... 너 빈손으로 왔냐?" "뭘 바래? 이 새끼야. 오늘 네 복수를 갚아줬으니 그걸로 만족해." "복수?" 관형이 한지태가 앉은 침대위에 가방을 내려놓으며 털썩 주저앉았다. "오늘, 산울 새끼들이 찾아왔던데. 아마도 너랑 민우녀석이 없으니까 이 참에 지광고를 장악해버리자는 심사였던 것 같은데..." "그래서?" "쳇, 이 몸이 누구시냐? 누구처럼 약한 녀석이 아니라고.." 우쭐하며 말하는 관형을 바라보는 한지태의 입술이 일그러졌다. "그거, 내 얘기냐?" "그럼 누구얘기?" "진짜.. 씨발.. 이 새끼, 너 왜 온 거야?" 어째 이 녀석들은 만나기만 하면 이 난리인지. 멀찍이 뒤에 서서 그들의 대화를 엿듣던 지옹은 채관형 새끼는 역시나 주먹만 약했으면 왕따 였을 놈이라고 다시 한번 생각했다. "너 혼자 상대했냐?" "씨발.. 우르르 몰려왔는데 아무도 없어서 황당했다. 그거 알아? 어제 영광이랑 일수, 천수 새끼들이 전학생한테 당한 거." "뭐?" 이번엔 정말 놀란건지, 아이스크림을 먹다 말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당했다고.. 5명 몽땅. 경철이랑 정렬이 녀석도.. 너 가고 나서 그 녀석들이 전학생을 치려다가 되려 당한 것 같더군." "넌 뭐 했어, 그때?" 어이없다는 얼굴로 묻자, 관형이 슬쩍 시선을 피하며 가볍게 말을 돌린다. "아무튼.. 그 새끼 존나 웃기는 새끼야. 남으라고 했더니 또 튀었더라고.." "꼴았었지?" "..." "이 새끼는 술만 마시면 꼴아버리는 게 왜 마시는 지 몰라. 어떻게 된게, 술 너 댓 말은 마시게 생긴 게 한잔에 끝나냐? 쪽팔리지도 않냐?" "씨발.. 닥쳐." "저 서지옹도 너보단 잘 마시지?" 왜 갑작스레 날 끌어들이고 난리냐고. 한지태의 손가락이 문가에 서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던 지옹에게 가리켜지자, 지옹은 웃어야 할 지 말아야 할 지 몰라 어정쩡한 얼굴로 얼어붙었다. "그.. 무슨 상관인데!!??" "아무튼.. 졸라 골 때리는 새끼야, 너도." 그때까지 말없이 옆에 앉아 열심히 하드를 핥던 지민우가 배를 잡고 큭큭거렸다. 여기 저기서 놀림을 당하자, 채관형의 얼굴이 울그락붉으락 해졌다. "니들.." "아무튼.. 산울 녀석들은 내가 알아서 하려고 했는데 네가 이미 처리했다니, 마무리 짓는 일만 남았겠네. 그런데 그거 아냐? 문제는 산울 새끼들이 아니야." 여태껏 키득거리던 분위기가 점점 심각해졌다. 지민우도 다 먹은 하드스틱을 버린 후 얌전히 앉아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 "야, 서지옹 내보내." 중요한 말인지 내보내라는 지태의 말에 민우가 일어서자, 관형이 그걸 말린다. "저 녀석 퍼뜨릴 데도 없다." 그래, 씨발. 나 왕따다. 내가 왜 왕따가 됐는데!!! "그래도 이런 얘기 새는 거 안 좋다." "괜찮다니까." 약간 짜증스럽다는 듯한 관형의 태도에, 지태는 잠시 생각에 잠긴 얼굴로 지옹을 바라보더니, "너. 어디가서 주둥이 나불거리면 그땐 제아무리 관형이 새끼가 보호한다고 해도 죽여버릴 줄 알아." 라고 소리쳤다. 이.. 이봐. 나 차라리 나갈래... 내보내줘!! 관형이 녀석이 날 보호한다고? 소문 나면 저 새끼가 가장 먼저 날 죽일걸? 으슬대는 몸을 부여잡고 밖으로 나가려고 했지만, 관형의 시선이 놓아주질 않는다. 결국 고개를 미친 듯이 끄덕이며 문 가에 바싹 붙어있었다. "산울 대가리 김창섭 있지. 그 새끼가 전일 중학교 나왔거든." "근데?" "그런데 말이야. 그 전일 중학교 대가리가 강민구였어." 갑자기 병실이 조용해졌다. 강민구라면.. 3년 전에 버스 안에서 고교생을 칼로 찔러 소년원에 들어간 그 녀석? 아침 뉴스를 보다가 낯익은 주변 중학교 교복이 나온 것에 놀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단지 째려본다는 이유로 다짜고짜 달려들어 칼로 찔렀던 그 악마 같은 중학생. 그 뒤로 소년원에 들어가 버려서 녀석의 소문을 들을 수 없었지만, 주위 학교 녀석들이라면 그 사건을 모르는 녀석이 없었다. "강민구... 그 녀석 혹시.." "맞아. 소년원을 나왔어. 아직 보호기간이긴 하지만, 그 녀석 뒤에서 애들을 조종하고 있는 것 같더군. 갑자기 허접한 산울에서 감히 이쪽을 치려고 마음먹은 것 자체가 이상하잖아." "...일단 우리학교부터 치고 나면 강남 쪽 고등학교를 제패하겠다?" "그렇지. 그 뒤로는 보나마나 서울 전체를 노리겠지. 현재로서는 강북 녀석들이랑 우리 쪽이 서로 터치 안 하겠다고 약속을 했었지만, 만약 상대가 강민구라면 틀려지지. 그 비열한 자식이 무슨 방법으로 나대고 싶어 할 지 안 봐도 비디오 아냐?" "어쩐지.. 그 새끼들.. 그렇게 함부로 우리한테 덤빌 놈들이 아니었는데.. 뭔가 믿는 게 있다 싶었어." "아직까지는 잠잠한데, 만약 보호 기간이 끝난다면..." 한지태가 말을 끊자, 채관형은 뭔가 생각에 잠긴 눈으로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치러 오겠군." "그 새끼는 비열하기로는 손꼽힐 정도야. 조심해야해." 얘기를 듣고 있던 지옹은 자신도 모르게 손바닥으로 문을 꽉 움켜쥐었다. 엄청난 얘기였다. 자신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이야기들이 녀석들 사이에서 오고가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튼 위험하게 되었어. 그 전학생도 손을 봐 줘야 하긴 하겠지만, 웬만하면 나중으로 미뤄라. 지금 내분에 신경쓸 틈이 없어. 그럴 린 없겠지만, 만약 어제같이 타이밍 나빠서 깨진다면..." 한지태의 목소리가 점점 낮아졌다. "알지? 어떻게 될 지. 우리가 누군가에게 박살났다는 얘기가 들리는 날엔 여태껏 싸워왔던 것도 다 헛수고란 말이야. 우릴 치고 싶어서 난리 치는 녀석들이 한둘이 아니야. 특히, 너 채관형. 넌 혼자 다니기로 유명하기 때문에 더더욱 위험해." 조용 조용 내뱉는 한지태의 말이 너무 소름돋아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언제 어디서 칼이 날라올 지도 모른다는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심장이 얼어붙은 자신과는 반대로, 관형은 여유롭기까지 했다. "걱정마. 내가 너냐?" 라고 빈정거리기까지 하자, 이번엔 한지태의 얼굴이 벌겋게 변한다. "죽을래?" "알았어, 알았다고. 아무튼.. 병원 살만 하냐?" "몰라. 별 괴물같은 의사 놈 하나만 빼면..." "의사?"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문이 덜컥 열리더니 하얀 가운을 입은 덩치 큰 사내가 저벅 저벅 들어왔다. 문 옆에 달라붙어 있던 지옹은 깜짝 놀라 바닥에 툭 쓰러졌다. "어라? 이 녀석. 조심해야지." 낮고 두툼한 목소리로 사내가 말을 하며 손을 내밀었다. 지옹이 가뿐히 자리에서 일으켜지자 여태껏 태연히 대화를 나누던 한지태와 지민우가 앓는 시늉을 하며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저 녀석들이 저런 모습을 다 보이다니! 깜짝 놀라는 와중에도, 남자는 지옹을 탁탁 털어주더니 한지태의 침대 쪽으로 다시 뚜벅뚜벅 걸어갔다. "여어, 개구쟁이. 자는 시늉해도 소용없어." 약간 재미있다는 듯 낮게 웃는 사내의 목소리는 매력적인 허스키 보이스였다. "시.. 싫다고!!" "주사 맞기 싫다고 생떼 써 봤자 소용없다니까.. 약속하지 않았어? 팔씨름에서 이기면 얌전히 치료받겠다고.." 아기 같은 한지태라니. 주사가 맞기 싫어 저렇게 침대에 파고들었다고? 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채관형을 제외한 몇몇 친구들을 제외하고는 감정을 보이지 않기로 소문난 그 한지태가 어린애처럼 소리질렀다는 것이었다. ".....젠장!! 믿을 수 없어. 다시 해!! 이 돌팔이 의사야!!" "돌팔이라니.. 그런 심한 말 하면 안 되지. 네 도전은 언제든지 받아 줄 테니까 걱정은 하지 말고 이따가 간호사 오면 얌전히 주사 맞아. 한번만 더 매점으로 도망치면 그땐 혼난다." 굵은 팔을 걷어붙이곤 으름장을 놓는 사내의 두 팔은, 도무지 의사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근육이 울퉁불퉁하다. 잔뜩 토라져 있는 게 눈에 보일 정도인 한지태에게 씨익 웃으며 뭔가를 내미는데, 풍선껌이었다. "자, 씹으라고.." "필요없어!!" 미친 듯이 발버둥쳐도, 거구의 의사 앞에서는 마치 어린애 같은 몸짓이었다. 그 의사가 손바닥을 들어 한지태의 붉게 탈색한 머리카락을 쓱쓱 쓰다듬자, 한지태는 입을 내밀며 도리질했다. 하지만 결국 알루미늄 껍질이 벗겨진 풍선껌이 한지태의 입안으로 들어갔다. 그것을 지켜보며 놀란 것은 지옹 뿐만이 아닌 듯 했다. "어째서.. 저렇게 머저리 같은 꼬락서니지?" 문을 탁 하고 닫고 걸어나오면서 관형이 중얼거렸다. "그.. 그러게..." 놀랍다는 듯 멍하니 말하는 지옹은, 어쩐지 저 의사. 얼굴은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태풍과 굉장히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머리를 쓱쓱 쓰다듬는 것 하며, '그래, 그래..' 식의 느긋한 말투하며. 병원 문을 나설 때까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관형이 자리에서 딱 멈춰 서더니 지옹을 불렀다. "서지옹." "...엉?" 난데없이 이름이 불린 지옹은 역시나 자리에서 멈춰선 채 관형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전에 없이 진지한 얼굴이다. 마치 무언가 결심이라도 한 듯한 굳은 결의가 엿보이는 얼굴에 긴장한 지옹은 침을 꿀꺽 삼켰다. "먼저 가라." "엉?" "집에 가라고." "에?" 평소 같으면 지네 집에 들렸다 가라며 이것저것 꼬셨을 녀석이 별 말 없이 집에 가란다. 분명 뭔가 수상한 것이 있다. 원래 인간이 안 하던 짓하면 뭔가 있는 게 분명하다. "가라고, 빨리 가. 해 지기 전에." 다른 때 같으면 에헤라 좋다.. 라고 달려갔을 지옹이었지만, 어쩐지 수상치않은 기운에 발걸음이 떨어지질 않았다. 심상치 않은 표정을 지켜보던 지옹이 조금 고개를 도리 저으며.. "야, 무슨 일이야? 뭐.. 뭔데 그렇게.." 라고 중얼거리자, 채관형은 그런 지옹을 계속 쳐다보다가 휙 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터벅터벅 사라지는 관형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지옹은, 어쩐지 의아한 기분이 들어 쫓아가려다가 멈칫했다. 왠지 따라가면 녀석이 무섭게 화낼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 집에 와서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있는데 엄마가 문을 두드렸다. "어. 잠깐만." 재빨리 티셔츠를 목에 끼워넣고는 문을 열자, 약간 굳어버린 엄마의 얼굴이 보인다. "에? 왜.. 왜요?" "너... 엄마랑 얘기 좀 하자. 도대체 어젯밤에 왜 그렇게 늦게 들어온 거야?" 그.. 그 얘기라면 새벽에 끝났잖아... "그게.. 내가.. 음.." "너, 눈 굴리지 말고 엄마 똑바로 보고 말해." 시선을 강요하는 엄마의 두 눈에는 기필코 이야기를 듣고 말겠다는 의지가 빛나고 있었다. 거짓말을 할 때면 어김없이 눈을 굴리는 지옹은 저도 모르게 계속 시선을 피하며, '뭐.. 뭘..' 하고 중얼거렸다. "그 밤늦게 어디갔다 왔냐고 물었잖아!!" "그.. 그게.. 관형이네서.." "내가 관형이 집에 전화해 봤었는데, 없다고 했어. 거짓말 할 생각하지 말고 바른대로 말하란 말이야." 단단히 화가 나셨는지 허리께에 한 손을 짚은 채 다른 한 손으로 삿대질까지 하며 앙칼지게 물었다. "어제... 그냥 관형이랑...." "너 거짓말하면 맞는다. 관형이같이 착실한 애가 그 늦게까지 어디서 뭐하고 놀아. 관형이네 엄마가 그러던데, 관형인 독서실 갔다고." 헉. 그 새끼가 착실해? 어머니, 착실이라는 단어에 대한 오해가 있으시군요. 게다가 독서실이라니. 그런 기막히는 소릴 하다니.. "그... 그게..." "네가 같이 독서실 갈 리가 없잖니. 관형이 핑계대지 말고 바른대로 말하지 못해?" 돌아뿌리겠다. 완전 내가 '착실한 관형' 이를 핑계로 나쁜 짓을 하고 돌아다니는 것처럼 몰아세우는 엄마라니. 어째서 아들을 이다지도 못 믿으시는 걸까. 게다가 나도 가끔씩은 독서실 다닌다고요! 이건 사실대로 말하더라도 혼나고, 거짓을 하더라도 표정에 나타나기 때문에 문제다. "사실은..." 결국 왜곡된 사실을 말하기로 했다. "어제 태풍이라고.. 우리 학교에 전학생이 있는데.. 걔가 전학와서 첫 친구가 되어줘서 고맙다고 한턱 쐈거든.. 그래서.. 그래서 어제 걔랑 같이 있다가.." 더듬 더듬 입을 열었다. 완전 거짓말은 아니기에, 눈, 심하게 안 흔들렸다. "...그랬어?" "엉. 진짜예요."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자, 의심이 가득한 얼굴이 점점 조금씩 풀어진다. "그런데 그 밤늦게까지 뭐하고 놀아!! 갈 데가 어디 있다고." "그.. 그게.. 그냥 걔가 집이 좀 어려워서 아르바이트하거든..." 어디서 한다고 하지? "그.. 그러니까, 편의점! 편의점에서.. 24시간 편의점 있잖아.." "편의점?" "네! 걔한테 얻어먹고 일 하는 첫날이라고 해서 조금 같이 있어줬어. 그러다가 집에 온 거야." "그..래?" 좋았어! 이젠 거의 믿은 듯 하다. "그런데 학생이 아르바이트해도 되는 거야?" "....아..." 이런. "어...쩔 수 없잖아. 집이 어려워서..." 사실은 호프집에서 한다고 하면 난리 나겠군. "그래. 그럼 언제 한번 데려와. 나이도 어린데 그 새벽까지 일하는 게 대견하네...." 휴우 하고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응." "근데..." 또 뭐? 엄마의 잔소리는 멈출 생각을 하지 않는다. "관형이 핑계는 왜 댔어? 왜 툭하면 멀쩡히 있는 관형이 핑계를 대고 그래? 응? 너 앞으로 한번만 더 관형이 핑계대고 뒤에서 딴 짓 하면 혼날 줄 알아. 알았어? 정말.. 관형이 엄마한테 민망해서 못살겠다니까." 진짜... 울고 싶었다. 채관형 그 녀석에게 붙들려 저주받은 인생임을 부르짖은 것도 어언 3년째 반 째.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이 만남을 '저주받은' 이라는 형용사를 붙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었다. 녀석을 처음 만난 건 4년하고도 6개월 남짓 전인 중학교에 막 입학했을 때였다. 그때부터 악명 높은 이름이었던 채관형은 지금보다 조금 작고 조금은 소년의 티를 벗지 못했었지만, 가는 곳마다 소문을 몰고 다녔다. 그 녀석에게 덤볐다가 살아남은 녀석이 없을 정도라는 무시무시한 이야기가 학교에 쫘악 퍼져있었다. 무패의 기록을 자랑하는 녀석의 험난한 싸움 이야기는 전설과도 같았다. 학교에서 녀석을 모르는 녀석이 없을 정도였다. 지옹은 4년 전 까지만 해도 키가 160도 안 될 정도로 조그마한 녀석이었다. 게다가 인생 모토는 18년째 그대로였기에, 그 때 역시 소심했고, 비굴하기 짝이 없었다. 여리 여리하고 툭하면 픽픽 쓰러지고 잘 하는 거라고는 달리기 하나 밖에 없던 (이건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던 것이었다!) 지옹이 애들에게 괴롭힘을 당했던 것은 뻔한 과거였다. 학교에서 잘 나가지도 못하지만 지옹보다는 센 양아치 녀석들이 툭하면 돈을 빼앗고, 집까지 가방을 들고 가라고 내던지기도 하고, 점심시간이면 도시락을 빼앗기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 날도 녀석들의 뒤를 졸졸 쫓으며 가방 네 다섯 개를 낑낑거리며 짊어지고 가던 지옹이 바닥에 툭 하고 쓰러졌다. 도대체 공부도 지지리 못하는 것들이 왜 가방은 이토록 무거운 걸까.. 라며 까진 무릎을 호호거리고 있을 때, 녀석들이 앞서 가다가 뒤를 돌아보고는 그런 지옹에게 성큼 성큼 다가와 소리질렀다. "야, 이 빙구 새끼 봐라. 일어나, 이 자식아. 어차피 꾀 부려봤자 이거 다 니가 들고 가야 해." 누군가 발로 툭툭 까진 무릎을 걷어차는데, 그게 어찌나 아픈 지 눈물이 다 나올것만 같았다. 재빨리 온 몸으로 무릎을 움켜쥐며 고개를 미친 듯이 끄덕이는데, "뭐하냐, 니들?" 라고 누군가가 채 변성기도 가시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 지옹 뒤를 우두커니 바라보며 하얗게 질린 양아치 녀석들이 이상해 눈물을 글썽이며 뒤를 돌아보자, 그 곳엔 중학생치고는 굉장히 키가 큰 녀석이 한쪽 가방을 어깨에 메고는 비스듬히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너, 지금 이지메냐?" 에?... 라는 얼굴로 녀석을 바라보자, 녀석이 나지막하게 양아치녀석들을 노려보았다. "니들, 지금 얘 이지메하는 거지?" 어쩐지 불량스러운 그 목소리에 지옹마저 흠칫했었다. "아.. 아니.. 우리는 그냥..." 지옹을 굉장히 괴롭히던 나명호라는 녀석은 뒷걸음질까지 치며 더듬었다. "그럼 이 가방들은 다 뭐야, 엉?" 발로 쌓여있는 가방을 짓밟으며 나직하게 으르렁대자, 모두들 겁에 질려 어쩔 줄 몰라하는 얼굴이었다. 이.. 이봐, 그.. 그건 내 가방이라고.... 하필이면 그 많은 가방 중 왜 진짜 내 가방을.... 차마 녀석을 말리지도 못한 채 멍하니 주저앉아 바라보자, 녀석이 긴 다리를 뻗어 한 녀석을 죽어라 패기 시작했다. 굉장한 스피드였다. 즐겨보던 드래곤볼에 나오는 베지타가 자주 쓰는 펀치였다. 놀란 얼굴로 녀석의 일방적인 구타를 바라보던 지옹은 저도 모르게 엉덩이를 주저 앉은 채 뒷걸음질 쳤다. 그리곤 옆에 우뚝 서 있는 전봇대 뒤로 숨었다. 그렇다. 씁쓸하지만 지옹이 전봇대를 안식처로 삼기 시작한 것은 이 때부터였다. 한명이 거품을 물고 녀석의 손에서 기절했을 땐, 이미 다른 녀석들이 도망친 뒤였다. 동공에 풀린 녀석을 바닥에 툭 하고 떨구곤 악마같은 몸짓으로 서 있던 채관형이 겔로 올려버린 머리카락을 매만지듯 쓰윽 가다듬었다. 그리곤 잠시 지옹이 숨어있는 전봇대 쪽을 바라보더니 쌓아올려져 있는 가방들을 발로 퍽 차고(이번에도 지옹의 것이었다) 쓰윽 가 버리는 것이었다. 사실 정말 조금 오줌까지 싸 버렸던 안 좋은 추억이었다. 그 뒤로 녀석을 만날 일도 없었고, 혹시나 학교에서 만나더라도 자신도 모르게 한걸음 물러났었다. 고맙다는 말을 해야 하는데.. 그 말을 하기까지가 어찌나 두렵던지. 어찌되었건 간에 그 뒤로부터는 같은 반 양아치들도 지옹이 관형과 무슨 특별한 관계인 줄 알고는 감히 건들지 않았으며, 비교적 순탄한 삶을 살게 되었다. 문제는 새학기가 시작되면서 녀석과 같은 반이 된 것이었다. 한껏 인상을 구기며 자리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던 관형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멍청한 웃음을 지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곤 얼떨결에.. "저.. 저번엔 정말.. 고마웠어..." 라고 내뱉었는데, 정작 당사자인 관형은 무슨 개수작이냐는 표정으로 지옹을 위아래로 야리는 것이었다. "뭐?" "....아.. 아냐, 아무것도." 아무래도 이 녀석, 기억을 못 하나보다 싶어 애써 얼굴에 경련을 일으키며 웃자, 녀석은 그 웃음에 기분이 나빴는지 얼굴을 한껏 구기며 꼬치꼬치 캐묻기 시작한 것이었다. "너 뭐야?" "어..엉?" "뭐가 고마웠다는 거야." 제.. 젠장. 이 많은 애들이 있는데 그 쪽팔린 사건을 내 입으로 말하고 싶겠냐? 계속 시선을 피하며 더듬거리자, 녀석은 정말 화가 났는 지 벽쪽을 주먹으로 콰악 쳤다. 그 소리에 놀라고 다리도 후들거려 눈물을 글썽대자, 녀석은 뚫어져라 지옹을 바라보더니, "너 이름이 뭐냐?" 라고 물었다. 그리고 나서... ...그렇게 해서 이렇게 질긴 인연이 되고 만 것이지. 휴우.. 침대에 털썩 누워버렸다. 그러고 보면 자신의 중 고등학교 시절은 항상 채관형과 함께였다. 간혹 관형이 왜 이렇게 자신을 데리고 다니려는 지, 가끔씩은 어이없을 정도로 옭아매는 것도 이상했지만, 나날이 정.............. 떨어지는 건 사실이었다. ㅡㅡ; "야아, 좋은 아침이다." 죽어라 열나게 뛰어가고 있는데, 누군가가 거센 힘으로 뒷덜미를 꽈악 움켜쥐며 반갑게 말했다. 숨이 막혀 꽤액 소리를 내며 뒤돌아보자, 려태풍이 느긋한 얼굴로 인사를 했다. 젠장, 지각이라고. 빠져나가려고 발버둥을 쳐도, 녀석이 쉽사리 놓아주지 않는다. 오히려 즐겁다는 듯 지옹을 꽉 붙들곤 머리카락을 쓱쓱쓱 쓰다듬는다. "지.. 지각이란 말이야!!" "뭐, 어차피 지각인데 조금 늦는다고 틀릴 것 있냐?" 어째서 이렇게 느긋한 거지? 씨익 미소를 지으며 한쪽 옆구리에 지옹을 꽉 낀 태풍이 슬금슬금 느긋하게 한걸음씩 걸어가기 시작했다. "너.. 관형이 녀석이 벼르고 있는 거 아냐?" "그 녀석이 왜?" "어제 싸우기로 했는데 니가 가 버렸잖아." "아아.. 어쩔 수 없잖아." 어깨를 으쓱하며 '어쩔 수 없잖아.' 따위를 내뱉는 녀석은 정말이지 그 옛날 선비들같다. "뭐가.. 어쩔 수 없다는 거야?" "난 알바하니까.. " 아아, 그래. 넌 알바하지..........가 아니라고!!! "아무튼, 관형이 진짜 무서운 녀석이니까 조심해. 너도 세지만.. 관형인 정말..." 악마, 그 자체라고.. 끝의 말은 목구멍으로 삼킨 채 바닥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숨을 크게 내쉬며 '아아, 학교 가기 싫다..' 따위를 내뱉던 녀석이 갑자기 지옹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우리, 학교가지 말까?" "뭐.. 뭐?" 무슨 소리냐, 이 자식아!! 그걸 말이라고 해??? 이게 정말 정신이 있는 녀석이야, 없는 녀석이야? 학생이 당연히 학교를 가야지, 어디 땡땡이야. 땡땡이 치려면 너 혼자 쳐!! 아무리 니가 그래도 이번엔 절대 안 된다고!!!!!!!!! 20분 후. ..뿅뿅.. 뿅뿅... "죽어, 죽어!! 앗싸.. 이겼다... 야, 빨리 해 봐. 이거 캡이다." 공룡들이 커다란 화면에서 물결치고 있었다. 티라노사우루스도 있고, 랙터도 있다. 티라노사우루스를 상대로 커다란 이빨을 으르렁대며 달려드는 렉터는, 이 무식한 려태풍이다. "......저어.. 진짜 학교 안 갈거야?" "엉? 아, 빨리 해 보래두. 안 그러면 내가 다 한다." 여기는 어디? 학교 근처 오락실이다. 간도 큰 게 땡땡이 치는 주제에 학교 바로 앞으로 올 건 뭐란 말이냐! 게임에 넋을 잃고 있다. 완전 폐인같다. 옆에서 가방을 꼬옥 움켜쥐고 혹시나 학주가 뜨진 않을까 눈알을 굴리던 지옹은 미친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나.. 난 됐어." 어째서 인생이 이렇게 험난하단 말인가. 채관형이나, 려태풍이나.. 같이 다녀서 좋을 게 하나도 없는 녀석들이다. 어쩐지 한기가 든다. 순간, 지옹의 의심을 확인시키듯, 텅 빈 오락실 안이 시끄러워졌다. "저 새끼들 지광고 교복 아니야?" 엄청나게 험상궂은 녀석들이었다. 순간적으로 당황한 지옹은 반사적으로 주위를 훑어보았다. 여차하면 튈만한 공간을 찾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출구는 단 하나, 그 녀석들 바로 뒤였다. 오락실을 지키고 있는 것은 나이 많은 돋보기 안경을 쓴 할머니가 전부였다. "잘 됐네. 저 새끼들에게 채관형을 불러오라고 하면 되겠네." 채관형? 녀석들의 입에서 관형의 이름이 나오자, 지옹은 반사적으로 귀를 솔깃했다. 녀석들이 손가락을 까딱이며, '이리 와.' 라는 포즈를 취하자 식은땀이 흘렀다. 하지만 여전히 오락기에 정신을 빼앗고 있는 태풍은 그 소리가 들리지 않나보다. "어쭈? 저 새끼들이 지금 우리 씹은 거 맞지?" 얼굴에 칼자국 비스무리한 것이 있는 키 큰 놈이 으르렁대자, 그 옆에서 뭔가 심상치 않은 얼굴을 하고 있는 녀석이 한발자국 움직였다. 어디선가 많이 본 얼굴이다. "야, 이 씹새끼들아. 니들 이리 오라는 얘기 안 들려?" 점점 다가올수록, 지옹은 머리가 멍해지는 것 같았다. 저 녀석, 분명 어제 얘기하던 그 강민구다. 사복을 입고 있고, 하도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라 깜빡했지만, 분명 그 악마같은 녀석이 분명했다. 아무래도 오늘 채관형을 치러 온 게 틀림없었다. "태.. 태풍아." 열심히 태풍의 옆구리를 찔러보았지만, 게임에 열중한 태풍은 입까지 헤 벌려가며 열심히 목이 긴 공룡을 치고 있었다. 그 무사태평한 행동에 질린 것은 비단 지옹뿐이 아닌가보다. 녀석들이 정말 열 받았는지 다가와 있는 힘껏 태풍의 뒷통수를 갈겼다. 빠악 소리가 날 정도로 강한 펀치였다. 그 순간을 노렸는지, 옆에 서 있던 녀석들이 발로 태풍의 허벅지며 허리부분을 가차없이 차기 시작했다. 게임기에 엎드려 배를 움켜쥔 태풍을 바라보며, 지옹은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랐다. 도움의 눈초리로 동전 바꾸는 환전소를 쳐다보았지만 여전히 할머니는 돋보기를 쓴 채 티비에 열중해있다. 아무래도, 귀도 안 좋은가 보다. "죽을라고 이게..." 상대는 네명. 전학온 첫날도 네명이었다. 하지만 가볍게 태풍이 손보지 않았던가. 그래도... 그래도 그 녀석들과 이 무시무시한 녀석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전과까지 있는 녀석이다. 게다가 칼로 사람을 찔렀었다. 부들부들 떨면서 자리에 서 있자, 녀석들의 시선이 지옹에게 향해졌다. "너..." "나.. 나는..." 갑작스레 한 녀석의 주먹이 귓가를 스친다고 생각했다. 쾅 소리가 나더니 머리가 윙윙 울리고 위잉 소리가 나며 더 이상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아무래도 고막이 터진듯한 느낌이었다. "씨발.. 아주 지광고 새끼들은 개나 소나 날뛰네. 지들이 졸라 잘 나가는 줄 아나보지?" "이런 족밥같은 새끼들 상대할 시간 없으니까, 한 명 일으켜서 채관형 불러오게 시켜." 한쪽 귀를 움켜쥐고 바닥에 쓰러져있는데, 녀석들이 하는 말들이 메아리처럼 윙윙댔다. 그때까지 쓰러져 있던 태풍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분개하듯 소리쳤다. "아.. 개새끼들.. 진짜. 니들 때문에 죽었잖아!!" 아무래도 저 자식은 내가 쓰러진 것 따위는 보이지도 않나 보다. 씨발... 관형이라면 니들 다 죽었어... 태풍은 지 렉터가 죽은 것 때문에 열이 뻗쳤는지 길길이 날뛰며 사정없이 주먹을 날렸다. 오락실 의자들이 우당탕탕 바닥에 흩어졌다. 태풍의 격한 반응에 당황한 강민구의 주변 녀석 몇 명이 뒷걸음질치다가 지 발에 걸려 넘어졌다. 그 중 한명을 움켜쥔 태풍이 가차없이 강한 주먹을 날렸다. 억 소리를 내며 한 녀석이 바닥에 쓰러지자, 다른 녀석을 움켜쥔다. 그리곤 사정없이 발로 이마를 때리는 것이었다. "으윽!!!" 녀석이 신음하는데도 녀석은 정말 화가났는 지 그치질 않는다. 역시나, 려태풍 녀석 진짜 굉장한 괴물이다. 아까 반항 안 하고 오락실 따라오길 잘 했지..... 라고 쓰러진 와중에도 스스로의 행동을 자화자찬하고 있는데... 순간, 뭔가 번쩍인다 싶더니, 강민구의 손에 길다란 칼이 들려있었다. "죽고 싶냐?" 비열한 웃음까지 흘리며 칼을 든 손을 휙휙 움직이며 한걸음 한걸음씩 태풍에게 다가섰다. 태풍은 한 손으로 어떤 녀석을 미친 듯이 패다가 그걸 보고는 약간 주춤했다. 아무리 천하의 려태풍도 칼이 무섭긴 무섭나보다. "그거.. 진짜 칼이냐?" 빙신아, 그럼 저게 진짜지, 가짜냐? 한쪽 귀를 움켜쥔 지옹은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머리가 윙윙 울렸지만,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관형이라도 있었으면... 하는데, 태풍이 여유롭게 피식 웃는다. "야아.. 너 그거 장난감이지? 그런 거 갖고 장난친다고, 내가 봐 줄 줄 알아?" 저 새끼, 바보 아냐? 저거 진짜 칼이라고.. 하지만 여전히 그게 장난감이라 치부해버린 태풍이 강하게 칼을 손으로(...) 움켜쥐더니 경악어린 강민구의 복부를 강하게 발로 걷어찼다. "아악!!" 바닥에 쓰러진 채 커다랗게 신음하는 강민구를 한참 걷어차던 태풍은 손바닥에 무언가 뚝뚝 떨어지자 때리던 것을 멈추고 천천히 내려다보았다. "이게.. 뭐야?" 태풍이 칼을 뚝 떨어뜨리더니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벼.. 병신.. 저거 진짜 또라이 아냐. 당연히 피잖아. 네 녀석은 뇌도 없냐? 단순 무식한 자식. 남는 건 힘밖에 없는 새끼. 마음속으로 있는 욕 없는 욕을 내뱉으며 울리는 머리를 붙들곤 정신없이 태풍에게 달려갔다. 태풍의 손바닥에서 새빨갛고 뜨거운 피가 철철철 흘러 넘쳐 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그걸 본 태풍이 포효하기 시작했다. "씨... 씨발.. 피잖아!!!!" 그리고 일은 터졌다. 태풍은 완전히 다른 인간 같았다. 그 전까지는 싸우더라도 어딘지 얼빵한 구석이 있었는데, 이제는 완전히 악마의 그것이다. 눈이 뒤집힌 태풍의 얼굴에서 살기마저 풍겨 나왔다. "커.. 커억...!!!" 사정없이 움켜쥐고는 목까지 강하게 조르는데, 더 이상 내버려두면 젊은 나이에 살인자라는 멍에를 지게 될 지도 모른다는 압박이 다가왔다. 재빨리 태풍에게 달려들어 태풍의 등을 꽈악 움켜쥐었다. 하지만 쿠웅 소리와 함께 엄청난 고통이 등짝에 울렸다. 제.. 제기랄.. 이렇게 난리치는데, 도대체 저 할머니는 왜 못 보는 거야... 낑낑거리며 다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다시 한번 태풍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려.. 려태풍.. 그만, 그만해. 죽이려고 그러는 거야?" 미친 듯이 매달리자, 그제야 천천히 정신이 돌아오는 지 숨을 헉헉 내쉬고 있다. "씨.. 씨발... 피야..." 여전히 자신의 손바닥을 바라본 채 하얗게 질린 태풍이 말했다. 지옹은 울리는 한쪽 머리를 움켜쥐고 재빨리 바닥에 떨어진 칼을 손에 쥐었다. 이걸 어디다가 버리던지 해야지. 교복은 온통 피투성이었다. 태풍의 어깨를 움켜쥐고 도망치듯 오락실을 나섰다.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태풍은 여전히 계속해서 '피다..'를 지껄이고 있었고, 지웅은 등짝이며 머리며 고통이 끊이질 않아 죽을 지경이었다. 손에 들린 칼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지? 어디로 가야지? 재빨리 피가 묻은 칼을 길에 굴러다니는 신문지와 봉지에 둘둘 싸서 쓰레기통에 버렸다. 옆에서 멍청히 따라오는 태풍은 손바닥만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병원.. 병원에 가야해.." 마치 길을 잃은 아이처럼 반복하는 태풍을 꽉 움켜쥐고는 가까운 병원을 찾기 위해 두리번거렸다. 어떤 병원을 가야 하지.. 외과를 가야 하나.... 눈앞에 보이는 강현외과로 태풍을 질질 끌고 가자, 거친 힘으로 지웅의 팔을 뿌리치는 것이었다. "뭐.. 뭐야.. 병원 가자며?" 참다못해 꽥하고 소리를 지르자, 태풍은 게슴츠레한 눈으로 지옹을 바라보더니 손을 번쩍 들어 택시를 잡았다. "뭐야.. 야아.." 어쩔 수 없이 택시에 조르르 탔다. "**병원이요." 태풍이 김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택시기사는 태풍과 지옹을 번갈아 보더니, '요즘 녀석들이란..' 하며 출발했다. 요즘 녀석들이 뭐, 어쨌다고. 하지만 태풍은 대꾸할 기색도 없는 건지, 아니면 못 들은건지 눈을 스르르 감고 시트에 몸을 뉘었다. 그러고 보니, **병원에 한지태 녀석들이 있잖아. 만약 이 녀석과 한지태 패거리가 마주치면 큰일 날텐데..... .....하지만 뭐, 두 쪽 다 부상자니까 괜찮겠지.... 라는 태평한 생각을 하며 지옹도 시트에 몸을 묻었다. 아까 맞은 귀가 자꾸만 시큰거렸다. 정말이지 파란만장한 날들이다. 어찌된 것이 태풍이 전학 온 뒤로 이놈의 저주받은 인생이 빛이 나는 듯 하다. 속으로 욕설을 중얼거리는데, 택시가 스르르 병원 앞에 멈춰 섰다. 어쩔 수 없이 지옹이 돈을 지불하고 질질질 태풍을 잡아끌자 녀석이 눈을 희미하게 뜨곤 천천히 따라내렸다. 어제 온 병원인데, 오늘은 다른 이유 때문에 오다니. 한숨을 내쉬는데, 태풍이 성큼 성큼 앞서 걷더니, 프런트에 가서는 뭐라뭐라 묻는 것이었다. "야..야아.." 같이 가자고. 젠장. 내가 왜 사서 고생이냐고. 다른 때 같으면 다소곳하게 학교에서 공부를 하고 있을 자신이, 아침부터 깡패들하고 싸우질 않나, 아침부터 피를 철철 흘리며 도시를 배회하지 않나.. 서둘러 한쪽 귀를 움켜쥐고는 태풍을 쫓아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한참을 올라가더니, 어느 문 앞에 이르러 딸칵하고 문을 연다. "아파." 문을 열자마자 손을 내밀며 앓는 소리를 하더니, 순간 어이없이 자리에 푹 쓰러졌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게 기절한 것이 분명했다. 어쩔 줄을 몰라 그런 태풍을 바라보던 지옹은, 그제야 안에 서 있는 거구의 남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이 사람은... 분명 어제 본 그 의사? "뭐야, 이 녀석은." 하얀 가운을 입고 담배를 태우던 사내는 태풍이 자리에서 쓰러지자 귀찮다는 목소리로 다가왔다. 그러다가 태풍의 손가락에 고여있는 피를 보자, '이런' 하며 곁에 쭈그리고 앉았다. "피를 흘렸잖아? 칼에 베기라도 한 거야?" 분명 이 질문은 자신에게 하는 것이다. 지웅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다가 귓 고막이 울리는 탓에 인상을 찌푸렸다. "너도 다쳤어? 어디 보자." 사내는 나직한 목소리로 지옹을 부르더니 머리카락을 슬며시 들고는 지옹의 귀 주위를 주의 깊게 살폈다. "저런, 여기가 찢어졌잖아. 너 이러고 잘도 여기까지 왔다." 기분을 좋게 하는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린 사내가 지옹을 자리에 앉혔다. 먼저 소독약과 여러 가지 응급치료 용품을 가져오더니 지옹부터 치료하기 시작했다. "제기랄, 모처럼 쉬는 시간이라고 좋아했더니, 이 녀석은 어딜 가나 말썽이야." 남자는 바닥에 쓰러진 태풍을 침대로 옮길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지옹의 귓가를 치료하다가.... ... 엎드려 있는 태풍을 발로 퍽 찬다... ㅡㅡ; 반듯한 의사의 이미지가 깨지기 시작했다. 어째서 욕설을 내뱉는게 이다지도 자연스럽단 말인가. "저기..." "응?" 발로 차며 욕설을 내뱉던 얼굴이 어느새 부드러운 웃음으로 바뀌자, 어쩐지 지옹의 특수 경보기가 삐뽀거렸다. 분명, 이 사내는 태풍이 녀석보다도, 아니, 어쩌면 관형이 녀석보다도 위험한 냄새가 난다. "태풍이랑... 아는 사이세요?" 조심스레 물어보자, 남자가 어깨를 으쓱하며, "뭐.. 좀 그렇지.." 라며 얼버무린다. 수상하다. 엄청. 귀 치료를 다 끝냈는지, 조심스레 깨끗한 거즈를 반찬고로 붙이곤 마데카솔 같은 약을 건네며 말했다. "세수는 조심해서 해라. 이 약은 하루에 한번만 발라주고..." 고개를 조금 끄덕이자, 어깨를 탁탁 치더니, "그럼 어디 이 말썽꾸러기를 치료해볼까..." 라며 태풍을 들어올렸다. 태풍이 녀석이 185센티가 넘을 정도로 거구라는 건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런 태풍을 가볍게 들어서 침대에 눕히다니.. 지옹이 입을 헤에 벌리곤 그 광경을 뚫어져라 쳐다보자, 사내는 씨익 웃었다. "형 멋지냐?" "예?" 게다가 뻔뻔스럽기까지 하다. "이 녀석 도대체 어쩌다 이런 거야?" "....아... 그게..." 차마 학교 땡땡이치고 깡패랑 싸우다가 칼이 장난감인줄 알고 잡았다는 영화 같은 사실을 꺼낼 수 없이 입을 다물었다. 대답을 하지 못하자, 그런 지옹을 힐끗 보더니 담배를 꺼내 다시 입에 무는 것이었다. "뭐, 말 안 해도 상관은 없는데...." "......" "큰형이 알면 난리 나겠는데.." 무의식중에 사내가 중얼거리자, 그제야 이 남자가 누군지 어렴풋이 짐작이 갔다. "혹시, 태풍이 형님?" "아, 티가 나나?" ㅡㅡ;; 그럼, 그런 말 듣고 눈치 못 채면 바보지, 정상이냐. 멋쩍은 듯 하하 웃어 제끼는 사내는, 그러고보니 태풍의 복사판 같다. 키도 태풍이 녀석처럼 엄청나게 크고, 의사 가운 안에 감춰진 근육 역시 장난이 아닐 듯 싶었다. 게다가 어쩐지 다소 아무생각 없이 태평한 것까지 비슷한 듯 하다. "그럼.." "둘째다." "예?" 손가락 두 개를 들어, '둘째다..' 라고 태풍의 둘째 형님이 말씀하셨다. 그러고보니, 태풍이네 집 형제들은 다들 이름이 엄청났었는데.. 둘째 이름이 뭐였더라... 태... "태양형님?" "아아, 이름은 제발 부르지 말아줘. 나는 우리 집안의 다른 방종한 인간들처럼 모럴없는 인간이 아니라고...." 한숨을 내쉬며 말하는 태양형님은, 절대로 모럴 따위에 연연할 것 같지 않아 보였다. 그런데 여기서 모럴이 왜 튀어나오는 거지? "려태풍, 일어나라." 손 치료를 다 하자, 태양 형님이 태풍의 머리를 톡톡 때렸다. 그래도 일어날 기미가 안 보이자, 갑자기 난데없이 자신의 머리로 태풍의 머리를 콱 박는 것이었다. 허걱. 형이 저래도 되는거야? 어렴풋이 예전에 자신이 태풍에게 '형제가 있어 참 좋겠다..' 라는 식으로 말했을 때, '좋을 것 하나도 없다고.. 그런 자식들..' 이라 내뱉었었던 태풍의 말이 떠올랐다. 그리고 이제야 공감하게 되었다. 만약 모든 형들이 이렇다면, 태풍이 녀석처럼 자신도 강해졌으리라.(불끈) ? "아이씨, 아프잖아.." 이마를 쓱쓱 문지르며 태풍이 눈을 떴다. "려태풍.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갑자기 싱글 싱글거리던 태양형님의 목소리가 엄청나게 낮아졌다. 지옹의 위험 경보기가 또다시 작동하기 시작한다. "뭐가 말이야?" "려태풍. 너 왜 전학왔지?" 어딘가 모르게 의미심장한 목소리에 태풍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누가 오고싶어서 왔어?" "아버지가 알게 되면 넌 죽은목숨이야. 알아?" "쳇, 말하라지." "그래? 그럼 태왕이 형한테 전화해 볼까?" 태양형님이 커피포트에 물을 올리다가 재미있다는 듯 피식 웃으며 전화기를 꺼내들자,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쓰다듬던 태풍이 얼어붙는다. "....말할거야, 형?" "다시 또 싸울거냐?" "....내가 그런 게 아니란 말이야. 가만히 있는데 시비 걸잖아." "피할 수 있었는데 안 피한 거 아니야, 니가." "에이 씨.. 진짜..." 태풍이 투덜대는 순간, 엄청난 속도로 주먹이 날아왔다. 퍼억..!! 지옹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한방에 옆구리를 맞은 태풍이 헉 소리를 내더니 침대에 쓰러졌다. "아.. 아프잖아.." 한참이 지나도 움직이질 못하고 옆구릴 움켜쥔 채 태풍이 간신히 속삭였다. "너, 내가 쌍시옷 내뱉으면 죽는다고 했지?" 태풍이 헉헉대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태양형님은 느긋한 어조로 커피포트에서 커피를 따랐다. 그윽한 커피 향이 방안을 가득 채웠다. "한잔 마실래?" 지옹에게 커피를 권하자, 어쩐지 거절하면 태풍이 녀석 꼴이 날까봐 겁이 나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귀가 울릴 지경이었다. "넌 이름이 뭐냐?" 부드러운 웃음마저 지으며 묻는 게, 정말 호러였다. "지.. 서지옹이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하자, 태양형님이 정말 태양처럼 웃었다. "그래? 귀여운 이름이군." 제.. 젠장, 사내한테 귀여운 이름이라니. 울컥 치밀었지만, 반사적으로 미소지으며, '아, 예 고맙습니다..' 라고 대답하고 있는 지옹이었다. "제길..... 큰형한테 이를거야.." 여전히 배를 움켜쥔 태풍이 중얼거리자, 갑자기 활짝 미소짓고 있던 태양형님의 안색이 무서운 속도로 굳어졌다. 그리곤 딸칵 하고 커피 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은 후, 지옹에게 활짝 미소지으며 말했다. "잠깐만 나가 있을래? 형제간의 소소한 싸움이라서 말이야" 거절을 할 수가 없었다. "예? 아.. 예..." 미안하다 려태풍. 어쩐지 이 몸은 도망치셔야 할 것 같아서 말이야. ....라고 생각하기도 전에, 어느새 몸이 밀려나고 문이 찰칵 닫혔다. 지옹은 주위를 흘끔 흘끔 훑어보다가 재빨리 문 쪽에 귀를 바싹 갖다댔다. "그래봤자야. 차라리 태왕형한테 말하는 게 나아!! 이 독재자 같으니!!!" "독재자? 네가 멍청해서 독재자라는 단어를 잘 모르는 모양인데.. 독재자라는 단어는 태왕형한테 더 어울린다고." "태왕형이 형보단 낫....윽... 허억.." 엄청난 소리가 방안에서 들려왔다. 퍽퍽 대는 소리는 감히 상상을 하기 싫을 정도로 무시무시했다. 저게 정녕... 한 집안 형제의 소소한 싸움이란 말인가? "너, 다시 말해봐. 이 형님이, 뭐라고?" "도.. 독재...허억.. 윽... 악!! 아프다고!!!" "이 새끼가... 도대체 애새끼들이 애를 어떻게 교육 시켰길래 이 모양이야? 앙? 한달 만에 보는 형님한테, 뭐라고? 앙? 다시 말해 봐." "으윽..." 신음하는 태풍의 목소리가 들리자 온 몸이 섬뜩해졌다. 역시 형제다. 화가 나서 사람을 때릴 때 '앙? 앙?' 하는 소리마저 똑같다. 비처럼 식은땀을 주르르 흘리고 있는데 곧이어 찰칵 하고 문이 열렸다. 문에 바싹 기대 귀를 기울이고 있던 지옹은 반사적으로 한발자국 물러난 후 딴 짓을 하는 척 허둥댔다. "오래 기다렸지? 끝났어. 들어와." 어째서 이렇게 사람좋은 미소를 짓고 있으면서.. 옆집 멋진 형님 같은 얼굴로...... 마음속으로 눈물을 꿀꺽 삼키며 천천히 들어가자, 배를 움켜쥔 채 바닥에 쓰러져 있는 태풍의 처참한 몰골이 시야에 들어왔다. 굉장하다. 그 강하디 강한 태풍이 찍소리도 못 내고 바닥에 쓰러져있다니... 이미 지옹은 쫄대로 쫀 상황이었다. 낑낑대는 태풍을 내버려 둔 채 커피잔을 들어 입가에 가져가던 태양형님이,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 말했다. "그런데 너희..." "예?" "학교에 있어야 할 시간 아냐?" "그...그게..." 마땅한 대답을 찾지 못하고 허둥대자, 배를 움켜쥐며 태풍이 일어났다. "가면 되잖아, 가면!!" 소리를 버럭 지른 태풍이 붕대를 둘둘 만 손으로 지옹의 한쪽 팔을 움켜쥐었다. "가자." "어? 어어...." "내가 미쳤지. 왜 여길 찾아와서는..." 시큰둥하게 중얼거리는 태풍, 그리고 그 옆에서 조심스레 빠져나가려는 지옹 뒤로 태양형님이 어쩐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려태풍, 자꾸 까불면 진짜 큰형한테 전화한다?" "알았어, 알았다구!!" 문이 닫히자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태양형님의 말 한마디에 움찔 움찔하느라 경련이 일 정도였다. 새삼 존경의 눈으로 태풍을 바라보았다. 이런 환경에서 잘도 컸구나, 너... "뭐.. 둘째형이야." 어깨를 으쓱한다. "아.. 알아.." 문득, 저 무시무시한 태양형에게도 바락 바락 대드는 태풍인데, 도대체 태풍이 그토록 무서워하는 첫째형은 어떤 인간일 지 궁금해졌다. "근데... 그.... 태왕형님은..." "아윽!! 그만!! 스탑!! 너한테까지 큰형 얘기 듣고 싶지 않아." 고통스레 비명을 지르는 태풍을 보자, 그 불안감이 더더욱 커졌다. 괴물인가보다. 인간이 아닌갑다. 그냥 마음편하게 어디선가 '태왕'의 '왕' 자라도 들리면 도망쳐야겠다고 생각했다. 만약 지금 학교에 들어간다면 선생님한테 어떤 변명을 해야 할 지 고민이 들었다. 아니, 그것보다.. 혹시라도 선생이 집에 전화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엄청나게 불안해졌다. 아니, 아니 그것보다도 더 두려운 것은... 채관형, 그 녀석의 야림이다. 분명 어디 갔다 왔냐부터 시작해서, 누구와 함께였나, 무엇을 했는지까지 시시콜콜 묻다보면, 려태풍, 이 녀석과 함께였다는 사실까지 알아낼 것이다. 만약 자신에게 핸드폰이 있다면 골백번도 더 전화를 했을텐데. 녀석에게 거짓말 치는 것도 익숙치않고, 만약 거짓말을 하더라도 발빠른 소식통을 자랑하는 녀석의 주변녀석들이 려태풍도 학교를 안 왔다는 사실을 이미 알려줬을 터였다. 진짜, 미쳐 돌아삐리겠다. 이런 지웅의 마음을 아는 지 모르는 지, 어슬렁어슬렁 걸어가던 태풍이 갑자기 자리에서 우뚝 멈춰섰다. "왜?" "지금 몇 시냐?" "응? "몇 시?" "음.. 11시다. 학교 들어가면 죽었네.." "......" "......왜?" 지웅이 설마하니 조심스럽게 물어도, 녀석은 대답을 하지 않은 채 파아란 하늘을 멍 하니 올려다보았다. "서지웅." "어? 어?" 갑작스레 어울리지 않는 진지한 목소리에, 지웅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뜨고 목을 가다듬었다. 하늘을 우러러 바라보던 태풍이 몸을 조금 돌려 지웅을 내려다보았다. "너....좋아하냐?" 응? 응? 그러니까, 뭐어얼!!!!!!??? 이 자식아!!!!!! 밑도 끝도 없이 '좋아하냐?' 는 뭔데? "뭐?" "......좋아하냐고..." "......으... 그... 글쎄..." 난감하다. 뭘 좋아하는 지 말을 해줘야 대답을 하건 말건 하지. 잔뜩 입술을 깨물고 고민하던 지옹은, 답지 않을만큼 녀석의 진지한 눈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음을 깨닫자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분위기 상 그렇다고 하지 않으면 붕대를 둘둘 만 팔이 움직일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최대한 열성적으로 말했다. "좋아해, 좋아하고 말고." 몰랐다. 그렇게 말하던 순간까지만 해도. "으아악!! 안돼, 안 된단 말이야!!!!" "푸하하하, 괜찮아, 괜찮다고.. 내가 전철표는 내가 끊는다니까.." 기괴한 웃음을 내지르며, 너무 천진난만(..)한 웃음을 퍼붓는 녀석은 기분이 좋은 듯 성큼 성큼 걸으면서도 꼭 쥔 지옹의 뒷덜미를 놓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지옹은 속으로 피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어째서... 어째서 난데없는 여행이란 말이냐. 그 '좋아해?' 가 '여행 좋아해?' 였을 줄이야. 도대체 여행이 무슨 국가 기밀단어냐? 왜 싹뚝 잘라버리고 물어보냔 말이다. 물론 고개를 끄덕인 자신도 잘못이긴 하지만 그렇게 진지한 눈으로 '좋아해?' 라니... 씨발 새끼. 무서워서 멋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게 되잖냐고! 아니야, 다 때려치우고서라도 왜 지금 하필이면 오전 11시가 조금 넘은 이 시각에, 우리가 여행(..)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되냐고!! 왜, 무엇땀시!! 이 녀석, 너 무슨 실연이라도 당한 게 아니라면... 사나이 대 사나이로 이딴 황당 무계한 행동 좀 자제하란 말이다!!!! ........라지만, 젠장. 나도 이제 속으로 말하는 게 지겨울 정도다. "인천이라니...." "인천이 얼마나 좋은데?" 그러고 보니, 이 녀석이 이전까지 살던 동네가 인천이었다. 결국 이 녀석의 마이 페이스에 이끌려버렸다. 시무룩하게 전철에 앉아 덜컹거리는 움직임에 몸을 맡기고 있는데, 아이처럼 창가에 탁 달라붙은(..그래봤자 암흑뿐인데..) 녀석 탓에 쪽팔려 죽겠다 싶었다. 가뜩이나 탄 사람도 드문데, 교복을 입고 소풍가는 분위기인 태풍을 보자 '요즘 학생들이란..' 따위의 속삭임이 귀에 들릴 지경이었다. "태풍아.." "앙?" "우리.... 지금이라도 안 늦었으니... 도로 가지 않을래?" 조심스럽게 꺼낸 말에, 태풍이 녀석이 어두침침한 창 밖을 웃는 얼굴로 바라보다가, 갑작스레 지웅을 내려다보았다. 그 시선이 너무 강렬해서 흠칫했다. "괜찮아." 갑작스레 낮은 목소리다. "내가 지켜줄게. 나만 믿어..." 아, 이런 말. 이젠 두렵다. 도대체 무엇으로부터 지킨다는 말이냐!!! 머리를 감싸쥐고 '쿠웨에엑!!!' 이라 소리라도 치고 싶은 마음이었다. 비록 지각은 했어도, 결석 기록은 없는 지옹이었다. 개근상이 눈앞에서 아른거리는 것을, 눈물을 머금고 삼켜야만 했다. 조용한 전철에 가만히 앉아있자, 결국 하품이 나왔다. 눈물이 찔끔 찔끔 나올 정도로 크게 하품을 하곤 머리를 의자 옆에 붙어있는 기둥에 기댔다. 평소 버릇이, 일어나서 4교시 끝날 때까지 자는 건데, 그 익숙한 생활 패턴이 바뀌자 졸릴만도 했다. 게다가 그냥 바뀌기만 했냐? 뭔가 후다닥 지나갈 만큼 굉장한 오전이었다. 지금도 인천가는 기차에 몸을 맡기고 있는 자신이라니.. 기둥에 머리를 기댄 채 멍하니 눈을 껌뻑이며 잠을 자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졸린 건 어쩔 수 없다. 연달아 하품을 하다가, 결국 눈을 스르르 감아버렸다. 티라노사우루스가 앞발을 들고 포효했다. 커다란 이빨을 내밀며, 쿵쿵거리며 자신에게 다가왔다. 그 이빨이 번뜩이자, 눈이 부시면서 동시에 엄청난 공포로 온 몸이 떨려왔다. 한번 물리면 끝장이다. 제.. 제기랄.. 커다란 뒷다리를 쿵 쿵 거리며 한발자국씩 다가올 때마다 그 무시무시한 눈 탓에 한발자국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오.. 오지마...." 라고 중얼거려도, 티라노사우루스가 용서해 줄 리 없다. (도대체 티라노사우루스가 뭘 용서하냔 말이다) "아.. 안돼.." 멍청히 중얼거리며 천천히 한걸음씩 뒷걸음질치는데, 티라노사우루스가 어느새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크르릉 크르릉 대던 티라노사우루스의 몸이 굽혀지더니, 절벽에 딱 붙어있는 지옹을 향해 그 큰 얼굴이 천천히 내려왔다. 살기 섞인 동물의 소리가 귓가에 멍멍 울렸다. 오줌이라도 쌀 듯한 최악의 분위기다. "사.. 살려주세요.." 커다랗고 노란 무시무시한 눈이, 천천히 낯이 익은 눈동자로 바뀌었다. 앗, 하는 사이에 그것은 어느새 한쪽 가방을 어깨에 둘러 맨 채관형이 으스스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진짜.. 어째서 사람이 티라노사우루스보다 무섭단 말이냣. 너무 무서워서 오줌 쌀 것 같았다. 채관형은 위협적으로 천천히 다가오며 입을 열었다. "...어!!" 그러나 튀어나온 것은 어쩐지 조금 다정한 목소리다. "엉?" "......다, 왔다고. 서지옹." 핫 하고 눈을 뜨자, 려태풍이 즐거운 듯 얼굴 코 앞에서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하아.. 꿈이었구나.... 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 확실히 화장실이 급한 건 사실이었나 보다. 참을 수 없는 용변에 대한 압박에 다리마저 꼬자, 속을 알리 없는 태풍은, "오랜만이다!!!" 라며 좋아 방방 뛰었다. 이 자식.. 너 전학 온 지 3일밖에 안 되었으면서 뭐가 오랜만이라는 거야.. 윽.. 그.. 그것보다 제발 빨리 도착해라... 손잡이를 꽉 움켜쥐며 다리를 꼬고 있는데, 갑작스레 안내방송이 흘러 나왔다. "손님여러분, 양해말씀 드립니다. 전철 내의 갑작스러운 사정으로 인해 인천까지 약 12분이 지연 될 예정입니다. 다시 한번 양해 말씀 드립니다." "씨바알....!!!" "젠자앙!!!" 하고 외친 순간, 태풍 역시 욕설을 내뱉었다. 의자에 남아있던 몇 안 되는 사람들이 그런 태풍과 지옹을 쳐다보며 수군거린 건 불가항력이었다. 도착하자마자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지옹은 번개같은 달리기 솜씨로 지하철 화장실에 뛰어갔다. "휴우.... 사.... 살았다." 손까지 비누로 꼼꼼히 씻고 나오며 중얼거리자, 태풍은 그런 지옹이 재미있다는 듯 피식 웃었다. "자, 그럼 가 볼까?" 라며 성큼 성큼 앞질러 걷는다. 인천은 월미도 올 때 몇 번 와 봤다. 하지만 월미도만 딱 들렸다가 갔기 때문에 시내라든지, 이런 데엔 깜깜했다. 태풍은 어슬렁어슬렁 어디론가 계속해서 성큼성큼 걸어갔다. 중심가에 들어서자, 이 쪽 저 쪽에 은근히 자신들처럼 교복입은 녀석들이 많다는 걸 발견했다. 그래, 니 녀석들도 다 땡땡이구나. 하지만.. 제기랄... 동족애보다는 왜 이렇게 간이 떨린다냐.. 엄청나게 험상궂은 얼굴들 투성이었다. 서울에도 이런 녀석들 많다 싶었지만, 어쩐지 더 위협적인 듯 했다. 몇 명 녀석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불량스러운 자세로 길거리에서 자신보다 몸짓 작은 녀석들을 붙잡고 뭐라뭐라 하고 있었다. 그 중 한 녀석과 눈이 딱 마주치는 순간, 무의식중에 태풍의 뒤로 가서 숨어버렸다. 제.. 제기랄... 왜 어딜가나 이런 녀석들 투성이냐고. 우리 마음 약한 고등학생들은, 어디 무서워서 살겠냐고, 엉? 도대체 국가 보호 기관에서는 뭣들하는 거야, 이런 녀석들 안 잡아가고!!!!(버럭!) "헉. 려태풍이다!!" 갑작스레 어떤 녀석이 기가 질린 얼굴로 외치자, 그 옆에서 삥을 뜯고 있던 녀석이 말도 안 된다는 듯 뒤통수를 때리며 소리쳤다. "이, 빙신 새끼. 그 녀석은 서울로 전학 갔잖아. 자꾸 재수 없는 소리할래? 니 개새끼 때문에 계속 심장이 벌떡벌떡하잖아!! 려태풍 그 녀석이 아직 인천바닥에 있을 리가...... 커억!!!" 말을 하던 녀석과 태풍의 눈이 마주치자, 돈을 들고 있던 녀석의 손가락 사이로 우수수 돈이 떨어져 흩날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녀석은 주울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뒷걸음질치기 시작했다. "려.. 려태풍..." 자신의 이름이 불린 태풍이, 느긋한 미소를 지으며, '앙?' 하고 대답하자, 녀석들은 뒷걸음질이 빨라지더니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어쩐지... 굉장하다. 존경이 섞인 눈으로 태풍을 쳐다보자, 태풍은 뒷머리를 긁적긁적하더니, "왜 저러지?" 라며 태연히 가던 길을 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한참을 시내 중심쪽인 듯 보이는 곳으로 걸어가던 지옹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태풍아." "엉?" "어째서... 보는 모든 사람들이 널 피하는 거냐?" 심지어는 대형 오락실 앞에서 담배를 피던 나이 지긋한 남자도 태풍의 얼굴을 보자 기가 질린 얼굴로 '허억' 이라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더니 가게 안으로 도망가버렸다. '여어, 안녕하세요..' 하고 말하던 태풍은 그런 남자의 반응에도 싱긋 웃는 것이었다. "글쎄." 뭐가, '글쎄' 냐 글쎄는 !! 오히려 이 녀석의 태평한 반응이 속터질 지경이다. 한참을 걷던 태풍이 어느 어두컴컴한 지하 상가로 몸을 돌렸다. 얼떨결에 따라 들어가던 지옹은 문을 열자 풍겨오는 매캐한 담배연기에 숨이 막혔다. "려태풍!!!!" 제기랄. 뭐가 이렇게 많은 거냐. 20명은 되어 보이는 녀석들이 술 마시면서 무언가 모의하는 분위기로 앉아 있다가, 태풍의 등장에 모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다가오는 것이었다. 엄청 엄청 엄청 불량스러운 기운을 팍팍 내뿜던 녀석들이 태풍을 보자마자 반색을 하며 소리쳤다. 젠장, 이런 악마 소굴엔 뭐하러 들어온 거냐!!! "잘 있었냐?" 킬킬거리며 인사를 하자, 녀석들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다가왔다. "어떻게 된 거야? 서울로 전학갔잖아!!!" 그 중 키가 크고 잘 생긴, 그렇지만 엄청 불량하다 싶은 녀석이 태풍의 온 몸을 꽉 껴안으며 말했다. "아아, 놀러왔어." 태평하게 '놀러왔어' 라고 대답하자, 녀석이 껄껄껄 웃기 시작했다. "내, 그럴 줄 알았어. 니가 그냥 떠나버릴 리 없지." 옆에 있던 굉장히 밝은 노란색의 머리에, 눈이 쫙 찢어진, 한쪽엔 은색 귀걸이를 한 녀석이 그걸 지켜보다가 태풍의 어깨를 툭툭 쳤다. "말도 없이 가버려서 놀랬었다." "뭐, 미안." "그런데, 이 녀석은?" 편안한 기색으로 중얼거린 태풍이 자리에 대충 자리를 잡고 털썩 앉자, 그제야 멍청히 서 있던 지옹을 발견했는지, 갈색머리의 키 크고 근육이 상당한 남자가 자신을 가리키며 물었다. "아, 같은 학교 친구." 얼떨결에 고개를 꾸벅 해 버린 지옹은 도대체 자신이 여기서 뭐하고 있는 것인지 아리송해졌다. 정신이 머엉 하다. "헤에, 이게 너네 교복이야?" "응" "헤에, 서울도 이렇게 촌스러운 녀석이 있었구나.." 뭐가, 촌스러운 녀석이냐!! "이 녀석은 어느 정도냐, 주먹이?" "보기엔 비실비실 할 것 같은데?" 그래, 나 비실하다. 관찰하는 듯한 눈동자가 40개는 넘는 듯 했다. 순식간에 이목을 집중시켜버린 지옹은 뻘쭘히 교복 밑단만 만지작거렸다. "아아, 꽤 강해. 그 녀석." 의외의 대답에 놀란 것은 비단 다른 녀석들뿐이 아니었다. 지옹도 놀라서 태풍을 쳐다보자, 태풍은 살짝 윙크를 하며 의자에 편안하게 앉아있었다. "그런데, 위하랑 혁진이는 어디 갔냐." "그 녀석들? 학교 갔지 뭐." 노란 머리의 녀석이 말했다. "그렇지, 참." "전화할까?" 키 크고 잘생긴 녀석이 핸드폰을 손에 쥐며 묻자, 태풍은 '아아, 됐어.' 라며 손사래를 쳤다. "그나저나 배고파." 배를 움켜쥐고는 앓는시늉을 하자, 갈색머리 녀석이 태풍의 등을 탁 하고 쳤다. "이 새끼는 어딜 가나 이 모양이야, 정말." 말을 거칠지만, 녀석들은 모두 웃고 있었다. 아무래도 태풍이 녀석, 여기서 굉장히 소중한 녀석인 듯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넌 얼마나 강한데?" 머리 노란 녀석이 태풍이 엄청나게 깔려진 음식들을 허겁지겁 먹으며 잘생긴 녀석과 갈색머리 녀석의 말을 잇는 가운데 지옹을 노려보며 물었다. "엉?" 이 녀석, 눈이 살아있다. (--;) "나..난 뭐." 아하하 웃으며 분위기를 모면하려고 해도, 녀석의 시선이 놓아줄 생각을 하지 않는다. "넌 뭐?" 아무래도, 태풍의 말에 자극을 받았나보다. 얼마나 강한 지 잘 모르겠다고 말하면 '그래? 그럼 한번 겨뤄볼까?' 라고 말할 듯한 분위기다. "난 뭐... 그냥...." 애써 얼버무리며 쫄면에 집중하려고 하는데, 갈색머리 녀석이 태풍에게 물었다. "그래, 거기 생활은 어때?" "뭐.. 그럭 저럭.." "갈구는 녀석들도 많지?" "그렇지 뭐." "팔은 왜 그 모양이냐?" "뻔하지. 가자마자 한판 한 것 같은데?" "하여간, 이 녀석은.." "뭐.. 그렇지..." 먹느라고 정신이 없는 태풍이 건성으로 대답하자, 갈색머리와 잘생긴 녀석이 의미심장하게 서로 눈빛을 교환한다. "넌 어딜 가도 말썽이니까 보조해 주는 녀석이 있어야 하는데.." "뭐.." "너 가고 나서 인천바닥도 너무 심심하다고. 도대체 그러길래 그런 일은 왜 저질러서... 병신새끼." 노란 머리가 태풍에게 단무지를 슬쩍 밀어주며 말했다. 너, 내 단무지라고.. 그거!! "야, 그게 태풍이 녀석 탓이냐? 채웅이 자식이 겁도 없이 깝대다가 그런거지." "채웅이도 반성하고 있어. 하지만 그 녀석들한테 학교까지 알려줄 필요는 없었잖아." "태풍이 녀석이니 가능한 바보같은 행동이지." 도대체 무슨 얘긴 지 알 수가 없다. 매운 쫄면 탓에 물을 먹고 싶어도 일어설 수가 없다. 녀석들, 어쩐지 조금 험악하다. "어쨌든, 니 녀석이 학교 앞에서 신들린 듯 청룡파를 박살 낸 후부터는 녀석들이 감히 이쪽을 건드릴 생각도 안 하나보더라." "고등학생이 키가 너 만한 녀석이면 지레 겁을 먹는 모양이던데.." 슬그머니 동태를 살피며 물을 뜨러 가려던 지옹은 그 말에 놀라 다시금 자리에 스르르 앉아버렸다. 청룡파...라. 이 만화책이나 영화 따위에서도 질리도록 들은 이름은, 분명 운동회 청백전 따위의 청파 백파가 아닌 것이었다. 조.. 조직 폭력단? "태국이 형님은 어떠시냐?" "뭐, 알아서 살겠지." "그게 무슨 소리야, 알아서 살다니.." "몰라, 나도 지금 집에 잡혀있다고. 형 걱정해 줄 타임이 아니야." 신경질적으로 젓가락을 탁 내려놓은 태풍이 화가 난다는 듯 으르렁댔다. "그놈의 망할 영감이, 용돈도 제대로 안 준단 말이야. 집에 가둬놓고, 생활비는 내가 알아서 벌라니.. 그게 말이 돼? 내가 그동안 얼마나 돈을 모아두고 모아뒀는데... 씨.." "용돈도 안 준단 말이야?" "장난 아니네.. 역시 그 날 일이 컸긴 컸구나." "태국이 형님은?" "씨..." 막내형을 생각하면 젓가락이 저렇게 순식간에 부서지나보다. 으르렁대는 태풍의 얼굴에 서린 분노에 지옹은 쫄면이 목구멍에 걸릴 지경이었다. "그 자식.. 튀어버렸다고. 지가 멋대로 싸움 났다고 좋아하며 수업도중에 튀어온 주제에.. 선생이 멀리서 달려오는 게 보이니까 순식간에 튀어버렸다고... 개새끼..." 그 분노에 치를 떠는 목소리에, 모두들 조용해졌다. 잘생긴 녀석이 태풍의 어깨를 툭툭치며 유감을 표명(..)했다. "안 됐구나. 다른 형님들은? 모두 서울에 계시잖아?" "그 자식들이 도와 줄 거라고 생각해? 만나면 맨날 패기만 하고..." 씩씩거리며 마지막 만두를 입안에 집어넣은 태풍이, 우적 우적 만두를 씹으며 으르렁거렸다. "아까 전에도 둘째형한테 맞았어." 그 말에 셋 다 '풋' 하고 웃었다. "태양형님이 좀 강하냐? 그러니 적당히 개기라고.." "그러게. 너는 그렇게 맞고도 정신 못 차리냐, 왜?" "몰라, 에이." ...라더니 왜 또 떡볶이 한 접시를 주문하냔 말이다. 넌 그렇게 처먹고도 배가 안 터지더냐? "태왕형님이 계시잖아." 갈색머리가 생각 난 듯 말했다. "맞다. 태왕형님이라면 도와주실텐데?" "큰 형 얘긴 꺼내지도 마." 젓가락을 탁탁거리며 낮게 말하자, 또다시 잘생긴 녀석이 킬킬 거렸다. "이 녀석은 태왕형님이라면 엄청 무서워하잖아." "하긴, 무서워 할 만도 하지." 순식간에 나온 떡볶이를 우적우적 먹는 태풍을 중간에 두고 세 녀석이 뭐가 그리도 재미있는 지 계속해서 킬킬거렸다. 떡볶이를 다 먹은 태풍이, 물을 꿀꺽 꿀꺽 마시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자아, 그럼 다 먹었으니 가 볼까?" "어딜?" "어디긴 어디야, 집이지." 태풍의 말에 지옹도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났다. 말은 안 했지만, 떨려 죽겠다. "너 왜 왔냐, 이렇게 왔다 갈거면." 투덜거리는 노란머리 녀석의 말에, 태풍이 커다란 손을 들어 태풍의 머리를 쓱 쓰다듬었다. "얼굴 보러 왔지." 그 말에 더 이상 노란머리도 토를 달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녀석들은 태풍이랑 친해서 잘 모르겠다만, 여전히 자신을 야리고 있는 노란머리의 시선을 견딜수가 없다. "벌써 가겠다는 거냐?" 섭섭하다는 듯 말을 하긴 하지만, 녀석들이 태풍의 어깨를 한번씩 감싸안는다. 이것이 사나이들의 우정이라는 거군. "나중에 또 오마. 심심하면." "위하랑 혁진인 안 볼거냐?" 갈색머리 녀석의 말에, 태풍은 어깨를 들썩였다. "또 올 건데 뭐. 가자, 서지옹." 그 말이 어찌나 반가운지. 지옹은 재빨리 고개를 끄덕이곤 벌써 가게를 나서고 있는 태풍의 뒤를 쫓았다. 순간, 노란머리 녀석의 태풍의 팔목을 꽈악 움켜쥐었다. "너, 잘해라. 저 녀석은 이 인천바닥에서 제일 강한 녀석이라고 이 몸들께서 인정하신 녀석이란 말이다. 알았냐?" "어? 어.." 살기 어린 눈에 얼떨결에 고개를 미친 듯이 끄덕여도, 녀석은 한동안 손을 놔 줄 생각이 없는 듯 했다. "뭐해, 서지옹?" 태풍이 저만치 앞서가다 지옹이 뒤따라오지 않는 걸 깨달았는지 뒤를 돌아보며 외쳤다. "쳇," 노란머리의 녀석이 그제야 손을 놓아주었다. "어? 어..가." 재빨리 태풍이 있는 쪽으로 뛰어가자 그제야 안도의 한숨이 터져나왔다. 배가 불러서 그런지 기분 좋은 듯 눈까지 가늘게 뜨면서 햇살 쪽을 향해 느릿느릿 걸어가는 태풍의 커다란 어깨를 바라보며, '인천에서 제일 강한 녀석..' 이라고 가만히 중얼거려보았다. 어쩐지 가슴이 뛰었다. "그럼, 슬슬 가볼까?" 역전에 다다르자마자 태풍이 말했다. 시계를 보니 벌써 4시다. 한쪽 손을 들어 지옹의 머리를 쓰다듬는 녀석의 손가락은 크고 두툼했으며 따뜻했다. "어? 어.." "혼자 집에 갈 수 있지?" 당연한 소릴 하고 있다. "응." "난 아르바이트 간다. 내일 보자." 손을 흔들며 사라지는 태풍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집에 가도 큰일이고, 학교를 가도 큰일이다. 이 어정쩡한 시간에 뭘 해야 하는지. 에혀-- 하고 한숨을 내쉬다가, 그래도 집에 가야지.. 라며 발걸음을 집 쪽으로 옮겼다. 무슨 변명을 한단 말이냐. 귀에 붕대는 둘둘 만 채 이런 꼴로 집에 들어가면 분명히 발칵 뒤집어 질 게 뻔했다. 게다가 교복에 튀긴 핏.. 자국을 보는 순간, 엄마가 놀라서 기절할 지도 모른다. 다시 한숨을 하아 내쉬곤 버스를 탔다. 어째서 려태풍과 있으면 하루가 이렇듯 파란만장하단 말인가. 덜컹거리는 버스에서 손잡이를 꽉 움켜쥐었다. 뭔가 잊은 것 같은데, 그게 뭔지 떠오르질 않았다. 아주 중요한... 중요하고 굉장히 두려운.... 무언가인데...... 라며 버스에서 내리는 순간, 지옹은 헉 하고 자신도 모르게 한발자국 물러섰다. 이.. 이 녀석이다!! 채관형!! "너 어디 갔다 오냐?" 집 바로 앞에 있는 버스정류장에서 두 손을 주머니에 집어넣은 채 불량한 자세로 한쪽 담에 기대 있는 녀석은 불길한 오로라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 불꽃같은 오로라에 감히 한발자국도 다가가지 못하는 지옹은 한쪽 발을 뒤로 내뺀 자세로 얼어서는 식은땀만 흘릴 수 밖에. "아.. 저기.." "어쭈, 서지옹. 너 진짜 많이 컸다. 학교도 빠지고.. 어디 갔다 오는 거냐고, 응? 말해봐." 싱긋 웃는 그 웃음이 너무나도 불길하게 느껴져 침을 꿀꺽 삼켰다. "말해보라니까.." 제.. 제발 그런 웃음을 짓지 말아줘. 무섭단 말이다. 속으로 눈물을 질질질 흘리며 미친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뭐냐, 지금... 말하기 싫다 이거지?"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이쪽을 흘끔흘끔 쳐다보고 있지만, 그 누구도 도와줄 생각을 하지 않는다. 오늘 살아남을 가능성 제로다. 관형은 갑자기 웃던 낯을 싹 바꾸더니 이까지 갈며 한 발자국 한 발자국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말 안 해?" 어째서.. 아직 수업 시간일 텐데, 이 녀석은 가방까지 들곤 여기 서 있는 걸까. 도대체 자신이 학교 하루 빠진 것 갖고 왜 이다지도 난리를 치냔 말이다. "그.. 그게... 사실은..." 뭐라고 말을 해야 하나. 진짜 말문이 탁 막힌다. 또 려태풍이랑 관련된 걸 녀석이 알게 된다면 이번엔 정말 무사할 리가 없다. 갑자기 손을 확 치켜올린 관형 탓에 눈을 질끈 감고 목을 최대한 움츠렸다. 정말, 이젠 죽었다. "너.. 이게 뭐야?" 난데없이 귓가에 닿는 손길에 한쪽 눈을 슬며시 떴다. 헉, 녀석이 눈 바로 코앞에 있었다. 고막이 터진 귓가를 보고 녀석이 미친 듯이 소리치기 시작했다. "이거 뭐냐고? 누가 이랬어? 어떤 새끼야!!!" 가슴이 벌렁 벌렁하다. "아. 그게..." "씨발, 어떤 새끼냐고!!" 녀석이 한쪽 주먹을 들어 지옹이 서 있던 벽 쪽을 쾅 하고 때렸다. 아무래도 빨리 말 안하면 저 주먹에 죽게 생겼다. "아침에.. (오락실에서) 깡패녀석들을 만났는데, (려태풍이랑) 싸우다가 걔네들이....." ".......거짓말할래?" 제.. 젠장. 태풍과 오락실 얘기를 빼먹고 얘기했더니, 녀석이 정말 화가 나는 지 인상을 팍 쓰며 말했다. 이 녀석은 완전 도사다, 도사. "니가 걔네랑 싸웠을 리가 없잖아. 싸움만 터졌다 하면 쥐도새도 모르게 도망치는 새끼가 깡패 녀석들과 마주쳤다고? 넌 100미터 멀리에서도 깡패처럼 생긴 녀석들은 알아보는 녀석이잖아." 컥. 그.. 그런 의미였냐. 서둘러 재빨리 말을 이었다. "음... 아니야. 걔...네 들이 내 교복을 보자마자 쫓아오더라고... 사실은.... 널 만나러 왔다나 뭐라나... 왜 있잖아. 어제 니가 지태랑 얘기하던 그 녀석... 강민구... 그 녀석이었어." "강....민구?" 지옹의 말에 관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강민구가... 우리 학교 앞까지 왔었다고?" "...응." "그런데 왜 안 찾아온 거지?" ".....그... 글쎄...." 눈알을 왼쪽으로 돌리며 모르는 척 시치미를 뗐다. 식은땀이 등에 흠뻑 배인 듯 하다. "너, 내 눈 똑바로 봐." "어?" 녀석이 난데없이 턱을 움켜쥐고 '내 눈 똑바로 봐' 따위의 소리를 하자 심장이 미친 듯이 두근거린다. 관형의 차가운 눈과 마주치는 순간, '제기랄' 이라는 생각뿐이었다. 눈알이 미친 듯이 떨려왔다. "너 숨기는 거 있지? 그게 다가 아니잖아?" "......뭐........가........" "강민구 새끼를 만났다고 쳐. 그런데 지금까지 뭐하고 있던 거야. 설마 내내 맞은 건 아니겠지. 그렇게 보이지도 않으니까.." "....아.... 병원 갔다 왔는데..." "병원?" 아아, 어째서 이렇게 못 믿는거냐. "한지태..가 입원한 병원 있지? 거기 갔다 왔어. 못 믿겠으면 거기 의사선생님한테 물어봐도 좋단 말이야..." 덜덜덜 떨면서 '설마 묻진 않겠지..' 란 마음에 한껏 소리를 지르자, 녀석이 눈을 번쩍였다. 그때였다. 그 순간, 덩치가 굉장히 큰 사내가 관형의 어깨를 턱 움켜쥐었다. "너, 이 녀석. 너보다 약한 녀석을 괴롭히는 거냐? 너 깡패야?" 그 말에 자신을 노려보던 관형이 고개를 약간 돌려 어깨너머로 자신을 움켜쥔 사내를 응시했다. 아마도 그 간떨어지는 시선에 덩치 큰 사내 역시 놀랐나 보다. 놀랄 수 밖에. 저건 인간의 눈이 아니걸랑. "너.. 너.." "깡패 아니니까 가던 길 가쇼." 그 말에 얼어붙었는지, 사내는 꼼짝도 하지 않은 채 가야 하는 지 말아야 하는 지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젠장, 깡패 아니라니까..." 결국 관형이 거칠게 내뱉자, 사내는 옳다구나 싶었는지, 관형의 팔을 더더욱 꽉 움켜쥐었다. "너, 니가 깡패가 아니면 뭐야, 이 새끼야.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같은 학교 친구를 괴롭혀?" 큰일났다. 사람들이 점점 몰려들기 시작했다. 당황한 지옹은 자신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한발자국 물러나는 스스로를 깨닫곤, '안돼, 이번에마저 이러면 안 되지!!' 라며 속으로 외쳤다. 그냥 놔두면 관형이 자식 엄청 열 받아 폭주할 게 분명했고, 게다가 깡패녀석으로 오인 받을 소지가 다분하다. 사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녀석이 깡패가 아니고 뭐겠는가. 저 녀석이 자신을 괴롭히는 것도 맞고, 녀석이 깡패 짓을 하는 것도 맞는데, 저렇게 당당하게 부정하는 게 진짜 가증이다. 하지만 지옹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사적으로 말려야 하는 이유는, '아저씨와 채관형' - 한번 싸우고 말 관계다. '채관형과 서지옹' - 재수 없으면 죽을 때까지 붙어있게 될 지도 모른다. 아니, 당장 내일 이 사태를 내버려두고 튄다면 그 응징이 백만배는 되돌아 올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녀석이 자신의 팔을 움켜쥔 사내의 팔을 순식간에 역전시켜 꺾어버렸다. "깡패 아니랬잖아. 댁이 뭔데 참견이야, 참견이. 응?"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덩치 큰 사내가 낑낑대자,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아아' 라며 탄성을 질렀다. 모두들 버르장머리없는 10대 소년의 횡포에 당황한 것이 틀림없었다. 이대로 있다간 일이 더 커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재빨리 그 사이에 끼어들었다. "저.. 저기요.." 팔 두 쪽을 모두 채관형에게 붙잡힌 채 끙끙거리던 사내와, 주위를 둘러싸고 '경찰 불러야 하는 거 아니야?' 라던 사람들이 지옹의 목소리에 시선을 돌렸다. "저... 저기, 이 녀석 진짜 친구 맞거든요? 아저씨가 오해하신 거 맞아요." 애써 변명을 하고있는데, 어쩐지 믿어주는 기색이 아니다. 오히려 보복이 두려워 옹호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듯 했다. (사실이다.) 그 말에 어떤 아줌마가, "에구, 학생. 학생은 걱정 마. 이런 녀석들은 혼내줘도 돼. 내 지금 바로 경찰에 전화할게. 응? 아이고, 저런 깡패녀석들 무서워서 내 자식 학교에 제대로 보낼 수나 있나 몰라." 라며 재빨리 핸드폰을 꺼내드는 게 아닌가. 아아, 정말 미치고 환장하겠다.... 무서운 관형의 시선이 재빨리 아주머니의 핸드폰을 노려보는 것이, 아무래도 큰 일이 터지긴 터질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아.. 안돼요..!!" 그 때 였다. "뭐하니, 너희들 여기서?" 낯익은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자 엄마가 장을 보고 오는 중인지 야채가 든 봉지를 들곤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엄마!!" 지옹의 말에 관형이 갑작스레 몸을 휙 풀고는 정중한 자세로 서서 꾸벅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아줌마." "어머, 너희들 지금 뭐하는 거야?" 엄마가 의문이 가득한 얼굴로 바닥에 넘어져 있는 거구의 사내와 관형, 그리고 지옹을 번갈아보며 물었다.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시선을 돌렸다. "어머, 이 학생 어머니 되세요?" 핸드폰을 들고 있던 아주머니가 재빨리 나서서 말했다. "아, 예." 엄마가 고개를 끄덕이며 의아하다는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자, 아주머니의 속사포같은 말이 이어졌다. "저 겉은 멀끔해 보이는 학생이 댁의 아드님을 괴롭히지 뭐예요, 길 한복판에서. 그래서 저 아저씨가 괴롭히지 말라고 그랬더니, 그러는 거 아니라고 박박 우기면서 저렇게 오히려 대들지 않아요!!" 바른 자세로 서 있던 관형은 조금 고개를 숙인 채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고, 엄마는 그런 관형과 아줌마를 번갈아가며 쳐다보다 '호호호' 웃었다. "어머어머, 아주머니가 뭘 잘못 아시나 본데요. 저 아저씨가 잘못 하셨네요. 저 애는 저희 아들하고 중학교 때부터 친구고요. 얼마나 모범적이고 착한 아이인데, 불량으로 오인하시면 안 되죠. 저 애 엄마랑도 제가 잘 아는 사이고요. 오히려 제 아들이 못나면 못났지, 저 애는 절대 그럴 애가 아니에요. 멀쩡히 얘기하고 있는 애를 깡패로 몰아붙이셨으니, 관형이가 화 낼만도 했네요. 오호호호~" 이럴 땐 우리 엄마가 아닌 것 같다. 밝게 웃어대는 엄마의 말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뻘쭘한 얼굴을 했다. 우리의 연기파 배우 채관형은, 다소 억울하다는, 그리고 감사하다는 뜻이 담긴 물기 어린(...) 눈으로 지옹의 엄마를 바라보았다. 그 눈을 보는 순간, 지옹의 마음속엔 가증과 가식이 마구마구 소용돌이 쳤고, 아마도 엄마의 마음엔 가련함과 측은함이 몰아쳤을 터였다. "그런데 지옹이 너, 귀는 왜 그 모양이니? 게다가 교복 꼴이 그게 뭐야? 응? 얘는 도대체 뭐하고 다니는 거야!!" "....." 아무래도 학교에서 전화를 하지 않았나보다. 엄마의 시선이 지옹의 교복에 닿는 순간, 불같이 화를 내기 시작했다. "아무튼 내가 못살아, 너 때문에. 어쩜 가는 곳마다 말썽만 피우니. 그리고, 너는 어떻게 친구가 사람들한테 그런 일을 당하고 있는데 옆에서 멀뚱히 서 있을수가 있어. 응? 니가 친구니? 정말 내가 얘를 어떻게 키웠는지 몰라. 속상해.." 제.. 젠장. 엄마, 정말 친엄마 맞냐고요. 아들이 다쳤는데 아프냐고 물어보기는커녕, 어째서 이런 말을 들어야 하는 거냐고. "관형아. 이런 아들녀석이지만, 잘 부탁한다." 어째서 엄마는 관형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걸까. 물론 관형이 녀석에게도 문제는 있다. 도대체 왜 이 녀석은 주위의 계집애들에게조차 하지 않는 짓거리를 엄마에게 하는 것일까. 녀석이 그 누구에게서도, 심지어는 지 엄마한테도 보이지 않는 특유의 미소를 엄마에게 날리면, 엄마는 거의 실신 직전의 황홀한 얼굴로 '아아, 관형이 너는 나날이 멋지게 자라는구나..' 따위의 말들을 내뱉는 것이었다. 결국 지옹의 방안까지 들어왔다. 어슬렁거리며 벽에 붙여진 사진이며, 책상 위의 소지품들이며를 손가락으로 까딱 까딱 만지작거리던 관형이, 엄마가 과일을 깎아서 갖다 주곤, '그럼, 천천히 놀다가 저녁까지 먹고가라, 관형아.' 라며 말을 마치고 방을 나가기가 무섭게 자세를 바꿔 위협적으로 지옹에게 다가왔다. "너, 그 말 틀림없겠지?" 침대에 앉아있던 지옹은 천천히 다가오는 관형의 검은 오로라에 눌려 몸을 조금씩 뒤로 젖히며 "뭐.. 뭐얼?" 하고 물었다. 이 자식, 정말 왜 이러냐고.. 무섭게 시리. 얼굴이 점점 다가온다고 느낄 때 쯤, 관형이 휙 몸을 돌려 다시금 책상곁에 다가갔다. "병원 갔다 왔다는 그 얘기 말이야. 강민구 새끼 만난 것도 그렇고.. 그럼 그 귀, 강민구 새끼가 한 짓이 틀림없지?" "...응.. 응. 진짜야."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자, 관형은 뭔가를 생각하는 듯한 시선으로 자신을 노려보다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가만두지 않겠어."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리듯 중얼대는 그 말에, 쫄아버린 지옹은 쓸데없이 침대 시트따위를 매만지며 딴청을 부렸다. "아.. 하하... 그.. 근데 밥 먹고 갈거야?" 한참동안 살기만 가득한 채 대화가 이어지지 않자, 결국 생각을 짜 낸 지옹이 억지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지옹의 책상을 가만히 만지며 생각에 잠긴 듯 했던 관형은 그 말에 흘끗 지옹을 쳐다보았다. 그러고보니, 관형이 자신의 집에 왔던 것도 꽤 된 듯 하다. 사실, 관형을 알게 된 건 오래전의 일이지만, 그리고 매일같이 붙어있긴 마찬가지지만, 지옹은 관형을 어느 정도까지 자신이 알고 있는 지 궁금했다. 순간 순간의 태클을 제외하면, 이 녀석과 진지하게 대화조차 나눠 본 적이 없었다. 진지한 대화....라... 서지옹과 채관형 사이에서 가장 어울리지 않는 단어가 아닌 듯 했다. 그런데 갑자기 내가 왜 난데없이 녀석과의 진지한 대화 따위에 고민하고 있는거지? 쓸데없는 생각들을 하고 있자, 관형이 날카로운 시선으로 이쪽을 노려본다. 제길, 말을 하란 말이다, 말을!!! "응.." "응?" ".....밥 먹고 간다고, 너 도대체 뭘 그렇게 골똘히 생각하는 거냐?" "아.. 아무것도..." 고개를 도리도리 돌리며 말하자, 관형은 천천히 다가와 침대 옆에 앉았다. "야." 고요한 적막이 진짜 두렵다. "응?" "너 려태풍 어떻게 생각하냐." 헉. 이.. 이 자식, 혹시 내가 려태풍과 함께 있었다는 걸 아는 거 아냐? 그러니까 난데없이 이딴 질문을 하고 앉아있는 것이지. 스스로가 찔려서 땀을 뻘뻘 흘리며 무슨 대답을 해야 할 지 고민하고 있자, 녀석의 투명하리 만치 까만 눈동자가 이쪽을 관통하는 기분이었다. "뭐.. 뭘 어떻게 생각해?" "그 새끼 어떻게 생각하냐고, 너 말이야." "그냥.." "그냥 뭐?" 그냥 친구지... 라고 말하려는데, 단어 선택에 문제가 있음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친구라 그러면 또 언제봤다고 벌써부터 친구냐 하며 난리칠 게 뻔했다. 입을 다물고 망설이고 있는데, 녀석이 짜증스럽다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제대로 말해라." 아아, 이런 무서운 목소리로 '제대로 말해라' 라고 말하면 그 어느누가 제대로 말 할 수 있겠는가. 마음속으로 흐르는 눈물을 꾹 눌러 참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그냥 아는 녀석이지. 전학생이잖아. 뭐.. 난 아무리 그 녀석이 그래도... 네가 더 좋아." 씨발, 이게 무슨 사랑 고백 같은 말이더냐. 네가 더 좋아.. 라니. 스스로의 어휘력에 통탄하고 있는데, 어쩐일인지 녀석이 말이 없다. 아무래도 주먹을 한 대 날리려나보다. "씨발, 사내 녀석끼리 그딴 계집애 같은 말 쓰고 지랄이야!!!" ....라며 포효할 거라고 짐작한 지옹은 슬금슬금 엉덩이를 옆으로 옮겼다. 하지만 한참이 지나도 말이 없는 통에, 지옹은 쓰윽 시선을 소리 안 나게 돌려 관형 쪽을 쳐다보았다. 얼굴을 살짝 돌리고 있어서 무슨 생각을 하는 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두근 두근 거리는 마음으로 숨을 죽이고 있는데, 녀석이 등을 돌린 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바.. 밥 먹자." 어쩐지 목소리가 흔들린다 싶었는데, 녀석이 성큼 성큼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밥 안 되었을텐데.. 아직은. 밥이 되었음 엄마가 불렀겠지. 어라, 거긴 화장실인데. 저 자식 왜 저래? 우리 집 처음 온 것도 아니면서. 의아한 표정으로 방안에 멀뚱 멀뚱 앉아 있던 지옹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녀석이 화장실로 들어가자 마자 물이 '쏴아' 하고 세면대에 부딪치는 소리가 방안을 울려퍼졌다. 세수를 하는 지, 물이 찰랑대는 소리와 녀석의 약간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물소리가 끊이질 않았고, 10분이 지나서야 녀석이 화장실 밖으로 나왔다. 조금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로 녀석을 쳐다보자,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며 닦는 시늉을 했다. "뭘 봐?" "....아... 아냐." 어쩐지 녀석의 저런 얼굴은 보면 안 될 것 같아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평소엔 살기가 넘치다 못해 흘러내릴 정도로 차가운 얼굴의 녀석이, 조금 얼굴까지 붉히고 있다. 아무래도 차가운 물로 세수했나보다. 얼굴이 빨개진 걸 보면 말이다. "얘들아, 내려와서 밥 먹으렴." 그 순간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식사가 준비되었다는 소리였다. 지옹이 관형을 바라보자, 관형은 재빨리 수건을 올려놓고는 먼저 계단을 내려갔다. 그 커다란 녀석의 어깨 뒤를 쫓으면서도, 어쩐지 껄쩍지근한 마음이 가셔질 줄을 몰랐다. 방금 전에 본 녀석의 얼굴은 죽어도 적응 불가능이다. "잘 먹겠습니다." 어째서 엄마나 이 녀석이나 서로 만나면 가식일까. 엄마는 좋은 엄마의 표본이라는 듯 보글 보글대는 부대찌개며, 평소엔 보기도 힘든 옥수수 참치 부침 따위를 만들어 놓고선 자상한 웃음을 지으며 앉아있었다. 그리고 녀석은 단정하고도 든든한 자세로 앉아 조심스레 꾸벅 인사를 한 채 예의바른 태도로 밥을 먹는 것이었다. "정말 맛있어요, 아주머니." 따위의 말을 서슴없이 건네며 눈이 부실 것 같은 미소마저 짓는 녀석은, 진정한 고수다. "어머, 얘 뭘... 너희 어머니에 비하면 정말 부족하지." "아니예요. 무슨 말씀을요. 저희 어머니껜 죄송한 일이지만, 전 아주머니가 해 주신 밥이 더 맛있어요." 어째서 저런 부끄러운 대사를 아무렇제도 않게 건넬 수 있단 말이냐!! 평소와는 180도 바뀌어지는 녀석의 이중적 모습에 먹던 밥이 쏠릴 지경이었다. 하지만 자주 먹는 것도 아닌데, 열심히 먹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정신없이 옥수수 참치 부침을 젓가락으로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지옹이 해 달라고 하면 매일 '그게 얼마나 번거롭게!!' 라며 소리치던 엄만데.. "오호호, 무슨 소리를.. 그러고 보니 정말 관형인 언제 봐도 늠름하구나. 우리 집의 누구는 매일같이 '엄마, 엄마' 하며 애기 같은데, 정말.. 너희 어머니는 얼마나 좋으실까?" "감사합니다." 입안에 꾸역꾸역 담긴 옥수수와 참치가 넘어올 것 같았다. 갑자기 쏠리는 마음에 허겁지겁 물을 찾아 벌컥 마셨다. "그런데, 너 태풍이라는 애 아니?" 순간, 마시던 물이 식탁에 '푸우' 하고 뿜어져버렸다. 그 말에 예의바른 미소를 지으며 젓가락질을 하던 관형의 안색이 싸악 바뀌면서 정적이 흘렀다. "어머, 얜 정말이지 더럽게 시리!! 이게 뭐하는 거니!!" 엄마가 요란을 떨며 행주로 닦아내는데도, 관형은 얼어붙은 듯 앉아있었다. "....예?" 한참이 지난 후에야 녀석이 되묻자 엄마는 행주로 정신없이 탁자위를 닦으며 말했다. "태풍이라고.. 요즘 지옹이가 친하게 지내는 애인가 본데,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며? 얼마전에는 지옹이가 글쎄, 네 핑계를 대며 걔랑 같이 있었지 뭐야. 지옹아. 넌 어쩜 이렇게 철이 없니? 밥을 먹다 말고 칠칠치 못하게 이게 뭐야, 응? ... 아무튼... 어린 나이에 아르바이트하는 건 대견하긴 하지만, 그래도 질 나쁜 애라면 이 아줌마한테 귀띔해 주거라." 엄마, 본인 앞에서 그런 말 하면 안 되는 거잖아!! 게다가, 관형의 얼굴이 심상치 않게 일그러지는 게 눈에 띌 정도였다. 관형이 움켜쥐고 있던 나무 젓가락이 부들부들 떨린다 싶더니, 급기야는 '툭' 소리를 내며 부러졌다. 제길.. 일회용 젓가락도 아닌데, 어째서 저렇게 쉽사리 툭 부러지는거냐. 그리고 쓰윽 얼굴이 돌려지더니, 지옹과 눈이 딱 마주쳤다. 살벌한 눈동자에 빨려들 것만 같은 공포가 엄습해왔다. 툭 부러진 젓가락을 바라보던 엄마가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어머, 이게 왜 부러지지? 관형아, 괜찮니? 이상하네? 경주 갔을 때 세트로 구입한 건데 참... 참나무로 만들어져서 단단하다고 들었는데 가서 따질수도 없고..." 엄마, 보면 몰라요? 저 자식이 인력으로 부러뜨린 거잖아요. 엄마가 수선을 피우며 다른 쇠 젓가락으로 갈아주자, 녀석은 굉장한 시선으로 지웅을 노려보다가도 고개를 살짝 꾸벅했다. "감사합니다." 철가면으로 둘러 싼 듯 표정없는 얼굴이라서, 도대체가 이 녀석이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알 수가 없다. 허겁지겁 집어먹던 부침도, 이젠 마지막 제사상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하니 입맛이 떨어졌다. 속으로 훌쩍이며 밥알을 깨작깨작 하고 있는데도, 엄마의 이야기는 논스톱이다. "아무튼 그 태풍이라는 애, 얼굴 좀 봐야지. 지옹이가 좀 유별나니? 친구라곤 너 밖에 없는 듯 해서 내심 걱정이었는데, 다른 친구가 생겼다니 어떤 애인지 궁금하네." 아아, 엄마의 저 무신경한 말 한마디 한마디가 살인을 부추기고 있다는 걸 왜 모르실까. 친구가 저 녀석밖에 없던 게 아니라, 저 녀석이 다른 친구를 못사귀게 한 거랍니다. 그러고보니 매번 새학기가 될 때마다 새 친구를 사귀려고 하면, 다른 반임에도 불구하고 쉬는 시간마다 쫓아와 괴롭히던 관형이 떠올랐다. 물론 중학교 3학년 이후로는 지옹이 찾아가게 되었지만. 조금만 늦어도 어찌나 으름장을 내뱉던지, 감히 거역할 수가 없었다. 씨발.. 이 왕따 인생엔 다 저 녀석 책임이 전적이라고!! 하지만 눈이 딱 마주치는 순간 지옹은 숨을 억눌러야만 했다. 허억..!! 저 녀석, 눈에 살기가 있다. 얌전히 앉아 식사를 하는 듯 보이지만, 분명 얼굴은 일그러졌고, 어쩐지 조금만 더 건드리면 이 자리에서 폭발하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젓가락을 깨작이며, 녀석의 동태를 살피느라, 밥이 제대로 넘어갈 리가 없다. 그러나 그 생각은 기우였는지, 식사가 끝날 때까지, 녀석은 여전히 가증이라는 가면을 쓴 채 엄마의 수다에 모두 맞장구를 쳐준다거나, 조용히 듣다가 갑자기 난데없이 환한 미소를 짓는다거나, 따위를 성실하게 하고 있었다. 도대체 엄마에겐 뭐가 숨겨져 있는걸까. 왜 관형은 이렇듯 엄마라면 사족을 못 쓰냐고... 물론 우리 엄마도 마찬가지긴 하지만. "더 놀다갈래? 아줌마는 잠시 요 앞 통장 아줌마네 집 좀 갔다 올 건데.." "아, 갔다 오세요. 있다가 금방 가야죠." 식사를 마치자 엄마가 식탁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그러자 몸까지 일으키며 고개를 꾸벅 숙이며 바른 청소년 짓거리를 하는 것에, 엄마는 '어머, 얘는.. 일어날 것 없어. 호호호..' 라며 문을 나섰다. 이제 이 작고 좁은 집에 관형과 단 둘이다. 허억 허억.. 숨조차 제대로 쉬어지지가 않고, 고막이 윙윙거리며 식은땀은 물 흐르듯 흘렀다. 무언가 생각하는 듯 바닥에 앉아 장판 무늬를 바라보던 녀석이, 갑작스레 시선을 자신쪽으로 휘익 돌렸을 땐, 간담이 서늘해졌다. "내.. 핑계를 대고 려태풍 새끼를 만났다고?" "오...해다, 너. 그거... 그 날이잖아. 그 날.. 너 술 먹고 쓰러진.." '술 먹고 쓰러진..' 이라고 말하자마자, 녀석의 인상이 팍 구겨지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너, 그 날 몇 시에 들어왔어?" "왜.. 왜?" "말 안 해?" "...기.. 기억 안 난다 뭐." 툭 하고 내뱉자, 관형의 인상이 더더욱 험악해졌다. 이젠 이판사판이다. "아아, 몰라, 모른다고!!!! 너 때문에 술 마시고, 너 때문에 그런 일이 생긴거잖아. 누가 거기 가쟀냐? 내가 너 끌고 간 것도 아닌데, 왜 자꾸 나한테 뭐라고 하냐고!!" 솔직히 요 며칠간 다른 때 보다 짜증스러웠던 일들이 있었던 게 사실이었다. 가뜩이나 짜증나 죽겠는데, 녀석이 자꾸 꼬치꼬치 캐묻자 확 올라버렸다. 도대체 그게 뭐가 그렇게 중요하길래.. 내가 지 꺼냐고. 내가 왜 사내녀석 만나는 것도 이렇게 일일이 녀석에게 보고를 해야 하냔 말이다. "너... 지금.." 마음속으로 아우성치던 그 말들이, 새까만 눈동자가 활활타는 듯한 느낌으로 자신을 코앞에서 노려보자 모두 입 속으로 들어갔다. "말 다 했어?" 멱살이 꽉 쥐여졌다. 몸이 확 들리는 듯 했다. 켁켁거리며 발을 바둥대는데도, 녀석은 가차없다. "다시 말 해봐." 음산한 말에 오히려 화가났다. 다른 때 같으면 쫄아서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겠지만, 오히려 녀석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발버둥을 쳤다. "뭐야, 그 눈깔은?" "...큭.. 씨.. 씨....발롬아..!!" 헉, 이게 내 입에서 나온 말이 맞는건가. 말해 놓고도 수위가 너무 지나쳤다는 마음에 눈이 왕방울만해 졌다. 놀란 것은 지웅 뿐이 아니었나보다. 관형은 충격을 받은 눈으로 지웅을 쳐다보다가 툭 하고 멱살을 쥐고 있던 손을 놓았다. 바닥에 쿵 하고 떨어지면서 지웅은 목을 부여쥐고는 계속해서 켁켁거렸다. "쿠.. 쿨럭.. 쿨럭.." "너 지금 나한테 욕했냐?" "쿠.. 쿨럭... 그래. 켁..켁.." 잔기침을 하면서도 당당하게 '그래' 라고 내뱉자, 관형이 거칠게 주먹으로 벽을 내리쳤다. 저 새끼는 툭하면 벽을 치고 지랄이야. "서지옹..." "모.. 몰라, 죽이던지 말던지 니 마음대로 해. 나 진짜 이제 싫다고. 내가 니 꼬붕이냐? 졸업할 때까지 이럴 순 없잖아. 벌써 중학교 2학년 때부터 거의 3년이 넘었다. 지겹다고 이젠.." 입에서 술술 나오는 말에, 관형이 알 수 없는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았다. "지겹...다고 했냐, 너 지금?" ".....그래." 어마어마한 침묵이 흐른다 싶더니, 녀석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고개를 약간 숙이고 있어서,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알 수 없다. "....그거, 려태풍 그 새끼 때문이지?" "...뭐?" "려태풍.. 그 자식이 오기 전엔 그런 말 없었잖아. 그 새끼가 너한테 뭐라 그랬어? 응?" ㅡㅡ; 어째서 모든 잘못은 태풍이 녀석 탓이냐. 이야기가 어째 삼천포로 빠진다고 했다. 관형은 여전히 한 주먹으로 벽을 거칠게 내리치며 태풍이 녀석을 욕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자신이 반항한 것에 충격이 너무 크나보다. 때문에 태풍이 녀석 탓으로 돌리는 터일 터... "내일 만나면 정말 죽여버리겠어." 아아, 안돼. 이를 갈며 가방을 움켜쥐는 녀석 탓에 지옹은 재빨리 소리쳤다. "안돼." "....뭐?" ? "싸우지 말라고. 이제 너 싸우는 거 지긋 지긋 해. 아주... 옆에 있으면 언제 또 무슨 일이 터질까봐 조마조마하다고. 태풍이랑 싸울거면 차라리 날 패라.." 헉, 이런 말이 정말 내 입에서? 스스로를 패라는 말 따위가 입 밖으로 나오다니.. 말 해 놓고 깜짝 놀라서 언제쯤 취소를 해야 비굴해 보이지 않을까 싶어 눈치를 살피고 있는데, 녀석이 기가 막히다는 얼굴로 지옹을 바라보았다. "뭐?" "......" "태풍이 녀석이... 그렇게 좋냐?" "...무슨 소리야?" "...너같이 소심하고 맞는 거 딱 질색인 녀석이 나한테 맞겠다고? 그것도 려태풍 대신에?" 이 새끼야, 그런 뜻이 아니잖아. 앞에 있는 말들 다 싹뚝 잘라먹고 왜 맨 마지막 말만 듣냐고!! 진짜 이젠 아니라고 말하는 것도 지겹다! "그..그래!!" 얼떨결에 그렇다고 소리쳤다. 그러자 녀석이 얼어붙은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씨.. 왜 저런 표정으로 쳐다보는 거야. 어울리지도 않게. "서지옹." 갑작스레 불려진 자신의 이름에 지옹은 움찔했다. 어쩐지 녀석의 목소리가 너무 이상하게 들려와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 자식아. 생각을 해 보라고. 내가 그동안 려태풍을 본 이상, 그 녀석 장난 아니라고. 게다가 그 녀석 형들도 캡빵 센 모양인데.. 잘못 건드렸다가 어쩌려고 그래. 오늘 인천가서 녀석들 친구들 만나고 왔다는 말도 차마 할 수가 없었다. 그랬다간 녀석의 분노 게이지가 백만배는 상승할 테니까. 아무튼, 개인적인 생각에 려태풍과 채관형이 싸우면 채관형이 질 가능성이 컸다. 물론 관형이 이쪽에선 한지태와 쌍두 마차로 불리우고 있다만, 려태풍 그 녀석은 상식을 초월한 괴물이다. 그러면 여태껏 키워 놓은 '괴물'의 이미지하며.. 녀석이 깨졌다는 소문이 돌자마자 저번에 산울에서 그랬듯, 여태까지 관형에게 깨진 학교 녀석들이 우르르 몰려 와 관형을 치려고 할 게 분명했다. 게다가 한지태와 지민우는 입원상태다. 이보다 더 어수선하고 적절한 타이밍이 어디 있던가. 이렇듯 나름대로의 생각을 하는 내 성의를 무시하고, 넌 뭐라는 거냐. "그렇단 말이지?" 방 안에 우두커니 서 있던 녀석이 한참을 그렇게 알 수 없는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몸을 휙 돌렸다. "...간다." 아 씨. 왜 눈물이 나려고 그러냐. 그런 게 아닌데, 저 녀석 분명 오해해도 단단히 했다. 물론 채관형이랑 있으면 마음고생 몸 고생 심하다. 하지만 그동안 쌓인 정이 있는데.. 아니야, 사실 려태풍이 피곤한 새끼긴 하지만, 채관형보다는 덜하다. 저 새끼는 일일이 감정적으로 옭아매려고 하니까 그게 더 싫은 거다. 도대체 사내자식 눈치만 보다간 꽃 같은 마누라가 생길 일도 없을테고,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암울한 역사만 추억할 터였다. 게다가 만약 재수없게도 같은 대학이 된다면...(하지만 비참하게도 내 성적으로 관형이 녀석을 따라잡기란 불가능하다.) 이 얼마나 짜증나는 인생이겠는가. 지웅의 마음속에서 악마들이 속삭이고 있는 걸 아는 지 모르는 지 녀석은 신발을 천천히 꿰었다. 커다란 등을 뒤에서 바라보며, 지옹은 뭔가를 말해야 할 것만 같은 의무감을 느꼈다. 분명 녀석은 꽤 오랫동안 삐질 텐데. 새끼, 보기보다 소심해서 한번 삐지면 감당할 수가 없다. "저.. 저기, 야.. 기다려.." 조심스레 불러도 녀석은 뒤돌아 볼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신발을 다 신은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녀석이 탁탁거리더니 문을 열고 나서려는 듯 한쪽 팔을 내밀었다. 그 모습에 울컥했다. 결국 이런 식이지. 왜 내가 매번 이 녀석의 소심함까지 달래줘야 하는 거냐고. "씨.. 야, 가! 가라고!! 나도 이제 지겹다. 지겨워." 그 말에 녀석이 멈칫한다. "너, 진짜 죽을래?" 으르렁거리면서 돌아서는 녀석의 말에, 흠칫했지만, 이미 뱉어놓은 말이었다. "그... 그래, 죽여봐. 죽여보라고!!" 배를 내밀며 '죽여봐, 죽여봐'를 외치자, 녀석이 황당하다는 시선으로 지옹을 노려보았다. "...씨발... 너 진짜 죽인다." "..주.. 죽여보래도!!!" 계속해서 팔딱대며 소리를 치자, 녀석이 '으이씨' 하며 주먹을 움켜쥐다가도 뭔가를 참는 지 부들부들 떨며 천천히 내렸다. 그 동작에 안심한 지옹은 더더욱 날뛰기 시작했다. "왜, 못 죽이겠어? 엉?" "까불지 마, 서지옹." 사실 많이 쫄아 있다. "내.. 내가 뭘 까분다고 그래?" "...너, 려태풍이 그렇게 좋냐?" 이건 또 무슨 난데없는 헛소리야. "뭔... 내가 언제 녀석이 좋댔어!!" "...려태풍이 전학 온 지 며칠이나 됐다고 벌써 그 녀석한테 완전히 가 버린거냐? 응? 뭐라는 거냐. 남은 기껏 생각해서 말했구먼. 녀석의 이해 할 수 없는 언어들은 정말 흔히 말하는 외계어다. 왜 무든 내용이 꼭 초등학생들처럼 '너 누가 좋아, 내가 좋아?' 따위가 되냔 말이다. 완전히 가 버린다니.. 그게 무슨 뜻이야. 도대체 뭐가 간다는 건데. "그래, 네 녀석이 그렇다는 건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지만... 제길!" 이젠 정말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녀석이 황당한 말을 남긴 채 문을 쾅 하고 닫고 나가버릴 때까지, 지옹은 입을 딱 벌린 채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문이 닫힌 한참 뒤에야 지옹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 채관형... 이... 이 등신 같은 자식아!!!"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황당하기 그지 없다. 아침에 거울을 보며 칫솔질을 하면서도 머엉한 기분이었다. 어젯밤에 너무 어이가 없는 나머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더니 목도 쉬었고, 귀도 윙윙 울리고 온 몸이 쑤신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연고를 귀 근처에 바른 후 교복을 입었다. 잠도 제대로 못 잤다. 자려고 누워서 '쳇 속시원하다.' 라던지, '그래, 네가 이렇게 나오겠다면 나도 이제 쌩 까겠다 이거야.' 따위의 말들을 혼자 중얼중얼 댔지만 그래도 마음이 안 좋은 게 사실이었다. 웬 일로 지각도 하지 않고 학교에 도착하자, 역시나 아이들의 시선이 야릇하다. 의외로, 채관형 그 녀석이 안 와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학교만은 빨리 오던 녀석이, 텅 빈 책상만이 덩그러니 놓여있자 마음이 짠하다. 제기랄. 진짜 마음에 안 든다고. 1교시 수업이 시작되고, 녀석이 올 때가 되었는데도 나타나지 않으니 불안감은 점점 증폭되었다. "어제.. 왜 안 온거야?" 같은 반 지철이라는 녀석이 다가와 물었다. 평소에는 말도 안 걸면서, 관형이 없으니 다가오는 것이었다. 봐라, 채관형. 너 없어도 나한테 말거는 인간 있다. "응? 아.." 그러고보니 이상하다. 학교를 빠지면 재깍 재깍 전화가 올 텐데, 집에서도 결석인 걸 모르다니. 게다가 조례시간 선생님은 관형이 안 온 것만 물었지, 어제 지옹이 왜 학교를 빠졌는지에 대해서는 묻질 않았다. "어제 조금 다쳐서." 귀를 내보이며 씨익 웃자, 녀석이 약간 당황하더니, '아아, 그래?' 라고 중얼거렸다. "어제 너 안 와서, 관형이가 책상 빼라고 애들 시켰어. 그래서 선생님이 너 결석한 지 몰라." "뭐?" ....그렇구나. 어쩐지, 아무도 모르는 척 넘어가는 게 이상하다 했다. 모르는 척이 아니라 정말로 모르는 거였군. 간혹가다 채관형 그 자식은 이렇게 사람을 감동시킨다. 어제같이 그런 일만 없었어도 여태까지처럼 참고 살았을텐데.. 어쩌면 조금 너무했던 게 아닌가 싶어 죄책감에 입술을 깨물었다. 3교시가 시작될 때까지 잠도 오지 않고, 빈 책상에 자꾸 눈에 걸려 흘끔 흘끔 쳐다보았다. 도대체 학교만은 빠지지 않고 나오는 이 모범생 가면을 쓴 불량이 왜 안 나오는거지? 설마, 정말 어제 일 때문인가. 지철의 얘기를 듣고 나니 마음이 굉장히 짠 했다. 아무래도, 어제 그렇게 성급하게 소리치는 게 아니었는데. 그 새끼가 사람 옭아매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평소에 그랬던 것처럼 조용히 입 다물고 있었어야 했거늘.. 하며 후회하고 있는데, 뒷문이 드르륵 우렁차게 열렸다. 세계지리 시간인지라 마녀같은 노처녀인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엄청난 카리스마를 내뿜으며 서 있는 건 분명 그 채관형이다. "너 지금 등교하는 거니?" 마녀가 책상을 지휘봉으로 탁탁 치며 말했다. 관형은 그 말에 불만 가득한 시선으로 마녀를 노려보더니, "예" 라고 당당하게 말했다. 그 거리낌없는 대답에 당황했는지, 마녀가 약간 목소리를 떤다. "어.. 어디 갔다 왔는데?" "잤는데요." 태연하게 녀석이 입을 열자 마녀는 조금 부르르 떨더니 '수업 끝나고 교무실로 와.' 로 일단락 지었다. 그 말에 쳇 하고 투덜거린 채관형은 지옹이 앉아있는 자리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왔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관형이 심상치 않은 시선으로 지옹을 노려보더니, '제길' 이라 내뱉으며 책상을 탁 하고 잡았다. 그리곤 잡은 책상을 지옹에게서 뚝 떨궈서는 드르르륵 옆으로 질질 끌고 가는 것이었다. 책가방을 내려놓고는 그대로 고개를 묻는다. 물론 지옹의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린 채였다. 저건 암만 봐도 어린 녀석의 투정이요, 삐진 행위였다. 저.. 저 소심한 자식 같으니. 정말 꼴불견이라고, 알아? 이 자식아!! 네 덩치를 생각하라고!! 니가 이렇게 굴면 내가 가서 미안하다고 해야 하냐? 잠시나마 죄책감을 느꼈던 지옹은 분노가 부글 부글 끓는 것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지옹도 마찬가지로 '쳇!' 하고 내뱉은 후 책상에 얼굴을 묻었다. 지옹과 관형 주위의 반경 2미터 녀석들은 숨조차 쉬지 못한 채 그런 이상한 광경을 모른척 해야만 했다. 녀석이 말을 안 건다. 심지어는 매일같이 2교시가 끝나면 곧장 달려가는 매점에도, 같이 가자는 말을 하지 않는다. 아니, 2800원 어치의 햄버거와 콜라를 사오라고 2000원 주는 그 못된 짓조차 하지 않는다. 사태가 일주일이 지났을때야, 지옹은 뭔가 심각하게 틀어졌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깨달았을 땐 이미 늦은 듯 했다. 녀석은 시종일관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을 무시했고, 때문에 말 걸기가 쉽지 않았다. 처음엔 자신도 화가 많이 났다는 걸 보여주려던 지옹은, 시간이 지날수록 예전처럼 슬그머니 다가갈 수 없음을 느끼곤 심히 울적해졌다. 탕!!! 아니, 도대체 왜 울적해 져야만 하냐고. 저딴 녀석, 친하게 지낸다고 즐거울만한 그런 놈이 아니지 않냔 말이다. 문을 드르륵 열고, 초조한 지옹과는 반대로 여유롭기 그지없는 발걸음으로 들어온 관형을 노려보며, 지옹은 중얼댔다. 이젠 눈이 마주쳐도 별반 표정도 없고, 그냥 무시를 때리는 게 고작이다. 으드득 이가 갈릴 것 같았지만 참았다. 꼭 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태풍이 녀석은 점심시간마다 찾아오긴 했지만, 요즘 뭔가가 바쁜 지 밥을 먹자마자 사라지곤 했다. 녀석이 찾아 올 때마다 다행히 관형이 자식이 교실을 비운 상태였지만, 그래도 마주칠까봐 조마조마했었다. 분명 채관형 성격에, 태풍과 마주치면 어떤 흉악한 짓을 해댈 지 알수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그 날의 말이 먹힌걸까? 관형은 태풍에게 갚아야 할 빚이 있다고 생각 할 게 분명했지만, 그래도 싸움을 건다거나, 시비를 붙인다거나 하는 짓은 없는 듯 했다. 좌우지간, 태풍마저 제대로 상대해주지 않는 지옹은, 반에서 왕따나 다름없었다. 눈치 빠른 아이들이 관형과 지옹이 싸웠다는 걸 알자마자 지옹에게 살갑게 대한다거나, 지옹처럼 소심하고 음침한(..) 녀석들은 다가와 말을 건다거나 했지만, 거기까지. 지들도 관형의 눈치가 보이는 지 결정적인 순간엔 꼭 발을 빼는 것이었다. 때문에 체육시간 때 이동한다거나, 매점엘 간다거나, 학교가 끝나고 집에 간다거나 할 때 지옹은 늘 혼자였다. 괜찮다!! 이 몸은 잡초같은 인생이란 말씀이시다!! 주먹을 불끈 움켜쥐며, 지옹은 속으로 외쳤다. 질 줄 아냐, 지까짓 것에. 이젠 정신력 싸움이라고.. 채관형, 니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두고보자....... 라지만, 지옹은 그토록 웬수였던 채관형이 자신에게 말을 걸지 않는다는 것이 오히려 자신에게 편안한 인생임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3년이 넘는 기간 동안이나 당해와서 그런걸까? 지옹은 이제 태클 없는 인생이 불편할 경지에 오른 것이었다!!! (빵빠방~!!) "야아~ 1반 전학생 있잖아. 려태풍!! 걔 잘하면 정학이나 퇴학 먹을 지도 모른대!!!" 관형이 자리를 비운 시간, 갑자기 소식통이라 불리우는 녀석이 굉장한 속도로 뛰어와 소리쳤다. 그 외침에, 아까의 결의는 다 어디로 가고 수업시간의 연장으로 연필을 쥔 채 얼어붙은 자세로 졸고 있던 지옹은 깜짝 놀라 책상에 머리를 박을 뻔 했다. "뭐? 왜?" 려태풍이 전학온 지 채 10일정도 밖에 안 되었지만, 녀석은 학교의 유명인사였다. 커다란 키에, 전학 첫날부터 4인조 양아치들을 박살내지 않았나, 그 다음날은 5인조 일진 패거리들. 그 다다음 날엔 교도소를 들락날락했던 강민구까지. 한간에 들리는 소문으론, 태풍에게 그렇게 얻어맞았던 강민구는, 팔이 부러져 깁스를 한 상태에서 채관형을 만나 이빨이 부러진 건 기본, 어깨 탈골에, 다리뼈엔 금이 가고 한쪽 고막은 터졌다는 얘기가 있었다. 강민구를 패는 채관형은 거의 인간의 형상이 아니었다고 하니, 주위에 있던 강민구 측근 녀석들까지 모두들 도망가지 못하고 강민구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게 맞았다고 한다. 때문에 입원해서 아직도 퇴원하지 못한 - 지옹 생각엔, 이 것에도 뭔가 비리가 있는 듯 했다. 지옹이 녀석들을 봤던 그 날, 그들은 거의 멀쩡하게 느껴졌었기 때문이다. - 한지태와 지민우는 둘째치고, 채관형과 려태풍 중 누가 더 세냐.. 따위의 수군거림이 끊이질 않고 있었다. 아아, 불안하다고. 언젠가는 이 녀석들 둘이 싸워야 하는 건 불보듯 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이 앞에서 려태풍이 정학이나 퇴학이라니. 이게 다 무슨 소리냐. "걔 밤에 호빠 같은데서 아르바이트하는 거 걸렸대. 누군가가 학교에 찔렀다고 하던데?" "뭐어? 호빠?" "근데 호빠가 뭐하는 데냐?" 그러게, 호빠가 뭐하는 데냐. 호프집을 요즘은 호빠라고 하나보지? "왜 있잖아.. 남자들이 돈 많은 여자들한테 술 따르고 하는데.." "뭐어? 그런 곳에서 일했단 말이야? 려태풍이?" 뭐어어어? 말도 안 돼. 그 녀석이 그런데서 일했단 말이야? 어느새 호프집이 호빠로 변해버렸다는 걸 알 리 없는 순진한 서지옹은 귀를 열심히 까딱이며 놀라움을 멈추지 못했다. "왜 보석 엄청 걸친 뚱뚱한 아줌마들 상대로 술 따르는.. 게다가 우리 형 말로는 엄청 야한 게임도 하고, 잘하면 여자처럼 2차도 나간다더라고.." 목소리를 낮추며 소근대는 녀석의 말에 또한번 놀란 지옹은 얼어붙어 버렸다. 이렇고,(자체 상상) 저렇고(이것도 알아서 상상) 한 아줌마들에게 그러그러한(이하 심의불가) 짓을 한단 말이냐, 그 려태풍이??? 놀란 지옹은 멍청히 얘기를 듣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곤 번개같은 속도로 1반에 달려갔다. 어떻게 하냐, 려태풍. 이 못난 자식. 돈이 없으면 없다고 할 것이지(해 봤자, 뭘?), 아무리 그래도 그런 곳에서.. 크윽..!! 마음속의 눈물을 휘날리며, 지옹은 절망의 포즈로 1반 뒷문을 드르륵 열었다. 5분 후. "아아, 그거 호프집이라고.. 어떤 녀석이 이상한 소문을 퍼뜨렸는 진 몰라도, 호스트 바 같은 데서 내가 왜 일을 해?" ...라고 매점옆에서 태평하게 밀키스를 마시며 헤헤거리는 태풍의 말에, 지옹은 뻘쭘함을 금하지 못한 채 요구르트를 쪽쪽 빨고 있었다. "야, 그렇지만 야간 알바는.. 게다가 호프집은 미성년자가 드나들 수 없는 곳이기 때문에.. 분명히..." "뭐, 그렇네. 좀 꼬였어, 일이. 어떤 녀석이 불었는 지 몰라도 잡히면..." 태풍이 손을 번쩍 들어올리더니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죽~어." 녀석의 말에 어쩐지 채관형의 얼굴이 스쳐지나갔다. 아니야,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그 녀석이 그럴 리 없어. 아무리 싸가지 없고, 재수없고, 악마 같은 잔꾀의 소유자라지만........ ...까지 생각하던 지옹은 분명, 채관형이라면 그러고도 남을 녀석이라는 현실에 괴로워졌다. 그래, 그 녀석이라면 충분하지. 거기까지 도달하자, 못된 채관형이 못 견디게 싫어졌다. 아무리 그래도 3년을 넘게 알았는데, 이 이상 최악으로 평가하긴 싫었다. 하지만 분명히 그 녀석이라면 불고도 남을 녀석이라고. 며칠 전 그렇게 싸우던 날, 문득 녀석이 '죽여버리겠어, 려태풍!!' 따위의 말을 내뱉았던 걸 떠올린 지옹은 요구르트를 한쪽 의자에 놓곤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아아, 채관형. 너 진짜 나쁜 새끼다. 도대체 왜 그런 짓을... "그러면 너 어떻게 해? 정학이나 퇴학이라는데..." 조심스레 물어보는 지옹의 말에, 태풍은 답지 않게 침울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게..." 큰 덩치의 무적인 녀석이 답지 않게 큰 덩치를 부르르 떨며 암울한 표정을 짓자, 지옹은 안타까움에 눈물이 다 날 것만 같았다. 그래도 유일하게 채관형 눈치를 살피지 않고 나를 진심으로 대해 준 녀석인데. 이 녀석마저 학교를 떠나면 지옹은 이제 무슨 낙으로 학교를 온단 말인가. "태풍아, 걱정 마. 다 잘 될거야. 내가..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널 퇴학시키지 못하게 최선을 다 해 볼게..!!" 주먹을 불끈쥐고는 태풍의 등을 꽉 껴안으며 지옹이 외치자, 태풍은 약간 당황스러운 지 몸을 뒤로 빼서 지옹의 열혈 포즈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곤 우울했던 표정을 순식간에 즐겁다는 듯한 얼굴로 바꿔버린다. "헤에, 너..." "...응?" "정말 좋은 녀석이구나. 역시..." 녀석의 커다란 팔이 지옹의 평균의 몸을 꽉 껴안자, 지옹은 숨이 가빠졌다. 아아, 이 사내들의 우정 같은, 청춘 학원물 같은 포즈로 태풍과 껴안고 있는 자신이라니. 감히 꿈에서나 조그맣게 꾸었었던, 크게 꾸면 채관형이 다가와 악마같은 모습으로 으름장을 넣었던 그 남자들의 우정이 현실로 다가오는 순간, 지옹은 너무나 행복해졌다. "걱정마, 다 잘 될 거야. 내가 있잖아." 열심히 태풍의 커다란 등을 손으로 두드리며 지옹이 말하자, 태풍은 몸을 조금 떨었다. 순간 지옹은 감동의 물결에 빠져버렸다. 아아, 이 녀석이 내 말에 감동해서 울다니. 남자답게 모른 척 해 줘야겠지? 지옹은 몸을 휙 돌린 채 태풍의 연약(..)한 모습을 보지 않으려 노력하며 자신의 반 쪽으로 발걸음을 저벅 저벅 옮겼다. 조금 걸어가던 지옹은, 이 정도 거리에선 창피하지 않겠지.. 라고 마음대로 생각해 버리곤 여전히 등을 돌린 상태에서 이렇게 말을 했다. "태풍아. 내가 널 지켜줄게. 걱정하지 마." 주먹을 불끈 움켜쥔 지옹은 파아란 하늘을 올려다보며, 티브이에서 나올 때마다 그토록 염원하던, 대사를 자신이 했다는 그 자체에 열광하며 교실로 재빨리 뛰어갔다. 배를 움켜쥐고 끅끅거리며 웃던 태풍은, 지옹이 사라지자 큰 소리로 박장대소하기 시작했다. "아아, 정말 귀여운 녀석이라니까.." 눈물까지 훔치며 중얼거린 태풍은 기운차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아, 그럼, 저 녀석의 성의도 있는데.. 죽을 각오를 해 볼까..?" 문제는, 3층 복도 창문에서 이들의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던 한 녀석이 있다는 사실을, 태풍과 지옹 모두 눈치채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창문 옆에서 손가락을 꽈악 움켜쥔 채 그들의 모습을 노려보던 녀석은, 지옹이 태풍을 껴안는 장면에선 저도 모르게 피가 날 정도로 주먹을 움켜쥐었다. 음산한 얼굴로 내려다보던 그 녀석은, 지옹이 감동의 물결에 휩싸여 재빨리 건물안으로 뛰어오자마자 몸을 휙 돌려 자신의 반으로 걸어 들어갔다. 콰앙--!!!! "시끄러워!" "허..허억!!" 교실에 도착하자마자, 녀석이 한 짓은 즐겁게 웃고 떠들며 얘기하고 있던 녀석의 책상을 발로 거칠게 쓰러뜨린 일이었다. 겁에 질려 벌벌 떨고 있는 놈을 무시한 채 자신의 자리로 걸어 들어가 앉은 녀석은 굉장한 분노의 기운을 내뿜으며 지그시 칠판을 노려보았다. 그 엄청난 오로라에 반 아이들 모두 순식간에 입을 다문 채 열심히 책만 바라보았다. 제발 학년이 바뀌어 이 녀석들과 다른 반으로 갈라져야 제 명에 살리란 생각에 모두들 속으로 울음을 삼켜야만 했다. ?? 벅찬 가슴을 부여쥐고 교실로 들어온 지옹은, 모두들 너무 열심히 공부하는 듯한 모습에 혹시 선생이라도 들어온 게 아닐까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빈 교탁만이 덩그라니 놓여있을 뿐이었다. 어쩐지 부자연스러운 아이들의 모습에 조금 고개를 갸웃거린 지옹은 책상에 비스듬히 앉아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관형과 눈이 마주치자 자신도 모르게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녀석의 눈동자가 죽일 듯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저 포즈라니. 덤벼, 이 씨발새끼야.... 라는 포즈로 주먹을 꽉 움켜 쥔 채 이 쪽을 노려보는 눈동자가 심장을 찌를 듯 날카롭기만했다. 이런 녀석의 분노의 원인이 자신이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하는 지옹은,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살포시 자리에 앉아 주섬주섬 교과서를 들추는 시늉을 했다. 다른 땐 몰라도 저런 채관형을 건들면 뼈도 못 추린다. 조금 있지 않아 자신을 향해 저벅 저벅 다가오는 슬리퍼 소리에 침이 꼴깍 넘어갔다. 아, 이젠 죽었구나.... 싶은 마음에 눈을 질끈 감았을 때였다. 갑자기 다른 반에서 엄청난 고함소리가 들려오더니, '와아--!!' 하는 함성소리가 전 교실에 메아리쳤다. 침묵하며 눈치를 살피던 아이들이 천천히 조심스레 엉덩이를 들어 창 밖을 바라보다간 허겁지겁 창문쪽으로 다닥다닥 붙어버리는 것이었다. "야아.. 저것 봐. 굉장하지 않아?" "무슨 보디가드에 나오는 장면 같은데?" 신이 나서 떠들어대는 아이들의 목소리에 지옹도 천천히 관형의 눈치를 살피다가 엉덩이를 빼곤 창문쪽으로 다가갔다. 와아. 정말 대단한 풍경이 운동장 쪽에 펼쳐지고 있었다. 까만 승용차 몇 대가 학교 앞에 멈춰지더니, 거기에서 검은 옷에 영화에서만 보던 이어폰 같은 것과 선글라스를 낀 남자들이 우르르 나와 중앙에 있는 까만 자동차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자, 검은 양복에 굉장히 멋진 남자가 천천히 나른한 동작으로 나오더니, 학교를 눈으로 한번 훑어보는 듯 올려다보는 것이었다. 누구지? 연예인인가.. 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양복을 입은 다른 남자들에게 뭐라고 지시를 내리는 듯 했다. 그리곤 저벅 저벅 유연하고도 재빠른 동작으로 학교안에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누.. 누구야?" "모르겠어. 조폭인가?" "뭐야, 그럼 우리학교에서 두사부일치(..) 따위를 찍는거야?" "괴.. 굉장하다." "저 차 봐. 저것들 메르세데스 벤츠라고. 게다가 중앙의 저 차는 차를 아는 이라면 누구나 로망!! 이라고 외칠만한 롤스로이드다!!" 순식간에 애들이, '정말?' 이라며 더더욱 아우성치며 창가에 몰려들었다. 뭐가 뭔지 모르는 지옹은, 다만 굉장한 풍경임이 틀림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조용, 조용. 다들 조용히 못해?" 언제 반으로 들어오셨는지 화학선생이 교탁을 지팡이로 내리치며 소리쳤다. 덕분에 채관형의 마수에서 벗어난 지옹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자기 자리로 가서 앉았다. 엄청 열이 받는 듯한 얼굴로 이쪽을 노려보고 있는 채관형의 얼굴이 안 봐도 훤했지만, 별로 저 녀석 따위와 얘기를 나누고 싶은 심정이 아니었다. 사실, 두렵기도 하지만. 어찌되었던 태풍의 일을 학교에 이른 녀석이 채관형이라는 확신이 더더욱 깊어가자 그 마음은 점점 더 깊어져 갔다. 쳇, 두고보라고. 이젠 정말이지 이 쪽에서 너 따위 사절이야. "그거 아냐? 아까 그 남자 말이야. **그룹인가? 거기서 왔대." "뭐? **그룹? 어쩐지.. 굉장하다 했어, 그 차하며.. 근데 거기서 왜?" "그게 말이야. 려태풍 일로 온 거란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화장실로 도망쳐버린 지옹은 문을 꼭 걸어 잠그고 변기에 앉아 몸을 덜덜덜 떨고 있었다. 그런데 밖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들이 심상치 않다. 려태풍, 너 도대체 또 무슨 일을 저지른거냐. "려태풍? 1반 그 녀석?" "응, 그 녀석 이번에 호빠에서 일하다가 걸렸잖아." 호빠가 아니란 말이다, 호빠가!! "그래서 그 녀석 담임이 출석부에 적힌 집으로 전화했는데, 그게 **그룹이었대." "뭐어? 그럼.. 저 녀석 **그룹 아들이란 말이야?" "아니, 아들이 아니라.. 넌 티브이도 안 보냐? **그룹 사장은 고작 30대 미혼이란 말이다. 게다가 **은 **당 의원 총수 아들이 경영하는 그룹이잖아." "어, 진짜? 근데 그게 무슨 소리야." "멍청아, 그러니까 려태풍 아버지가 **당 총수고, 아까 본 그 사람이 **그룹 사장이자 려태풍 형이라는 얘기지." "말도 안 돼!! 거짓말." "아냐. 분명해. 내가 예전에 잡지에서 읽은 적이 있는데 **그룹은 절대로 가족사를 노출하지 않기로 유명하대. 집안 자체가 엄청 빵빵한가 보더라. 자식이 사내만 일곱이 있는데, 첫째가 **그룹 사장이고, 둘째가 의사에다가 셋째는 외교관, 넷째는 소설가에.. 너 '금단의 사과' 쓴 작가 알지? 김지우라고.." "응. 근데 성이 틀리잖아." "짜샤, 그게 가명이라는 거지. 아무튼 그 집안 사람들이 다 돈 엄청 벌고 굉장하기로 소문났었어." "그러니까... 그럼..." "내 생각엔 막내가 려태풍인 것 같아. 아니면 막내에서 두 번째라던가.. 내가 읽었던 게 몇 달 전인데, 그 때 10대인 자식은 딱 두 명이라고 했거든. 게다가 엄청난 말썽꾼들이래. 둘 다." "어쩐지, 그 녀석 심상치 않다고는 했어." "근데 조금 이상한 건 말이야. 왜 그런 집안 녀석이 아르바이트 따위를 하다가 걸린 거지? 돈을 벌 필요가 없지 않아?" "글쎄.... 그건 진짜 미스테리네.." ....미스테리인 건 이 쪽이라고. 려태풍이 그렇게 굉장한 녀석이였단 말이냐? 워낙 녀석의 파워는 굉장하다고 생각하고 있긴 했어도, 집안마저 그렇게 빵빵했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100원 쓰는 것에 선심 쓴 척 하던 태풍의 얼굴이 떠올랐다. 알바해서 먹고살아야지.. 따위를 한다거나, 빌어먹을 영감이 돈을 안 줘서.. 라고 내뱉던 태풍의 말들이 귓가를 스치는 듯 했다. 아아, 믿을 수 없어. 믿겨지지 않는단 말이야. 머리를 싸매고 있는데, 누군가 지옹이 앉아있는 문을 쾅쾅 두드렸다. 얼떨결에 문을 탁 열어버린 지옹은 눈 앞에 무시무시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서 있는 채관형의 악마같은 표정에 놀라 변기에서 떨어질 뻔 했다. "서지옹...." 채관형이 느릿하게 한마디 내뱉자, 화장실에 있던 녀석들이 우르르 화장실 밖으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아아, 제발.. 제발 날 두고 가지 마아아~!!! 하지만 어느 새 화장실엔 지옹과 관형을 제외하곤 개미새끼 한 마리조차 보이지 않게 되었다. "왜...왜?" 변기 밑면을 꽉 움켜쥐고 부들부들 떨며 묻자, 녀석은 음산한 미소를 지었다. 제.. 젠장. 눈이 아니잖아, 눈이!! 그저 입 가장자리만을 조금 올린 채 먹이를 노리는 야수마냥 다가오는 채관형은 굉장히, 굉장히 무시무시하다. 아무래도 려태풍의 그 얘기를 들은 듯 했다. 하긴, 가뜩이나 눈에 밟히는 녀석인데, 그런 빵빵한 집안 자식이라니.. 열 받은 채관형의 마음을 어쩌면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려태풍 그 녀석 때문에 그러냐?" 지옹의 물음에, 녀석의 눈이 조금 커졌다. 뭔가 기분이 나쁜지 입술을 꽉 깨물더니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알고는 있군." 역시나.. "역시.. 들었냐?" "...하, 들었냐고? 이 두 눈으로 직접 봤지." 아, 그렇습니까? '그렇구나..' 라고 조그맣게 중얼대자, 녀석의 인상이 더더욱 굳어졌다. "너, 내가 봤는데도 아무렇지 않냐?" 뭐 네 녀석이 어떻게 폭주할 지 두렵긴 하지만.. "나랑은 상관없잖아." 우린 지금 냉전이라고, 이 자식아. 하지만 지옹의 말에 녀석이 주먹을 꽉 움켜쥔다. ".....말 다 했냐?" 쫄아버린 지옹은 천천히 변기에 몸을 묻었다. "뭐.. 뭐 소.. 솔직히 너랑도 상관없잖아.. 그.. 그게 뭐 그리 대수라고... 그 녀석이...부... 읍!!" ...자라고 해서 니가 걜 그냥 냅둘 놈이냐... 라고 말을 하려는 순간, 녀석이 지옹의 멱살을 꽉 움켜쥐었다. "...너, 진짜 말 다 했냐." 진짜, 남은 기껏 지 생각해서 말 해줬더니, 뭐라는 거냐, 이 자식. "그.. 그래, 다 했다. 나름대로 생각해서 말 해줬구만...컥!!" 말을 하는 도중에 멱살을 잡은 손의 힘이 더더욱 거세졌다. "너..." 이빨 사이로 내뱉듯 녀석이 으르렁댔다. "내가.. 정말이지 너 못 팰 줄 아냐..." 아냐, 아니야. 니가 나 한 주먹에 팰 수 있다는 걸 내가 왜 모르겠어. 어째서 그런 이상한 질문을 하는 거냐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겁에 질린 얼굴로 고개를 가로 저으려는데, 녀석의 주먹이 부르르 떨리더니 뒤로 빠졌다가 순식간에 코앞으로.. 으악!! 눈을 질끈 감은 지옹은 고통이 곧바로 따르지 않자 눈을 슬며시 떴다. "제기랄!!" 녀석이 주먹으로 지옹의 머리 바로 옆의 화장실 벽을 내리치자, 지옹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저 주먹에 한방 맞으면 끝이다. "아아, 정말 돌아버리겠다고.." 뭔가 심란한 말을 내뱉은 녀석이 지옹의 멱살을 꽉 잡고 있던 손을 탁 하고 놓더니 저벅 저벅 몇 걸음 걸어, 창문 옆에 서서 거칠게 머리를 흔들었다. "돌아버리겠어.." 혼자서 뭔가 중얼 중얼대는 녀석 탓이 변기에 주저앉은 채 나가지도 못하고 녀석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만 보았다. 그때, 쉬는 시간이 끝나는 종소리가 들려왔다. 교실에 가야 하는데.. 속으로 중얼거려봐도, 다리에 힘이 들어갈 리가 없다. 화장실 창문께로 스며드는 햇살을 맞으며 뭔가 혼란에 빠진 듯한 채관형의 표정은 가관이었다. 저렇게 진지한 표정으로 고뇌하는 인간 채관형을 본 적이 없는데. 무엇 때문에 저런 건지.. 아아, 역시 려태풍. 가만히 태풍의 이름을 중얼거린 지옹은 천천히 변기에서 일어섰다. "관형아.. 종 쳤는데.." "......" "관형아?" "......너 먼저 들어가." 어쩐지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관형이 말했다. 지옹은 과연 이 분위기가 혼자 들어가도 되는 분위기인 지 가늠해보기 위해 관형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하지만 녀석은 혼자만의 세계에 빠진 듯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창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햇살에 투영된 녀석의 새까만 눈동자가 어쩐지 더 이상 건드리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에 조용히 뒷걸음질 쳤다. 정말 이상하다. 채관형, 저 녀석이 요즘 답지 않게 진지해 졌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태풍이 그렇게 좋냐느니, 어떻냐느니.. 라는 이상한 질문을 하지 않나, 툭하면 저렇게 무서운 표정을 지으며 쥐도 새도 모르게 다가와 위협을 하지 않나. 정말 사상이 독특한 녀석이라고 생각하며 교실로 향하는데, 어쩐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와 귀를 가만히 기울였다. 계단 쪽에서 나는 소리였다. ".....잘못했어." "...도대체...." 아, 역시나 려태풍의 형이었나 보다. 아까의 양복 입은 사내가 려태풍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게다가.. 믿어지지 않게도, 려태풍은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잘못했다고 빌고 있었다. "알면 다행이지." "...혀엉..." "일어 나." 아아, 저 녀석이 저렇게 개 끌리듯 일어서는 모습이라니. 태양형님의 무시무시한 발차기에도 바락바락 대들던 것을 생각하면, 완전히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그렇다면 첫째형은 얼마나 세다는 거냐.. "앞으론 돈이 없으면 없다고 하고." 들으면 들을수록 매력적인 목소리다. "....응.." "아버지가 그런 조치를 취한 지도 몰랐다, 나는." 어쩐지 내면의 분노가 섞인 말투였다. ".....그거야, 형이 알면..." "아버지께는 내가 잘 말씀드리마." "......" "그러니 앞으로 두 번 다시 이런 짓, 저지르지 마라." ".......응...." "난 ?이만 바빠서 가 보마." 태풍의 어깨를 탁 치고 저벅 저벅 걸어가는 태왕형님의 뒷모습을 보며 지옹은 입을 따악 벌렸다. 저 관계, 어쩐지 어디서 많이 보던 관계 같다. 그렇다. 태풍과 태왕형님의 관계는 마치 지옹과 채관형의 그것과 아주 비스무리했다. 태왕형님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시무룩하게 서 있던 태풍이, 지옹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반짝반짝하게 빛이 날 정도로 변했다. "서지옹~!" "태.. 태풍아..." "수업 안 들어가고 뭐하냐?" "아아, 난... 그게...." 손가락으로 애꿎은 머리카락만을 계속해서 난감하게 쓰다듬자, 태풍의 지옹의 팔을 꽈악 움켜쥐었다. "잘 됐다. 혼자 가기 뭐했는데.." "뭐? 어.. 어딜?" 어쩐지 악동의 미소를 짓고 있던 태풍이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어디긴, 밖이지." 어째서 이 녀석은 이렇듯 놀기 좋아하냔 말이냐. 공부는 하는거냐. 이 자식아. 손을 잡힌 채 질질 끌려가던 지옹은 한적한 공원 벤취에 태풍이 타악 하고 주저앉자 머리를 끌어안고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은 마음이었다. 하늘은 청명하고, 바람은 서늘했으며, 새마저 지저귀고 있었다. 한참을 앉아 기분좋은 얼굴을 하고 있던 태풍에게, 지옹이 조심스레 물었다. "너.. 정학은 어떻게 됐냐?" "...없던 일로 됐지." "와, 다행이다." "...." 지옹이 눈에 띄게 기뻐하는데도, 태풍은 아무렴 어떻냐는 심드렁한 얼굴로 하늘을 올려보고 있었다. 얌전히 있던 지옹은 입이 근질거리는 것을 참지 못하고, 아까전부터 묻고 싶었던 것을 물어보기 시작했다. "근데... 너희 아버지가.. 정말 **당 총수가 맞아?" "....그렇지 뭐." 녀석이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럼 아까 본 사람이.. 너희 큰 형? **그룹 사장이라는 것도..?" "...그게 중요하냐?"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기가 죽은 지옹은 고개를 조금 떨구곤 발끝으로 바닥을 톡톡 찼다. 중요하진 않지만, 대단하잖냐. 니네 셋째형이 외교관이고, 넷째형이 그 유명한 소설가 김지우라면 더더욱 그렇겠지만.. "원래는 칠형제가 아니었어." 녀석이 조금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응?" "...원래는.. 칠형제가 아니었다고..." 그.. 그럼 혹시.. -넌 주어온 자식이냐? 라고 물어보려다 입을 다물었다. "막내 여동생이 한 명 있었어." ".....?" "나랑 두 살 차이였는데.. 내가 8살, 태림이가 - 그 녀석 이름이었어 - 6살 되던 해 죽었어." ".!!" "그때까지 우리 집은 지금처럼 잘 살지도 않았고, 아버지는 무슨 무슨 의원에 출마했는데, 몇 번이나 낙선하기만 하다가 간신히 당선된 풋내기 시골 의원이었지. 내리 물려받는 옷도 싫고, 형제들도 다 싫었어. 대가족도 싫었어. 그리고 막내 태림인 특히 정말 귀찮았어. 태림이가 귀찮아서 같이 놀자고 졸졸 쫓아다니면 맨날 도망 다니곤 했지. '오빠, 뭐 하자, 오빠 이거하자, 오빠 나도 같이 놀래..' 라고 종알대는 계집애가 얄밉고 다 귀찮았어. 난 매일 발로 퍽퍽 때리면서, 태림이는 공주님처럼 오냐 오냐 하는 형들도 마음에 안 들었지. ? 그런데도 무슨 귀찮은 일만 있으면 다 나한테 떠 맡겨서 늘 불만이었거든." "뭐, 그날도 친구 집에서 놀기로 했는데, 그 녀석이 자기도 데려가 달라고 하도 조르는 탓에 화가 난 상태였어. 친구 집에 가서도 신경이 쓰여서 재미있게 놀지도 못하고, 그래서 심통을 부리며 집에 오는 길이었지." "난 그렇게 화가 나 있는데 태림인 좋아 죽겠다는 듯 길가에 핀 꽃을 보면서 깔깔대지 않나, '오빠, 오빠 이것좀 봐.' 라며 귀찮게 종알대지 않나.. 그래서 더더욱 얄미워졌어." "그러면 안 됐는데, 나는 태림이랑 같이 가기 싫어서 일부러 태림이가 꽃에 신경 팔린 틈을 타 뛰기 시작했어. 어차피 길도 알고 있으니까 그냥 조금 겁이 나겠지만, 찾아올 거라고 생각했던 거지." "그런데 해가 지고 있는데도 태림인 들어올 생각을 하지 않는거야. 녀석은 노을을 엄청 무서워했거든. 녀석만큼 나도 노을을 무서워했지만.... 대체 왜 그리도 무서워했는지 모르겠지만... 우리집 모퉁이를 돌아 조금 올라가면 이모네 집이 있었는데 그 집 사촌들과 우리는 무척이나 친했어. 부모님이 바쁘시면 우리는 그 집에 맡겨지곤 했어. 물론, 이모는 정말 싫었을거야. 애들이 한둘도 아니었으니 말야. 가끔은 그 집에서 늦게까지 놀다가 해가 질 무렵 집에 가곤 했는데, 바로 모퉁이를 돌아 채 5분도 안 걸리는 거리인지라 어둠 속을 걸어 혼자 내려오곤 했어."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어. 그날이 아마 어느 한여름쯤이라고 생각돼. 신나게 놀고 싸우다가, 한 7시 무렵 집에 가려고 태림이랑 이모님 댁을 나서는데, 아아, 나는 아직도 그때의 내 눈앞에 펼쳐졌던 광경을 잊지 못하고 있어. 노을진 하늘은 새빨갛고 새빨개서 나도 모르게 울음이 터져 나올 만큼 두렵게 느껴졌던 거야. 집에까지 가야하는데, 땅거미가 지는 동네 골목길 바닥은 이미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고, 어린 마음이었지만서도, 꼴에 자존심은 있어서 이모님 댁에 도로 들어가는 건 용납이 되지 않았기에 두려움을 꾹 눌러 참고 태림이랑 집에 가기로 결심했어." "정말 죽도로 뛰었어. 하늘을 보지 않으려 애를 쓰며 태림이 손을 꼭 움켜쥐고 엄청난 속도로 집을 향해 달려가는데, 그 짧은 거리가 그날따라 왜 그리도 멀게만 느껴졌었는지.... 달리고, 달리고 달리고.... 게다가 태림이도 그 노을이 두려웠는지 마구 울음을 터뜨리는 거야. -괜찮아, 괜찮다고.. 울지 마.. - 라고 소리치며 진짜 죽을힘을 다 해 뛰었어." "누군가가 나를 뒤쫓아오는 듯한 느낌에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는데도 태림이 때문에 차마 울 수가 없었지. 하지만 이미 태림이의 얼굴은 눈물 범벅. 그렇게 간신히 집에 도착해 서둘러 대문을 열자 큰형이 놀란 눈으로 울고 있는 우리 둘을 내려다보았지. 무슨 일이냐고 묻는데도 아무말도 못한 채 울음을 꾹 눌러 참고 고개를 가로 저었어. 서둘러 식은땀을 닦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뒤를 돌아보자 여전히 붉고 섬뜩한 하늘이 날 내려다보고 있었어. 마당에 드리워진 커다란 빨랫줄 장대마저도 그 붉은 노을에 물들어져 있었는데, 나는 집으로 얼른 들어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악마가 나를 잡아먹지 않길, 미워하던 형들과 부모님도, 그리고 태림이도 악마에게 먹히질 않길... 그렇게 기도했었어. 태림인 울다 지쳐 내 두 손을 꼭 움켜쥔 채 잠이 들었지." "그런 태림이가 노을이 질 때 까지 들어오지 않는다는 건 분명 무슨 문제가 생겼다는 의미였어. 나는 미친 듯이 뛰어나가 태림이를 놓고 온 그 장소에 가 보았지. 하지만 아무도 없는거야. 붉은 하늘을 두려워하던 나는 아무생각도 하지 못한 채 태림이를 찾기 시작했어. 하지만 그 어느 곳에서도 태림 일 찾을 수가 없었어." "시무룩하게 터벅터벅 집으로 돌아와서 가족들에게 사실대로 말했지. 내가 태림일 놓고 왔었다고.. 조금은 울먹이면서.. 그 때 처음으로 큰형한테 뺨을 맞았어. 다른 형들은 광폭하고 제 멋대로에 폭력밖에 모르는 동물들인데, 큰형은 다정했어. ? 그래서 난 큰형에게만은 미움받고 싶지 않았거든. 그런데 큰형이 엄청나게 무서운 얼굴을 하며 내 뺨을 때린 거야." 태풍의 이야기를 듣던 지옹은 그 다음의 이야기가 궁금해져서 침을 꿀꺽 삼켰다. 왜... 어떻게 태림이가 죽은 건지, 묻고 싶은 생각에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애써 넘겼다. 태풍은 조금 더 무언가를 생각하는 얼굴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난 태림일 찾으려고 집을 뛰어나갔지. 내가 잃어버린 거니까 내가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그 순간 놈들을 만난 거야." "...누... 누구?" "그 놈들... 태림이를 납치한 녀석들..." "나... 납치?" "아버지의 정치적 입지가 점점 커질수록 아버지의 정치관에 반대하는 반대파에서 그까짓 정치적 사상차이 때문에 우릴 납치했던 거야..." "며칠동안, 우린 캄캄한 지하실에 갇혀 있었어. 태림인 힘이 없는지 계속 콜록거렸고, 춥다고 중얼거렸어. 난 묶여 있었기 때문에 태림 일 안아줄 수도 없었어." "그렇게 며칠이 흘렀는 지 알 수도 없을 만큼 긴 시간이 흘렀고, 어느 날 갑자기 문이 열리더니 커다란 사내들이 걸어 들어왔어." 거기까지 말을 이은 태풍은 커다란 손에 얼굴을 묻었다.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는 지 괴로운 얼굴이었다. 이런 려태풍의 모습은 처음 보는 지옹이기에 뭐라고 해야 할 지 몰라 안절부절못하며 녀석을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내 앞에서...." 태풍의 입에서 가느다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 앞에서 총을 쐈어...." 태풍의 말에 지옹의 눈이 커졌다. 어쩐지 억눌린 목소리가 너무도 고통스럽게 느껴져, 혹시나 태풍이 울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내 옷에 피가 튀는 순간, 나는 정신없이 비명을 질렀어. 피에 젖어버린 태림이가 바닥에 차갑게 쓰러지는 걸 보면서 나는 기절해 버렸어. 꿈이라고 속으로 중얼거렸지. 꿈이라고...." "...그리고 깨어났을 때, 큰형이 날 내려다보고 있었어....... 난 그 순간 깨달았지. 그게 꿈이 아니었다는 걸.. 내 손에 아직까지 피가 묻어있는 느낌에 나는 발작하고 말았어. '내 탓이야..' 라고 중얼대는 내 말에, 형은 날 꽉 끌어안아 주었지. '네 탓이 아니야..' 라고 말하는 그 목소리에도, 나는 아니라고 부정했어. 그렇게 몇 달은 일어나질 못했지...." "...그리고 결국 자리를 털고 일어났을 때 나는 결심했어. 강해지겠다고.. 소중한 사람이 눈앞에서 사라지는데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인간이 되지 않겠다고... 그리고, 태림이가 해 보고 싶었던 일들을 하며 살아 갈 거라고..." 녀석의 가라앉은 목소리에, 지옹은 그만 울고싶어졌다. 아무 생각 없이 사는 것 같았던 태풍에게 이런 슬픈 과거가 숨겨져 있었다니.. 동정과 슬픔이 목구멍까지 치솟았지만, 여기서 울면 태풍이 녀석도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리라는 생각에 애써 목구멍이 따끔해지도록 슬픔을 넘기고 있었다. 눈 근처가 울긋거리며 뜨거운 액체가 솟아 오르려하고 있었지만, 안된다고 계속해서 중얼거리며 참았다. "나, 돈을 모아야 해. 이제 조금만 모으면 끝나." "..하지만 너희 집은..." "우리 아버지는 노랭이라서 절대 용돈 이외의 돈을 주지 않아." "....무엇 때문에 그렇게 돈을 모아야 하는데?" "....세계 여행을 하려고." "세계여행?" "응." 말을 잇는 태풍의 얼굴이 아까의 어두웠던 얼굴과는 반대로 점점 환해지고 있었다. 하늘을 올려다보는 태풍의, 눈은 눈이 부시게 반짝였다. "태림이가 못 본 것까지 내가 다 볼 거야. 돈이 모이면, 학교도 그만두고 여행을 다니겠어. 온 세상에 내 발자국을 찍을 거야." 주먹을 움켜쥐고는 하늘을 향해 내뻗는 태풍은 크게 소리질렀다. "세상을 이 손에 움켜 쥘 거야!!" 녀석의 목소리가 공원을 울리자, 지나가는 사람들이 흘끗거리며 이쪽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태풍도, 지옹도 그 시선에 더 이상 신경쓰지 않았다. 어쩐지 태풍이 녀석이 눈이 부신다는 생각을 하는 지옹이었다. 아아, 왜 이러지. 가슴이 자꾸만 두근거린다. 수업이 끝나기가 무섭게 관형은 섬뜩한 눈길로 지옹을 한번 쳐다본 후 스윽 교실을 빠져나갔다. 그때까지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칠판만을 바라보던 지옹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저 녀석, 왜 그런 지 정말 말이라도 해 줬으면 좋겠다. 어쩐지 시간이 흐를수록 관형과 서먹서먹해 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유를 알아야 물어보기라도 한다지, 죽었다 깨어나도 이유를 알 리 없는 지옹의 마음은 답답하기만 했다. "참, 태풍이 아르바이트 구하는 거 같이 가 주기로 했지." 무심코 중얼거리다가, 핫 하고 입을 틀어막은 채 주위를 쓱쓱 훑어보았다. 이번에도 소문나면 큰일이다. 큰 형이 용돈을 준다고는 했지만, 여행 비용은 자신의 손으로 벌고 싶다는 태풍의 말에 감명받은 지옹은, 눈을 글썽이다 덥썩 태풍의 손을 잡아버렸다. "나.. 나도 도울게." ....라지만 아르바이트 쪽으론 완전무지한 지옹이 도움이 될 리 없다. 하지만 그런 열성적(..)인 지옹의 외침에 태풍은 놀랍다는 듯한 눈으로 쳐다보더니, '헤에, 정말?' ..라며 싱긋 웃었다. 아, 어쩐지 녀석의 웃음에 빈혈이 올 같은 느낌이었다. 재빨리 가방을 싸며 태풍의 교실로 뛰어갔다. 가방을 책상위에 올려놓고, 창가 근처의 책상에 앉아 다리를 흔들며 창 밖을 바라보던 태풍이 지옹의 부름이 고개를 돌려 '여어' 하고 손을 흔들었다. 아, 왜 이렇게 눈이 부시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들어 눈가를 쓱쓱 비빈 지옹은, 도무지 알 수 없는 빛의 근원을 찾기 위해 눈을 두리번거렸다. "가자." 완벽한 포즈로 책상에서 착지한 태풍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지옹이 조그마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턱 하고 어깨를 부여잡고 성큼 성큼 걷기 시작했다. 아, 심장이여. 뭔가 두근두근하다. "어머, 넌 서지옹?" 학교를 나서려는데, 저 쪽에서 고운 목소리가 지옹을 불렀다. 휙하고 고개를 돌리자, 우웃!! 이것은 지옹의 엔젤 천지영 아닌가! "아.. 안녕." 손가락을 살며시 들어 인사를 하자, 천지영은 예의 그 화사한 얼굴로 살포시 미소지었다. 아아, 정녕 그대는 천사임이 분명하다. 지영의 주위에 옹기종기 모인 서너명의 여자애들이 태풍을 보며 뭔가 수군수군대고 있었다. 얼굴마저 붉어진 듯 하다. "요즘, 관형인 뭐해?" "....관형이?" "응. 밤마다 뭘하는 건지 늦게까지 집에도 안 들어오고, 가끔은 새벽에 들어오는 소리가 들리는데 강아지 마냥 낑낑거리기도 해." 어째서... 어째서 마이 엔젤 지영이 그 녀석에 관해 이다지도 잘 안단 말인가. 혹시, 설마하니 한 지붕 아래서 사는 건 아니겠지!!?? "아.. 아.. 나는..." "아아, 그렇다고 오해하지 말고. 나랑 관형이랑은 바로 옆집이거든. 서로 마주보는 2층집인데, 2층 창문이 바로 손만 내 뻗으면 닿을 거리야. 그래서 잘 알지." 휴우, 그렇구나.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자, 지영이 예쁘게 풋 하고 웃었다. "그런데.. 이 쪽은..?" "아, 얘는 려태풍이라고... 전학 온 지 얼마 안 되었어.. 음... 우리랑.. 우리랑 동갑이고..." "아아, 그래? 반갑다, 난 천지영이라고 해." 어째서 천지영이 처음보는 녀석에게 손을 덥썩 내미는 걸까? 그때까지 뒤에서 휘파람을 불며 딴짓을 하고 있던 태풍은, 지영의 내민손을 탁 하고 잡으며, '난 려태풍!' 이라고 당당(..)하게 외쳤다. "아아, 알아. 소문은 들었어. 너 정말 굉장하다며?" "...굉장?" "....그렇지만 부탁이 있어. 관형이랑은 싸우지 말아줄래?" 평소에는 지영에게서 볼 수 없는 비장함마저 엿보이는 어조로 지영이 말했다. 가운데에 낀 지옹은 난처한 듯 머리를 긁적이며 뭐라고 말을 해야 할 지 망설여졌다. 이봐, 잘못아나 본데, 이 녀석은 싸울 의도는 눈곱만큼도 없다 이거야. 오히려 채관형, 그 녀석이 안달이라고.. ".....난 싸우고 싶은 생각 없어." "그래? 그럼 제발 부탁이야. 관형이랑 싸우지 말아줘. 걔 요즘 이상하단 말이야." "...약속은 할 수 없어." 어째서.. 어째서 이렇게 어여쁜 아가씨가 부탁하는 것인데도 들어줄 수 없다는 거지? 정말 굉장한 강심장의 소유자라 생각하며 지옹은 태풍을 바라보았다. 태풍은 어깨를 한번 으쓱거리더니, "원래 그런 건 약속하는 게 아니야." 란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 이와 비슷한 상황이 떠올랐다. -싸우지 말라고. 이제 너 싸우는 거 지긋 지긋 해. 아주... 옆에 있으면 언제 또 무슨 일이 터질까봐 조마조마하다고. 태풍이랑 싸울거면 차라리 날 패라.. 그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오던 말에 굳어지던 관형의 얼굴이 떠올랐다. 굉장히 분노하며 당장이라도 태풍과 지옹 둘 모두를 박살내고싶어 하듯, 부들거리던 단단한 팔뚝이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녀석, 내 부탁을 들어준 거잖아. 부탁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분명 녀석 입장에서 들었으면 엄청 기분 상했을 그 말을, 어쩌면 녀석이 지키고 있는 중이라는 생각이 들자, 갑작스런 죄책감이 밀려왔다. "....하지만 노력해 줘. 그럼, 난 이만 가 볼게. 잘가, 서지옹.... 그리고 너도..." 천지영이... 왜 저렇게 려태풍에게 못마땅한 시선을 던지는 걸까. 다른 여자애들은 꺄악 꺄악 거리며 붉혀진 볼을 부여쥐고 달리는데 말이다. 하지만 어쩐지 뜻 모를 천지영의 행동에 기분이 나빠졌다. "쟤 뭐야?" "....응? 아아, 과.. 관형이 친구." 심드렁한 태풍의 말에 대답하자, 태풍이 '흐음' 하고 묘한 소리를 내며 턱을 매만졌다. "쟤, 채관형 좋아하나 보지?" "에... 에에?? 마.. 말도 안 돼!! 채관형같은 악마를 저런 천사가 어떻게..." 길길이 날뛰며 소리를 지르자 태풍이 피식 웃었다. 그리곤 커다란 손으로 지옹의 갈색 빛 나는 머리카락을 쓱쓱 쓰다듬었다. "이봐, 악마도 예전엔 천사였다고 하더라.." 나지막한 그 말에, 지옹은 잠시 얼어붙었다. 어쩐지 심장이 쿵쿵 뛰는 말이었다. 의외로 아르바이트 자리는 쉽사리 찾을 수 있었다. 워낙 듬직한 태풍의 덩치와, 보면 볼수록 강렬한 얼굴. 서글서글한 웃음 탓인지, 세 번째 들어간 24시간 마트에서 덥썩 태풍을 채용했다. "그럼, 오늘부터 일할 수 있는거야?" ....라는 마트 점장의 말에, 태풍은 팔 근육을 드러내며, '그럼요!' 라고 외쳤다. 흐뭇하게 지켜보던 지옹은, 태풍이 일을 배우는 도중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자 옆에서 빈둥대다가, "저.. 나 이만 그럼 집에 가 볼게.." 라고 조그맣게 말했다. 열심히 계산대에서 일하는 법을 배우다가, 멈칫하고는 지옹을 쳐다보았다. "어? 벌써 가게?" "응.. 아르바이트 자리 구했으니까, 이제 열심히 해. 우리 집에서도 가까우니까 자주 놀러올게.." "그래!! 꼭 놀러와." 씨익 웃으며 손을 흔드는 태풍을 뒤로하고, 지옹은 마트 문을 열었다.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곧장 집에 갈까.. 하다가 문득 아까 천지영이 한 말이 떠올라 자신도 모르게 관형의 집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무래도 사과해야 할 부분도 있는 것 같았고, 또 요즘 그 녀석이 왜 그렇게 기괴한 지 물어서라도 풀어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녀석의 집 근처에 다다르자 갑자기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괜히 얌전히 있는 사자를 건드렸다가 봉변을 당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여기까지 왔는데, 남자가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썰어야 한다는(...) 생각에 심호흡을 크게 하고 녀석의 2층 양옥집 벨을 꾸욱 눌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늘씬한 미녀, 채관형의 동생 채재형이 문을 열었다. "안녕, 오빠?" 어쩐지 관형의 분위기가 나는 녀석이다. 녀석이 눈을 위아래로 뜨며 지옹을 훑어보고 있노라면, 어쩐지 심장이 조마조마하기도 하다. "아.. 안녕, 관형이 집에 있어?" 약간 떨면서 묻는 지옹의 말에, 지형은 피식 웃었다. 봐라, 봐. 저 웃음마저 비슷하다. "아니, 요즘 뭘 하고 돌아다니는 지 몰라도 집에도 새벽같이 들어오고... 엄마가 알면 큰일날텐데 말이야. 툭하면 화만 내고.. 정말 이상하단 말이야." "아.. 아아. 그래?" "그거, 오빠랑 무슨 일 있었던 거 아니야?" 눈을 가늘게 뜨고 물어보는데,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 지 몰라 헉 하고 숨을 멈췄다. "우리오빠가 그러는 이유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오빠 때문인데... 혹시 무슨 일 있었어?" 의미심장한 물음에 그만 버럭 소리를 질렀다. "무.. 무슨 소리야!! 왜.. 왜 나 때문에..." "뭐, 아니면 됐고.. 성격 급하네. 들어와." 매번 생각하지만, 이 기집애는 정말 범상치 않은 기집애다. 어쩐지 재형의 손바닥 안에서 놀아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럼 실례..' 라고 조그마하게 중얼거린 후 집안으로 들어갔다. 마침 아주머니와 아저씨가 집에 안 계시다. "아아, 편하게 있으라고. 주스라도 마실래?" 거실에 들어서자 마자 소파에 탁 하고 걸터앉으며 리모콘으로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는 재형의 말이, 어쩐지 귀찮게 하면 죽여버린다는 뉘앙스가 풍겨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아아, 그럼 말고.." 한참동안 의미없이 채널을 돌리는 채재형은.. 도대체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건 맞는지.. 무표정한 얼굴 탓에 간담이 서늘할 지경이었다. 또 전화는 어찌나 많이 오는 지, 10분마다 한번 꼴로 오는 전화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전화를 받을 때마다 재형은 귀찮다는 듯, '안 나가.' 라고 툭툭 내뱉었고, 자기 할 말만 하고 끊는 기색이 역력한 투로 전화를 끊었다. 이 불안한 공기, 정말 마음에 안 든다. 마치 관형과 있을 때의 악순환처럼 조마조마한 분위기를 견디다 못해, 지옹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왜? 가게?" 소파에 거의 눕다시피 한 자세에서 눈을 내리뜨자, 그게 또 공포다. 고개를 도리도리 젓곤, 침을 꿀꺽 삼킨 후 손가락을 들어 2층을 가리켰다. "나, 나.. 관형이 녀석 방에 가서 기다려도 될까?" "...뭐, 좋을대로. 그렇지만 오빠 물건 함부로 만지지 마. 괜히 들통났다간 뼈도 못 추리니까.." 아아, 음산한 녀석. 저거 외모만 저렇지 않으면 사내새끼라고 생각할텐데 말이다. 기운이 추욱 빠져 계단위를 저벅저벅 올라갔다. 관형의 방 문 앞에 다다라 잠시 망설이다가 손을 뻗어 손잡이를 잡았다. 깜깜한 방안에 들어서자 어쩐지 채관형의 체취가 나는 듯 했다. 이런 음산한 방에 내 발로 들어와야 하다니.. 정말 인생은 살다가도 모를 일인 듯 하다. 불을 탁 하고 키곤 관형의 책상 의자에 앉았다. 매번 생각하는 일이지만, 녀석은 답지않게 꽤나 깔끔하다. 올 때마다 보았던 가지런한 책상과 책꽂이, 호텔같이 깔끔한 침대시트, 먼지 한 올 떨어져 있지 않을 듯한 깨끗한 우드륨 바닥. 그런데.... 이게 왠 난장판이란 말이더냐. 옷이며, 침대며, 책상 위며... 거의 지옹의 방 수준으로 흐트러져 있는 그 광경에 잠시 멈춰 서서 입을 딱 벌렸다. 책상 의자에 아무렇게나 펼쳐진 옷을 가지런히 모아 바닥에 놓곤 의자에 앉으면서도, 도대체 채관형이란 녀석은 요즘 뭐하고 다니는 지 궁금해졌다. 재형의 말에 떠올라 쉽사리 물건을 건들지는 못하고, 멀뚱멀뚱 주인도 없는 방에 앉아있길 20분. 30분째 되자, 재형이 어느새 완벽하게 옷을 갈아입은 모습으로 2층에 올라와서는, "나 나가. 오빠 올 때까지 기다릴 거지?" 라며 열쇠도 안 주고 나가버렸다. ㅡㅜ 결국 이젠 관형이 올 때 까지 기다리는 수 밖에 없다는 생각에 졸린 눈을 부릅뜨며 정신력 싸움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시계가 12시를 가리킬 때까지 관형은커녕, 재형과 그들의 부모님조차 나타날 기미가 없자 눈꺼풀은 더더욱 무거워졌다. 어째서.. 어째서 이렇게 적막한 거냐!! 결국 자신도 모르게 스르르 가방을 끌어안고 관형의 책상에 얼굴을 묻었다. 아아, 이젠 정말 아무래도 좋아. 졸려 죽겠는 걸 어떻게 하라고!! -흐윽.. 흑... -....뭐... 뭐냐, 너? -아.. 아프다고!! -겨우 무릎 까진 것 갖고, 아프다는 말이 나오냐? -...나 말고, 너 말이야... 그거... 그거 많이 아프지? 피 나잖아.... -야, 하나도 안 아파. 장난하냐? 이 몸을 뭘로 보고. 그리고 그만 좀 울어. 사내새끼가 질질 짜긴... -으아아앙!! 미.. 미안, 나 때문에.... -됐어, 하루 이틀이야? 니가 싸움 몰고 다니는 건 진작부터 알아봤어. 그리고 좀 그쳐. 진짜.. 얼굴이 거지새끼 같다. -...쿨쩍.... 거.. 거지 새끼는... 좀... 쿨쩍.... -거지새끼지 뭐야.. 완전 탄광촌 촌놈 같다. -....미안... -....또 뭐가 미안하다는 거야? -...으흑.. 나.. 나 때문에... -아우.. 진짜 그만 울래도. 고작 손등 찢어진 것 갖고 유난 떨긴.... -으흐윽.. 엉엉엉!!! -미치겠네, 야!! 너 그만 울어. 다른 땐 안 그러더니, 오늘은 왜 이렇게 유난 떠는 거야? -너.. 너 다쳤잖아... 게.. 게다가 많이 맞았잖아... -새끼야, 내가 더 많이 때렸어. -그.. 그래도.. 그 형들은 고등학생이었는데.. 게다가 3명이었다고.. -그래도 이겼잖아. 아, 진짜 이 등신자식. 뚝 안 그쳐? 빨리 가자. 배고파 죽겠어. -과... 관형아.... -.....왜? -...다치지 마라. 싸우더라도 꼭 이겨.. 나는.. 나는 이렇게 힘도 없고, 약한 놈이라서 맨날 맞고 다니고... 싸움이나 몰고 다니지만..... 그러니까 넌 꼭 이겨. 절대 맞지 말고... 최강 천하무적이 돼!! 알겠지? 무적의 태권브이 같은... -.................. -응? 응? -.....쪼...쪽팔리게... 태권브이가 뭐냐? ....유치원 생도 아니고...... -어? 너... 얼굴이 좀 빨갛다? 허.. 허억....흐윽윽..... -왜.. 왜 또 울어!!!!??? -나.. 나 때문에.. 나 때문에.... 끄윽....끄윽.... -진짜, 아니래도!!이.. 이건 그냥.. 그냥 더워서 그런 거야!!! -진짜? -진짜래도. -비 올 것 같은데도 더워? 난 추워 죽겠는데.... -이걸 확 그냥... 그.. 그냥 그러면 그런 건 줄 알아!!!! 너 안 가면 나 혼자라도 간다!! -어.. 어? 과.. 관형아, 같이가!!! 아! 언제지, 저게. 목도리를 둘둘 만 지옹이 바닥에 주저앉아 훌쩍이자, 관형이 거칠게 머리를 쓸어 올리며 소리치는 장면. 천하무적 태권브이같은 유치한 말을 내뱉는, 지금보다 10센티는 작아 보이는 지옹. 비록 지금보다 머리도 짧고 키도 몇 센티 더 작지만, 여전히 변함없는 관형의 모습. 아, 중학교 2학년 때다. 녀석과 같은 반이 된 지 얼마 안 되어 집에 가던 길에 버스 안에서 만난 고등학생 형들이 눈을 부라리며 따라 내리라는 말에 멋모르고 따라 내렸다가 맞을 뻔한... 하지만 다행히도 버스 안에 같이 타고 있던 관형이 따라 내려서 지옹이 대신 싸워주었던 그 날이었다. 이 전에도 지옹을 몇 번이고 위기에서 구해준 관형이, 다른 때 같으면 쉽사리 이겼을 텐데, 몇 번이나 맞다가 손등까지 찢어진 것이 서럽고 분해서 눈물이 끊이지 않고 나왔었다. 절대로 맞지 말라던 지옹의 말에 어쩐지 얼굴이 상기되어 소리를 버럭 질러대던 관형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왜 잊고 있었을까. 예전엔 지옹이 너무 비실비실하고 약하기 짝이 없어, 길을 걷기만해도 이리 저리 시비가 붙었다. 돈을 뜯으려는 녀석들에게 지옹이 가장 만만하게 느껴졌었나 보다. 하지만 채관형과 함께 다니면서 그 일들을 모두 망각해 버렸었다. 그러고 보니, 저 때 이후로 관형이 합기도니 복싱이니, 도장들을 다녔던 것 같다. 가뜩이나 강한데 왜 굳이 돈 들여가며 그런 걸 배우냐는 지옹의 질문에 녀석은 퉁명스럽게도, -나보다 강한 녀석은 많아. 라고 대답했었다. 그 뒤로 무엇 때문에 그렇게 강해지려고 하냐고 물어보려던 걸 몇 번이나 참았었다. 녀석이 동부 중학교들을 차례차례 제압하면서 나머지 다른 지역의 학교들마저 하나 하나 장악할 때부터 지옹은 처음 봤을 때의 녀석을 잊어버렸다. 마치 신들린 듯 싸움질을 하는 녀석을 보며, 채관형과 함께 있어서 자신만 피곤하다는 생각뿐이었다. 잠에서 깨어난 것은 이상한 기운을 느껴서였다. 눈을 슬쩍 떠 보니, 어두운 방에 스탠드 하나만 켜 놓은 채 책상에 엎드려 있는 지옹 옆에 거대한 형체가 서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허억!!" "...뭐냐, 너!!" 자신도 모르게 외마디 비명을 지른 지옹은, 그림자가 관형이라는 것을 깨닫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시계를 보니 벌써 새벽 2시다. "너.. 도대체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야?" "...아, 나는..." 그러게, 내가 여기 왜 있는걸까. 조금 머리를 갸웃거리던 지옹은, '아, 맞다. 요즘 왜 그러냐고 물어보러 왔지!!' 라는 걸 생각하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채관형." "....늦었어. 집에 가라." "....나 할 말이 있어서.." "...가라니까!!" 엄청나게 무서운 목소리로 관형이 소리를 지르자, 지옹은 본능적으로 가방을 움켜쥐고 뒷걸음질 쳤다. 소스라치게 놀라 계단을 뛰어 내려오면서도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어쩐지 분하고, 괴롭다. 가슴이 먹먹해지는 느낌에 뛰면서 한쪽 손으로 가슴께를 두드렸다. 도대체 너 왜 그러냐, 채관형!!! 지옹이 떠난 자리에 멍하니 서 있던 관형은, 욱 소리를 니며 바닥에 쓰러졌다. 하얗게 질린 얼굴에 식은땀이 송글송글 배어 있었다. 멍한 표정으로 천장을 바라보며 누운 관형은 말라붙은 입술을 조금 움직여 소리내어 말해 보았다. ".....아프다...." 한지태와 지민우가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문이 벌써 온 바닥에 퍼진 모양인지, 하루에도 몇 번씩 타학교 녀석들이 길에 잠복해 있다가 싸움을 걸곤 했다. 때문에 다른 일진 녀석들과 함께 다니며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왔지만, 싸움을 끝내자 무섭게 다른 무리가 덤비면 이렇게 고통이 뒤따르곤 했다. 오늘의 마지막 상대는 삼일 공고였다. 그 녀석들, 일부러 무리해서 싸운다는 걸 알면서도 가차없이 덤볐다. 두 명이 한꺼번에 관형의 몸을 붙들고 있는 바람에 주먹으로 배를 몇 대 맞았는데, 그게 탈이 난 모양이었다. 하지만 아픈 건 꼭 육체적인 고통만이 아니었다. 관형은 손가락을 들어 심장 께에 갖다 대었다. 쿵쿵 뛰고 있는 심장소리에도 아무런 느낌이 없다. ".....아프다... 서지옹..." "서지옹, 넌 호모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 난데없는 태풍의 질문에 멍하니 도시락을 꾸역꾸역 먹던 지옹은 '욱' 하고 먹던 것을 도로 뱉어버렸다. "무.. 무슨 소리야!!!!" 가슴에 브이자를 내그으며 지옹이 소스라치게 외치자, 태풍이 머리를 긁적긁적댄다. "그렇지? 좀?" 지옹의 외침에, 녀석이 고개를 조금 끄덕이더니 하아..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답지 않게 진지한 모습에 어쩐지 머쓱해져서 가슴에 브이자를 내걸었던 팔을 스르르 내렸다. "그.. 근데 왜?" "하아...." 지옹이 물어보는데도 대답조차 제대로 하지 않고 한숨을 쉬는 폼이, 심상치 않다. 정말.. 혹시 이 녀석? "너.. 혹시..." "....그래, 그렇다니까...." 어쩐지 풀이 죽은 목소리로 고개를 끄덕인다. 허억!! 내 주변에 그 말로만 듣던 호모가, 그것도 이렇게 건장하고 남자답고 사내스럽다 못해 짐승(..) 같은 녀석이!!! "어.. 어떻게..." "그래. 나도 미치겠어. 도대체 어떻게....." 아, 이런 편견은 안 된다. 언젠가 책에서 읽은 바로는, 호모 친구가 있으면 여느때와 다름없이 진지하게 상담을 받아주라고 했다. 비록 핀트가 어긋나는 고민이긴 하지만, 그래도 자신이 태풍에게 도움이 된다면 무엇을 못 하겠는가!!! ...라고 속으로 외치며 침을 꿀꺽 삼켰다. "저... 그래서, 누구야?" "...그게...." ".....호.. 혹시 주위 사람?" "...응..." "....가.. 가까운 곳에 있어?" "....응..." 거기까지 알아낸 지옹은 스르르 내렸던 팔을 다시금 펄쩍 올려 브이자를 만들었다. "아.. 안돼!! 나는.. 나는..." 토끼 마냥 팔짝대는 지옹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태풍은 냉담한 얼굴로 도시락을 다시 꾸역꾸역 먹기 시작한다. 녀석의 반응이 너무 싸늘해서, 뻘쭘해진 지옹은 다시 손을 내렸다. "어제 말이야.." 녀석이 알록달록한 반찬을 마구 젓가락으로 찌르며 말했다. "아르바이트 끝나고 뭐 좀 물어보러 작은형한테 갔었거든.." 작은형이 누구냐, 작은형이!! 니가 작은형이 한둘이냐고.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없길래... 혹시나 해서 옥상 쪽으로 가봤더니...." 거기까지 말을 한 태풍은 다시금 땅이 꺼질 듯 한숨을 내쉬었다. "작은형이 어떤 녀석이랑...그... 키스를 하고 있는거야...." "그.. 그래서?" "...근데, 그게.... 씨발!! 사내새끼였어!!!" 녀석이 분노에 찬 목소리로 소리를 지르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사내새끼라니!! 꼬추 달린 녀석이랑.. 어떻게 입술을 맞댈 수 있냐고!! 앙? 앙? 말해봐 서지옹!!" 켁..켁.. 이.. 이봐, 멱살 좀 놔 줘.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앙?" 정신없이 흔들려 눈이 뱅뱅 도는 지옹은, 도대체 어떻게 말을 하냔 말이다!! .... 라고 속으로 부르짖었다. "말해봐, 서지옹. 남자가 같은 사내자식이랑 그런~짓, 이런~짓을 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해?" 녀석의 반응이 너무 격렬해서 잠시 진정시켜야겠다고 생각한 지옹은 켁켁거리며 태풍의 손목을 탁 잡았다. "ㄱ...그럴수도 있지 않을까? 그.. 그런 사람들이 있대잖아, 태어나면서부터..." 그 말에 태풍의 격렬했던 반응이 뚝 끊기더니, 지옹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그거.. 진심이냐?" "....뭐.. 진심이라기 보단.." "남자끼리, 이런~짓이랑 저런~짓을 할 수 있단 말이지?" 눈까지 부릅뜨며 다시금 묻는다. 도대체 이런~짓이랑 저런~짓이 뭐냐, 뭐냐고!! 속으로 눈물을 질질 흘리며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끄덕이지 않으면 이번엔 옥상으로 떨어짐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압박에서였다. "뭐야, 제대로 말해. 그게 진심이냐고!!" 아씨.. 이 자식. 진짜 어제 엄청 충격 받았나보다. 만약 지옹이 진심이 아니라고 한다면 형제간의 우애가 한순간에 날아갈 듯 싶어 지옹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사실 말이야. 이 세상에 남자랑 여자, 두 종류가 있지만, 꼭 남자랑 여자가 사랑하라고 누가 정해준 것도 아니잖아. 나도 뭐, 멋진 녀석들 있으면 가끔씩 결혼 안 하고 이런 녀석이랑 평생을 살아도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하니까.. 그래도 여우같은 마누라랑 알콩달콩 하면 좋겠지만, 좋아하는 사람이 남자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해." 사실, 다 뻥이다. 책에선 그렇게 써 있더라. "정말이지?" 태풍이 무섭도록 진지한 눈으로 되물었다. 지옹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 갑작스레 잠잠해진 태풍의 반응에, 지옹은 눈을 동그랗게 뜨곤 녀석의 자태를 지켜보았다. 녀석은 다시금 제자리에 앉더니 젓가락으로 또다시 무의미하게 밥을 쿡쿡 찔렀다. "....그렇구나..." "그래, 그렇다고.." 그러니까 이 자식아, 제발 폭주 좀 하지 마!! "지옹인 남자도 좋아하는구나..." 켁!! 어째서 얘기가 그딴 식으로 빠지는 거냐, 이 멍청한 자식아!!! 어처구니없는 녀석의 결론에 기가 막힌 지옹이 패닉상태에 빠져있자, 태풍인 어쩐지 한시름 놓았다는 얼굴로 씨익 웃더니 해맑은 표정으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다행이다." "뭐.. 뭐가?" 아읏! 눈부시다, 이 자식아. 제발 그런 천진난만한 웃음 좀 짓지 말란 말이다. "사실 어제 작은형한테 물어보려던 게 그거거든." 엄청 불안해진다. "...뭐, 뭔데?" "나 요즘 가슴이 막 두근거리고, 잠자기 직전까지 생각하느라 눈이 퀭했거든. 이것 좀 봐, 눈 퀭해진 거.." 녀석이 눈을 들이밀었지만, 반짝반짝 영롱하기까지 하다. 어디가 밤잠을 설친 자식의 눈이냐, 그것이! 아이 마냥 눈까지 들이미는 태풍의 말이, 어쩐지 불안하기 짝이 없다. 도대체 무얼 생각하길래. "예전에 천이형이 말하길, 사랑에 빠지면 잠도 잘 안 오고, 가슴도 엄청 두근댄다고 하던데.." 이젠 오한마지 들기 시작했다. "...나 아무래도 사랑에 빠졌나봐..." 아아, 눈이 부시다. 어쩐지 녀석의 주위에 핑크 빛 오로라가 분사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잠시 눈을 껌뻑이던 지옹은 손등을 들어 눈가를 쓱쓱 비볐다. 불안하다. 불안하다. 그.. 그러니까, 누.. 누구랑!! 누구랑 말이냐!!!!! "서지옹, 나 너 좋아하나보다." 뭐어어어어어어엇!!!!!!!!!!!!????? "한참 고민했는데, 네가 오늘 말한 거 들으니 안심이다. 그럼 너도 나 좋다는 거지?" 아, 씨.. 이 새끼 정말 등신새끼 아냐? 어째서 얘기가 그렇게 빠지냐고. "나.. 난..." 패닉이다. 정말 패닉상태다. 입을 벌린 채 뻐끔뻐끔 대기만 하는 지옹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태풍은 정말 다행이라는 듯 기쁘게 웃었다. 너무 기뻐하는 그 얼굴을 보자, '이 미친새꺄!! 너 지금 누구 놀려??' 라고 소리치려던 말이 입안에서 맴돌기만 했다. ...뻥이다. 사실, 그렇게 소리쳤다간 저 무시무시한 주먹에 강렬하게 전사할까봐 그런거다. "하.. 하지만 난.." "....아아, 뭐.. 걱정하지 마. 생각할 시간을 줄게. 영화에서 보면 그러더라고..." 방금 전 엄청난 폭탄을 던진것에 대한 자각도 없이 이젠 한시름 놓았다.. 는 얼굴로 즐겁게 식사를 하는 태풍의 느긋함에 기가 막히기도 하고 어이도 없기도 해서, 그 자리에서 얼어붙은 지옹은 여전히 입을 뻐끔대고 있었다. "태풍아.." "응?" 아아, 지옹은 돌아서서 눈물지었다. 녀석의 밝은 얼굴에 차마 벼락을 때릴 수가 없었다. 아니, 그 벼락에 자신이 맞을까봐 두려웠다. 어쩔 수 없이 점심시간이 끝날 때까지 다소곳하게 앉아 도시락을 나눠 먹어버린 지옹은, 교실로 힘없이 걸어 들어오며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어젯밤 관형과의 어이없는 만남 탓에 아침부터 기운 없던 지옹은, 이젠 려태풍이라는 엽기적인 새끼 탓에 돌아버릴 것 같았다. 씨발, 빛이 난다고 했던 거 다 취소. 심장이 두근거렸던 것도 도로 몰수. 어떻게 사내새끼가 같은 **달린 녀석을 좋아할 수가 있냐고!! 속으로 궁시렁거리며 드르륵하고 교실 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교실 창가에 걸터앉아 이쪽을 노려보고 있는 관형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화악 뭔가가 치솟았다. "어디 갔다 와?" 싸늘한 목소리에 두렵기는커녕, 화가 난다. "뭔 상관이야?" 주위에서 허억 하고 숨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자리로 척척 걸어가 털썩 주저앉았다. "너 지금 뭐라 했냐?" 성큼 성큼 다가와 말하는 관형의 목소리는 음산하기 짝이 없었다. "너야말로 뭔 상관이냐, 내가 뭘 하든." 따지듯 소리치는 지옹의 말에 몇몇 녀석이 교실을 조용히 빠져나가기 시작한다. 관형의 얼굴에 힘줄이 튀어나오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너 려태풍, 그 새끼랑 있었던 거지?" "...흥." "흥? 흐응? 너 지금 콧방귀 꼈냐?" 기가 막히다는 듯 소리치는 관형의 말에, 지옹은 다시 한번 큰 소리로 '흥!!' 하고 콧방귀 꼈다. 이미 열댓명이 교실밖으로 빠져나갔다. "이게 진짜 죽을려고..." "죽여봐, 죽여봐!!" 지옹이 바락바락 소리치자, 교실안의 인원수가 반 이상으로 줄어들었다. "이.... 씨발.... 너, 매일 점심시간에 려태풍이랑 옥상에서 같이 먹는다며?" "그래." "그으래?" "그래, 근데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 "....서지옹!!" 녀석이 지옹의 이름을 큰 소리로 부르자, 지옹은 그만 화가나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관형에게 한발자국 다가갔다. 그리곤 따발총처럼 소리치기 시작했다. "야, 너 내 이름 부르지 마!! 니가 친구야? 응? 어제 내가 얼마나 너 오래 기다렸는 지 알아? 알기나 해? 남은 기껏 기다려서 대화하려고 했더니, 뭐? 보자마자 가버리라고? 너, 나 우습게 여기는 건 알고 있는데 말야, 그래도 너 그러는 거 아니다. 내가 너한테 여태껏 꼬붕 노릇 해서 차암~ 우습겠지만 말이야!! 그래도 난 너 친구라고 생각했단 말이다!! 친구라고!! 그런데 너 요즘 매번 하는 말마다 왜 그러냐? 내가... 내가 씨발.. 니 종이냐!! 너 기분 좋으면 괜찮고, 기분 나쁘면 두드려 맞아야 하는 종이냐고!! 응?" "......서지.." "씨발... 내가 어제 그렇게 집에 가서 얼마나 엄마한테 혼났는 줄 알아? 잠도 제대로 못 잤다고, 이 자식아!! 그래, 이젠 좋다 이거야!! 패든 죽이든 니 맘대로 해!! 누군 뭐, 여태까지 너 좋아서 같이 있었는 줄 알아? 맞을까봐 참았는데 말야. 이젠 다 끝이라고. 죽여도 돼, 죽여봐. 학교 졸업할 때까지 참으려고 했는데, 나도 이젠 못 참겠다. 나도 이제 너랑 얘기 안 해. 너 하자는 대로 안 할거다!! 차라리 전학 가고 말 거라고!!" 격분해서 소리치는 지옹의 말에, 녀석은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자리에서 서 있었다. 녀석이 말문이 막힌다는 얼굴로 서 있자, 신이 난 지옹은 더더욱 흥에 겨워 바락 바락 소리쳤다. "너랑 절교다, 이 자식아!!" ".....너......" "나도 욕 잘해, 알아? 씨이바알!! 봤지? 이젠 쌍시옷 들어가는 욕 마음대로 하면서 살 거라고!!" 어느새 교실안엔 그 누구도 없었다. 텅 빈 교실에 덩그라니 서 있던 지옹과 관형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하고 싶은 말들을 모두 끝내놓은 지옹은 '너무 오바했나..' 라는 생각과 '이젠 죽겠다..' 라는 생각이 그제야 불현듯 들었다. 마음속으로 재빠르게 명복을 빌고 있는데, 관형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쩐지 갈라지는 듯한 메마른 목소리가 녀석의 입속에서 흘러나왔다. "....너... 나를.... 그 정도로 밖에 안..... 생각하고 있었....던 거냐?" 무슨 정도인지, 이미 내뱉은 말을 기억조차 못하는 지옹은 그런 관형을 바라보다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래!!" "....그래... 그..랬단 말이지..." 쇳소리 비스무리해서, 이게 과연 채관형의 목소리인가... 하는 의문도 들었다. 텅 빈 눈동자하며, 다른 때 같으면 주먹먼저 들이밀며, '이 새끼, 다시 말해봐!!' 라고 소리쳤을 텐데, 그저 손가락만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절교......" "........." "절교...란 말이지....." "....." "......ㅋ...큭큭큭..........하하하하........" '절교'란 말을 계속 되뇌이던 관형이, 급기야는 실성한 듯 웃어대기 시작했다. 고개를 숙이고 있었기 때문에 녀석이 어떤 표정을 짓는 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쩐지 웃음소리가 너무 메마르게 느껴져, 지옹은 자신도 모르게 흠칫하며 한걸음 물러섰다. 한참을 웃어대던 관형이 웃음을 멈추곤 고개를 번쩍 들었다. 살의가 느껴지는 눈동자가 지옹을 노려보고 있었다. "꺼져." "......뭐?" "...꺼져, 서지옹. 내 눈앞에서 꺼지라고!!" "....무... 무슨 소리야... 조금 있으면 수업시간..." "수업? 너 지금 그딴 말을 잘도 내뱉곤 수업이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거냐?" 표정 없는 눈동자가, 차가운 목소리가 지옹을 내리쳤다. "그래? 그럼 이 몸이 사라져주지." 말을 마친 관형이 자신의 자리로 성큼성큼 걸어가 가방을 챙겨들었다. "채.. 채관형...." 자신도 모르게 한걸음 다가가 관형의 팔을 쥐려고 하자, 무서운 기세로 관형이 지옹을 뿌리쳤다. 콰당 하고 굉장한 힘에 밀려 책상 밑에 넘어진 지옹은, 아픔보다는 어쩐지 생각했던 것보다 무서운 상황에 몸을 가늘게 떨었다. "건들지 마, 서지옹." 얼음장같은 목소리다. 이건 아닌데.. 진짜 아닌데... 평소에 알던 관형이 아니었다. 아무리 화가 나도, 이렇게 굉장한 얼굴을 하고 자신을 뿌리치는 녀석이 아니었다. "네 의견, 완전히 접수했다. ?.........하, 친구?" 성큼성큼 교실 뒷문으로 걸어가던 관형이 문을 열기 직전 멈춰 서더니 뒤도 안 돌아보고 으르렁거리듯 내뱉었다. "......씨발.... 그 딴 거, 처음부터 아니었어. 누가... 누가 너 따위와 친구하고 싶댔어." 쾅 하고 교실 뒷문이 닫히자, 바닥에 쓰러진 채 멍하니 관형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지옹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 뒤에 아이들이 교실안으로 스르르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지만, 괜찮은 지 걱정하며 다가오는 녀석들이 위로의 말을 내뱉었지만... 지옹의 귀에는 채관형이 남기고 간 말들만 맴돌았다. 어쩐지 눈물 나도록 슬픈 이야기를 들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 그 동안 몸이 근질근질해서 죽을 지경이었어." "내일이 퇴원이군." 병원 옥상에 앉아 환자복을 입고 담배를 꼬나물은 사내애 두명이 시원하다는 듯 씨익 웃으며 말했다. "날씨 좋네~" "그러게." 탁탁 담배재를 털며 또다시 씨익 웃었다. "그런데, 아까 채관형 이상하지 않았냐?" "그 새끼야 늘 이상하지." 한지태의 말에, 지민우는 인상을 조금 찡그렸다. "아니야. 확실히 이상했어." "......뭐, 기분 안 좋은 일이 있었나 보지." "천수가 그러던데, 요즘 학교 분위기가 장난이 아니래. 그 새끼 있지, 전학생. 그 자식, **그룹 녀석이래." "....**그룹?" "그래. 며칠 전 어떤 새끼가 전학생 환후형네서 알바 한다고 꼬질렀나봐." "그거, 천수 녀석 아니냐?" "미쳤냐. 그 새끼가.. 그랬다간 환후형한테 살아남질 못할텐데.. 그리고 그렇게 비열한 새낀 아니다." 후우.. 하고 동시에 담배연기를 내뱉었다. "그러게. 그거 꼬질렀다간 우리도 앞으로 술집 못 가게 생겼는데 말이야." "내 생각엔, 어떤 새끼가 우연히 거기서 일하는 거 보고 이른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천수네는 아니야." "하긴.. 관형이 새낀 그럴 리 없고... "그런데 그 새끼 빽이 장난이 아니라서 학교에서 쓱 넘어갔다더라. 학교에 **그룹 사장이 찾아왔었대." "씨발, 복 터졌네. 어떤 새끼는..." 한지태가 하늘을 바라보며 다시한번 담배 연기를 후우 내뱉었다. 그리곤 몸을 쓱 일으켜 기지개를 폈다. 장신의 몸이라 그런 지 환자복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채관형은 왜 그러는 걸까?" "뭐, 요즘 그 새끼 싸우느라 정신 없잖냐. 어제도 삼일공고 새끼들이 집 주위에 잠복해 있었다고 하더라." "....조폭도 아니고.. 그까짓 게 뭐 그리 중요하다고.." 지민우가 툭 던지듯 내뱉곤 몸을 일으켜 한지태의 옆에 나란히 섰다. 병원 옥상에서 내려다보이는 도시는 뿌연 안개에 휩싸인 듯한 느낌을 주었다. "공기 씨발 개떡같네.." "...야, 저 앞이 안 보인다. 매연 때문에.." 지민우가 손가락으로 앞에 우뚝 서 있는 교회부분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 방향을 지그시 바라보던 한지태가 툭 하고 욕설을 내뱉었다. "병신새끼.. 채관형..." "....응?" "...그 새끼 존나 병신이야.. 싸우고 싶은 마음도 없는 게, 싸울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또라이지.." "...뭐, 역시 그런가?" 한지태의 말에 지민우가 동의하듯 중얼대자 옥상 난간에 팔을 얹고는 턱을 기댔다. "처음 그 녀석이랑 싸웠을 때 기억 나냐?" 회상하는 듯한 한지태의 말에, 지민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 새끼, 장난 아니었어. 그 때까지 누구한테도 져 본적이 없었는데, 이 녀석한테는 못 이기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지." "...그 녀석 눈, 굉장했지." 지민우가 동조하며 말했다. 예전에 있었던 그 거칠었던 싸움을 기억하며 둘 다 침묵에 잠겼다. "...그런데 그 녀석이 그때 했던 말, 나는 아직도 모르겠어." 지민우가 안경을 올리며 말했다. 고개를 갸우뚱하며 말하는 지민우의 말에 한지태가 피식 웃었다. "모르는 게 아니라, 납득가지 않는 거겠지." "...그렇지만 너..." 지민우가 한지태의 차가운 얼굴을 바라보며 입을 열자, 한지태는 곧 얼굴을 풀고는 씨익 웃었다. 한지태의 웃는 얼굴을 보는 것이 흔하지 않기 때문에, 이럴 때마다 지민우도 넋을 잃고 말았다. "아아... 이제 들어가야겠네. 또 자리 비우면 간호사가 난리 칠 게 분명하니까.." "가.. 간호사가 문제가 아니야. 그 덩치 큰 조폭 의사.. 그 녀석이 최악이지. 도대체 왜 그렇게 사사건건...!!" 투덜대며 계단쪽으로 앞장 서 걸어가던 지민우는 어쩐지 이상한 기분이 들어 뒤를 돌아보았다. 무서운 표정으로 주먹을 움켜쥐는 한지태가 무언가 굉장히 열 받는 일을 회상하는 듯 자리에 멈춰 서서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 새끼, 퇴원하는 날 죽여버리겠어." 으르렁거리듯 내뱉는 한지태의 말이 지민우가 풋 하고 웃었다. 그 동안 얼마나 많은 시간을 도전에 도전 게임에 게임으로 무료한 시간을 보냈던가. 하지만 그 무시무시한 의사에게는 지광고에서 내로라는 두 사람이 한꺼번에 덤벼도 무리였다. 굉장히 이상한 의사녀석이라고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지민우는 마냥 그 녀석을 미워할 수만도 없었다. 그 의사와 함께 있으면, 매일같이 얼어붙어 있는 한지태도 보통의 고등학생으로 돌아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아, 그만두라고.. 솔직히, 그 녀석을 이기는 건 무리야." "조용히 안 해!!??" "야야, 암만 화내봐라, 변하지 않는 건 변할 수 없다고." 키득대며 슬금슬금 계단을 내려가는 지민우에게 뭐라고 반박하지 못하는 한지태는 분하기만 해서 주먹만 으드득 움켜쥘 수밖에 없었다. "서지옹!" 제길, 도망치려고 했건만, 언제 왔는지, 녀석이 교실 뒷문 앞에서 손까지 흔들며 기다리고 있었다. "..왜?" "같이 가자." 커다란 강아지 마냥, 웃으며 다가오는 태풍은, 귀가 있다면 쫑긋 서 있을 것 같았고, 혀가 길다면 헥헥 대고 있을 것만 같았고, 꼬리가 있다면 미친 듯이 살랑대고 있을 듯한 분위기였다. 아아, 기절할 것만 같다. 이런 덩치 큰 녀석이 개에 비유되다니..!! "..." "그래, 오늘 수업은 어땠어?" 어째서 내가 이런 녀석에게 수업이 어땠냐는 말까지 들어야 한단 말인가. "뭐.. 뭐어..." 하루종일 기운이 없었다. 채관형이 그렇게 가 버린 마당에 책이 눈에 들어올 리가 없다. 선생님이 채관형 어디 갔냐고 묻는 말에도 그 누구 하나 제대로 입을 열지 못했다. 교실 안 분위기는 싸하기 그지 ?없었다. 몇몇 녀석들이 지옹의 눈치를 보다가 다가와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야? 말해줘, 서지옹.' 이라고 묻는 것도, '솔직히 숨을 못 쉬겠잖아, 서지옹. 부탁이니 제발 네가 화해해.' 라는 말들도 다 짜증나기만 했다. 내가 뭘 그리 잘못했다고!! 속으로 버럭 소리를 질러보았지만, 어쨌든 죄책감은 가슴속에 자리잡고 있었다. 솔직히 조금 과하게 채관형에게 소리를 질렀다. 절교라고 소리치긴 했지만, 사실 마음속으로는 요즘 들어 너무 이상한 관계를 회복시키고 싶다는 생각에서 내뱉은 말이었다. 지옹이 그렇게 소리를 지르면, 채관형이 맞받아 윽박지르고 소리치다가, 그렇게 예전처럼 비굴한 모습으로 사과와 화해를 요청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번엔 정말이지 단단히 화가 나버린 건지, 채관형은 자신을 거칠게 밀치곤 나가버렸다. 예전 같으면 화가 나서 밀쳤다가도, 지옹이 바닥에 엎어져 아픈 모습을 보이면 엄청 당황해서는 '병신, 그거 하나 못 피해?' 라고 일으켜줬을 채관형인데... 그랬는데.... 어쩐지 목구멍이 따끔거리고, 눈물이 흘러나올 것 같은 느낌에 입술을 꾹 깨물었다. 하지만 결국 '끄윽' 소리고 입 밖으로 터져 나왔고, 눈물 한방울이 눈에서 방울졌다간 교복 셔츠 위에 툭 하고 떨어졌다. "뭐야, 서지옹. 너 울어?" 지옹이 고개를 조금 숙인 채 자리에 가만히 멈춰서 있자, 려태풍은 룰루랄라 즐겁다라는 얼굴로 걷다가는 흠칫 놀라 멈춰서서 소리쳤다.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조금 부들부들 떨고 있는 서지옹의 모습에 난감한 지 머리를 긁적이다, 이리저리 지옹 주위를 배회하다가, 손을 내뻗다가, 뭔가 고민하다가.... 결국, 지옹의 어깨에 두 손을 탁 올려놓았다. "서..지옹? 우는 거야? 너.. 너 왜 울어?" 175에 조금 못 미치는 지옹은 평균치정도는 될 정도로 작은 키가 아니었지만, 185의 려태풍이 보기엔 작고 어쩐지 귀여운 녀석이었다. 그런 지옹이 몸을 부들부들 떨며 눈물을 뚝뚝 떨구는데, -게다가 얼마 전에 서지옹을 좋아한다고 자각까지 했거늘- 그것을 가만히 보고 있을 려태풍이 아니었다. 깜짝 놀라 지옹의 어깨를 꾹 움켜쥐고는 '누구야, 어떤 놈이야!!' 라고 소리를 치려는 순간, 갑작스레 서지옹이 고개를 팩 들었다. 비록 눈물 자욱이 얼굴에 남아있기는 하지만, 려태풍이 생각했던 것처럼 '가엽'고, '측은' 하며 '안쓰' 러울 정도는 아니었다. 갑자기 눈에 핏대를 세운 얼굴로 서지옹이 큰 소리로 소리쳤다. "씨이발!! 개애새끼!! 너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두고 봐, 씨발. 진짜 이 쪽에서 철저하게 무시해 주겠다고!!!" 동네가 꺼져가라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지옹의 목소리에, 려태풍이 고개를 조금 갸웃대며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한참을 주먹까지 꼬옥 움켜쥔 채 고래고래 소리지르던 지옹은 분이 풀리지 않는다는 얼굴로 씩씩 거친 숨을 내뱉다가, 그제야 려태풍이 자신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다는 걸 깨닫곤 정색을 했다. "아.. 아하하하..." 머리를 긁적이며 어색한 웃음을 짓자, 려태풍이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나 말하는 거야?" 어째서 이렇게 무딘 녀석일까, 이 녀석은. "...서.. 설마..." 손까지 내저으며 아니라고 강조하자, 그제야 태풍이 씨익 웃었다. "다행이다. 난 줄 알고 깜짝 놀랬잖아." 아, 얘기 끝났다는 듯 콧노래까지 흥얼대며 걸어가는 려태풍은, 보통 사람 같으면 '누구야, 무슨 일인데 그래?' 라고 물어보는 에티켓마저 없다. 어째서 자신의 주위에는 이렇듯 자기 멋대로 살아가는 마이페이스 녀석들이 많은걸까.. 라고 중얼대며 주먹을 꼭 움켜쥔 손을 풀곤 발빠른 걸음으로 태풍의 뒤를 쫓았다. 편의점에 도착하자 옷을 갈아입는다고 안으로 들어가 버린 태풍 탓에, '나 이만 집에 갈래..' 라는 말도 못해버린 지옹은 멍청히 계산대 옆에 서 있었다. 이미 파트타임 아르바이트생은 가 버린 후였다. 다행히 손님이 없다지만 언제올 지 모르는 손님 탓에 이것저것 만져보며 녀석이 옷을 빨리 갈아입고 나오길 기다리는데, 딸랑거리는 종소리가 나더니, 우락부락하게 생긴 녀석이 건들대며 들어왔다. "댓 한 갑 ." 자신은 아르바이트생이 아니라고 입을 열려는데, 녀석은 태연하게 담배 한갑을 주문하곤 지옹의 눈을 부릅뜨고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무섭게 생기긴 했지만 고교생 같은데.... "댓 한 갑 달라고." 목소리 톤이 조금 불길하다 생각되었지만, 뭐라고 말을 해야 할 지 몰라 조금 머뭇대다가, "저기.. 전 여기 알바생 아닌데요.." 라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옹의 대답이 마음에 안 드는 지 눈을 부라리던 녀석은 갑자기 다가와 음산하게 말했다. "계산대에 있으면서 알바생 아니라는 게 말이 돼?" "하.. 하지만.." "이 새끼 교복 봐라. 너 지광고 새끼지?" 고개를 미친 듯이 끄덕이자, 녀석이 비열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너 2학년 한지태 알지?" "......" "그 새끼랑 말이야, 채관형 그 십새끼. 우리가 조만간 접수한다. 알아?" 결론은 고등학생이라는 얘기다. "이제 담배 내 놔라." "하.. 하지만 저는.." 고개를 도리 저으려는 순간, 창고로 연결되는 문이 벌컥 열렸다. "어라, 손님 있었네? 진작 말하지 그랬어." 편의점 로고가 달린 옷으로 갈아입은 태풍이 팔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그 덩치에 기가 죽었는지, 험상궂은 녀석은 지옹과 태풍을 번갈아가며 바라보더니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댓 한갑." "주민등록증 주세요." 녀석의 말에 손을 척 내밀며 태풍이 말했다. "...깜빡잊고 안 가져왔는데, 그냥 줘." 녀석의 말에 태풍이 쓰윽 녀석을 훑어보더니, "민증 없으면 못 줘." 라고 말했다. 태풍의 그 존칭없는 말에 녀석이 주춤 하다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씨..씨발, 20살 넘었다니까." "그러니까, 민증갖고 다시 와." 건방지고도 당당한 말투로 태풍이 말하자, 녀석은 입을 뻐끔거렸다. 아, 아무래도 분위기 또 심상치 않다. 가방을 꼬옥 움켜쥔 지옹이 슬며시 뒷걸음질치려는데, 녀석이 태풍을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다가는 '씨발' 하고 욕설을 내뱉은 후 지옹을 거칠게 툭 밀치고 나가버렸다. 아아, 다행이다. 그냥 가 버려서. 안도의 한숨을 내뱉자, 태풍이 씨익 웃었다. "저런 녀석들 너무 많아. 진짜.. 야, 배 안 고프냐? 김밥 먹을래? 너 김밥 좋아하잖아." "...아, 아니야..." 고개를 붕붕 휘젓고는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나.. 나 집에 갈게.." "벌써?" "응. 아무래도 나 늦은 것 같아서.." 시계를 보는 흉내를 내며 뒷걸음질치는 지옹을 태풍은 더 이상 말리지 않았다. "그래, 그럼 잘 가라. 내일 보자." "응. 그래." 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태풍이 다시한번 지옹을 불렀다. "서지옹." "...응?" "....기운 내라. 무슨 일인진 모르겠지만..." 툭 하고 뭔가를 던져서 반사적으로 움켜쥐자 야쿠르트 한병이 손바닥에 놓여져 있었다. "응. 고마워." 야쿠르트를 움켜쥐고 편의점을 나서며 어쩐지 마음이 따뜻해졌다. 려태풍 녀석. 역시나 굉장한 녀석이다. 집으로 터벅터벅 걸어가며 한숨 짓기를 수 십 번. 손에 든 야쿠르트의 알루미늄 껍질을 손으로 까고는 입안에 털어 넣었다. 시큼한 향이 입안에 가득 퍼졌다. 한적한 골목길에는 노을이 스며들어 있었다. 붉은 햇살을 받으며 걸어가던 지옹은, 어쩐지 뒤에서 누군가가 쫓아오는 느낌에 고개를 스윽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엄청 무시무시한 녀석들이 지옹의 뒤를 어슬렁어슬렁 쫓아오고 있었던 것이다! "어.. 어어..." 자신도 모르게 외마디 신음을 토해낸 지옹을 바라보며, 녀석들이 음산한 웃음을 지었다. "기다렸다, 네 녀석." "...." 식은땀이 등 뒤로 주르르 흐르기 시작했다. 어째서 이 녀석들이 자신을 기다렸다는 거지? 순간, 그 무리 속에 있는 낯이 익은 녀석의 얼굴에 아아, 하고 납득의 신음을 지었다. 아까 그 녀석이었다. 담배 한갑을 사려던 그 우락부락한 자식. "아까 그 새끼, 고삐리지?" 대여섯명이 지옹을 우르르 감쌌다. 순식간에 공포스러운 분위기가 조성되자, 지옹은 재빨리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누군가 자신을 도와주진 않을까.. 하는 착각에서였다. 하지만 지나가는 녀석들은 자신처럼 약해빠져 보이는 고교생. 게다가 그들도 두려운 지 발걸음을 빨리하며 곧장 앞만 보고 걸어가고 있었다. "지광고 새끼들은 다 니들처럼 싸가지가 없냐?" "이 새끼들이 한지태랑 채관형 빽만 믿고 사정없이 날뛰는 모양인데.." 이봐, 이봐.. 이런 분위기 정말 마음에 안 든다고. 어째서 아무도 없는 이 시기에, 이런 무시무시한 녀석들에게 둘러싸이지 않으면 안되는 거냐고! "너 오늘 죽었어. 개새끼.. 아까 그 새끼도 나중에 눈깔에 띄면 죽을 줄 알아." 침을 타악 내뱉은 녀석이 지옹의 멱살을 꽉 움켜쥐었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서 제대로 서 있을 수도 없었다. 퍼억----!! 녀석의 주먹이 순식간에 지옹의 얼굴을 강타했다. 그 엄청난 둔탁함에 자신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머리가 하얗게 되고 별이 된다는 표현을 이런 때에 쓰는 듯 하다. "이 개새끼, 존나 범생이 같은 게." 정신없이 주먹이 날아오자, 지옹은 이미 온 몸에 힘이 쭉 빠져버렸다. 게다가 다른 녀석들도 합세해 지옹의 허리며 배 부근을 치기 시작하는데, 동시에 엄청난 고통들이 다가오자 숨조차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아. 이제는 죽었구나.. 하는 순간, 저 쪽에서 호루라기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무차별적으로 지옹을 때리던 녀석들이 흠칫 하더니, '씨발.. 튀어!!' 라는 한 녀석의 외침에 미친 듯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골목엔 지옹 혼자만이 남았다. 힘이 빠진 지옹이 바닥에 털썩 쓰러졌다. 눈 쪽에 피가 흐르는 느낌이었다. 허파에 구멍이 난 듯 새액 새액 하는 소리가 입 밖으로 터져나왔다. "괜찮아?" 머리 위에서 누군가 낯익은 목소리로 묻자 지옹은 있는 힘을 다해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다시 바닥에 쓰러졌다. "정말이지, 칠칠치 못하다고.." 누군가 했더니, 재형이었다. 입에 호루라기를 물고 있는 재형은 한심하다는 얼굴로 지옹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 안녕..." 힘없는 목소리로 인사를 하자, 재형은 황당하다는 얼굴로 지옹을 내려다보더니, "뭐야, 도대체.. 어째서 이렇게 약해빠진 거냐고.." ..란다. 그래, 이 오빠가 약하다. 약하기 짝이 없어 미안하다. 나는 네 그 무시무시한 괴물같은 오빠와는 차원이 틀리다고. "자, 잡아. 언제까지 바닥에 엎어져 있을거야? 쪽팔리지도 않아?" 아, 이 독설. 채관형과 닮다 못해 똑같기까지 한 그 말투에 자신도 모르게 씨익 웃어버렸다. 그러자 재형의 기막히다는 목소리가 더더욱 커졌다. "뭐야, 바보야? 진짜 오빠가 어이없어 하는 것도 이해가 간다니까..." 쳇, 하고 내뱉은 재형은 지옹의 어깨를 붙잡곤 '영차' 하며 일으켰다. 교복을 입은 재형은 영화에 나오는 늘씬한 미녀배우와 꼭 닮았다.. 그.. 이름이 뭐더라... "눈이 풀린 것 봐. 오빠, 발 에 힘 좀 줘." "...." 아무리 그래도 여자 몸에 기대다니, 남자 체면이 말이 아니다. 그래도 손 하나 까딱 할 수 없는 느낌에 저벅 저벅 발을 내뻗자, 재형은 계속해서 궁시렁댔다. "도대체 관형이 오빠는 어디가고 혼자 있던 거야?" 그 새끼랑 절교했다.. 그러니까, 그 새끼 동생인 너랑도 절교인가? 아닌가? 아아, 머릿속이 복잡하기 짝이 없었다. "정말, 이쪽이나 저쪽이나 바보들이긴 마찬가지라고.." 한심하다는 듯 내뱉은 재형은, 그래도 끝까지 힘들게 지옹을 집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혼자 집안까지 들어갈 수 있어?" "...응... 고... 고마워...." "아무튼, 앞으론 관형 오빠랑 꼭 같이 다니라고. 또 이런 일 생기면 오빠가 난리칠 게 분명해." 옷을 탁탁 치며 돌아서려는 재형을, 지옹은 생각난 듯 불렀다. "재.. 재형아..!!" "....또 왜? 못 들어가겠어, 혼자?" "아.. 아니, 그게 아니라....." "뭔데, 그럼?" "...과......관형이한테는... 말하지 말아줘..." 애원조의 말에 재형이 입을 꾹 다물더니 지옹을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뭐, 나야 말해도 말하지 않아도 상관없지만... 어차피 내일 알게 될 거 아냐?" "....부탁이야..." 힘겹게 말을 잇는 지옹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어깨를 으쓱한다. "....흥, 알았어. 그러니까 빨리 들어가서 쉬어." 돌아서는 재형에게 고맙다고 몇 번이나 중얼거린 지옹은 집안으로 힘겹게 들어갔다. 다행히도 엄마가 집을 비워서 잔소리를 듣지 않고 조용히 침대에 누울 수 있었다. 상처투성이가 된 얼굴을 베개에 묻고 있다가 자신도 모르게 울고있었다. 지각이었다. 뭐, 늘상 생활이 지각이니, 이젠 걱정되지도 않는다. 어차피 운동장만 좀 뛰면 되겠지.. 라는 생각으로 주섬주섬 옷을 챙겼다. 거울을 보는 순간 헉 하는 신음을 내지르고 말았다. 밤새 운 탓에 퉁퉁 부은 얼굴에 이곳 저곳 상처와 멍이 가득하다. 순식간에 속으로 '괴물이다!!' 라고 외쳐버렸다. 교복을 잽싸 갈아입은 후 엄마 몰래 빠져나가기 위해 가방을 들고 계단쪽으로 뛰어갔다. "밥 먹고 가렴.. 어머!!" 식탁을 차리던 엄마가 번개처럼 뛰어나가는 지옹의 모습에 놀라 소리쳤지만, '다녀오겠습니다!!' 라고 소리만 친 채 엄청난 속도로 집을 나왔다. 그리곤 날렵하게 학교까지 달려갔다. 예전에 태풍과 오락실에서 강민구에게 맞았던 귀 쪽이 시큰거렸다. 아무래도, 어제 그 쪽을 또 맞았던 것 같았다. 어쩐 일인지, 매일 보는 학주는 지옹의 엄청나게 붓고 멍든 얼굴을 보자마자 신음을 삼키며, "누구한테 맞았어, 바른대로 말 안 해?" 라고 소리쳐 지옹을 놀라게 만들었다. 뭐라고 변명해야 할까 걱정하다가, 결국, "맞....은게 아니라 어제 자전거 사고가 나서..." 라고 지어내기 시작했다. 아파서 입조차 제대로 벌어지지 않지만, 더듬더듬 설명을 하자 학주는 미심쩍다는 시선으로 지옹을 쳐다보더니, "그거 확실해?" 라고 물어봤다.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자, 그제야 지옹을 들여보내 주면서, "어떤 녀석이 괴롭히면 와서 말해라." 라며 그냥 보내주는 것이었다. 웬 일로 달리기를 안 한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꾸벅하곤 교실로 들어섰다. 교실 문을 드르륵 열자 제각기 떠들어대던 녀석들이 지옹의 얼굴을 보곤 숨을 헉 하고 들이마셨다. "지.. 지옹아, 너 얼굴이..." "아아, 이거? 어제 자전거 사고가 나서.." 이미 한번 뱉은 거짓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얘기하며 씨익 웃자, 마치 호러영화 한편을 본 듯한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며 숨을 히익 들이마신다. 지옹은 어깨를 한번 들썩이곤 어쩔 수 없다는 포즈로 자리에 앉았다. 책상에 털썩 엎드려서는 손가락을 들어 책상 위에 파 놓은 의미 없는 글자를 매만졌다. 교실 뒷문이 열릴 때마다 심장이 두근두근 댄다. 관형이 자식이 들어오는 듯 해서 어깨가 바싹 얼어붙었다. 만약 자신의 얼굴을 본다면 보나마나 펄펄 날뛸 관형 탓에 심장이 계속해서 힘차게 박동쳤다. 만약 얼굴을 보고 소리를 지르면 뭐라고 변명해야 할까 고민하며 계속해서 손가락으로 책상을 어루만졌다. 움푹 파인 '나' 라고 새겨진 글자 속에 푹푹 손가락을 묻으며 귀는 바짝 뒷문에 가져댔다. 하지만 수업이 시작되고 1교시가 끝날 때까지, 저벅 저벅 대는 발자국소리와 관형 특유의 싸가지 없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채관형 학교 안 왔어?" 3교시가 끝나자 정렬이 녀석이 지옹네 교실 앞을 기웃거리더니 결국 4교시가 끝나고 점심시간이 시작되자마자 뒷문이 벌컥 열렸다. 느슨하게 교복단추를 한 두 개 풀어헤치곤 교복 바지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은 채 삐딱하게 서 있는 한지태는 도무지 어제까지 병원에 입원해 있던 녀석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쌩쌩했다. 그리고 험악했다. 험상궂은 얼굴로 교실을 둘러보는 한지태의 뒤에는 지민우와 황천수 등 학교 일진 녀석들이 전부 모여있었다. ?3학년들도 이 녀석들을 보면 기가 죽어 돌아가는 마당에, 채관형에게 길들여진 소심한 반 녀석들이 얼어붙은 건 당연한 일이었다. 모두들 기립 자세에서 급식도 가지 못한 채 멍하니 서 있었다. 지옹 역시 여느때와 다름없이 태풍과 만나 도시락 시식을 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으나, 한지태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 한지태가 지옹을 잠시 내려다보더니 한 걸음 한 걸음 씩 저벅저벅 걸어 들어왔다. "채관형은?" "......" "말 안해?" 조일수가 협박어린 목소리로 윽박지르자, 자신도 모르게 손가락으로 교복 끝을 매만지며 고개를 숙였다. 아, 분위기 정말 살벌하다. 게다가 채관형이 결석한 게 자신이랑 무슨 상관이냔 말이다. 지옹조차도 모르는 사실을 캐묻는 녀석들 탓에, 지옹은 입을 꾹 다물고 손가락을 조금 떨었다. "....모...르는데?" 결국 한지태의 눈빛을 견디다 못해 입을 열자, 한지태가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너, 얼굴은 왜 그따위야?" ".....그냥... 자전거랑 부딪쳐서.... 그래서..." "바른대로 말 안하냐?" 아아, 정말 싫다고. 채관형은 자신을 봐주는 면이라도 있었지만, 한지태 이 녀석은 정말 불안한 녀석이다. 늘 알 수 없는 눈동자로 자신을 노려보지 않나. 그렇지만 탐탁지 않아 하면서도 이렇다 할 시비를 건 적이 없는 녀석인데.. 그런데 이번엔 정말 틀리다. 불안한 눈동자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지옹은 침을 한번 꿀꺽 삼키고 다시 입을 열었다. "저.. 정말이야. 자전거랑 부딪쳐서...." 열심히 눈을 내리깔고 설명을 하자, 한지태가 느릿느릿한 발걸음으로 지옹의 주위를 돌았다. 그리곤 다짐하듯 다시 물어보는 것이었다. "말 해라." 결국, 그렇게 긴장된 침묵이 5분을 넘어서자 견디다 못한 지옹이 뻐끔 뻐끔 입을 열고 말았다. "사.. 사실은 어제 깡패녀석들을 만나서...." 주절주절 설명하고 있는데, 한지태가 한쪽 발을 척 들어 지옹의 책상 옆에 놓여져 있는 의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곤 주절대던 지옹의 말을 뚝 끊어버리더니 이렇게 묻는 것이었다. "채관형, 그 자식은?" "......" "어디 갔냐니까." 씨발, 잘라먹을 거면 왜 물어봤냐고. "..하.. 학교 안 온 것 같아." 불확실한 목소리로 대답하자, 녀석이 거친 손놀림으로 단 한번에 지옹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안.. 온 것 같아? 장난해, 지금 나랑?" 확실히 관형이 움켜쥐었을 때랑은 차원이 다르다. 관형이 봐 준 거라면 이건 진짜다, 조금만 더 잡히면 숨을 못 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지옹은 두 팔을 휘저으며 입을 열려고 노력했다. 그러자 지태가 짜증난다는 듯 탁 하고 지옹을 바닥에 떨구었다. "....말 해." "....캑...캑... " "빨리 말해라 서지옹." "...모.. 몰라..." "야, 너 죽고 싶냐?" "...지.. 진짜 모른대도... 나 ... 나 어제 채관형이랑 절교했단 말이야!!" 결국 사실대로 불어버리고 말았다. 지옹의 말에, 지태의 눈이 점점 커졌다. 하지만 워낙 느릿한 속도로 변화했기 때문에 그것이 진짜였는 지 장담할 수가 없었다. "절교?" 어처구니없다는 듯 다시 한번 물어오는 그 말에, 지옹은 천천히 목을 움켜쥐곤 고개를 끄덕였다. 유치하지만 어쩔 수 없다. 난 사나이 대 사나이로 그 녀석을 견딜수가 없단 말이야. 더 이상은. "꼴깝들을 떨어라.." 웃기지도 않는다는 듯 빈정거린 한지태가 의자에서 발을 내린 후, 지민우에게 말했다. "야, 채관형 전화 아직도 안 받냐?" 지민우가 한 손으로 안경 끝을 올리며 전화를 다시 걸더니 고개를 갸웃한다. "모르겠어. 그 자식. 아무래도 뭔가 잘못된 것 같지 않아?" "씨발. 학교는 절대 빠지는 새끼가 아닌데.." 누구보다도 그 사실을 잘 아는 지옹도 어쩐지 움찔해서는 고개를 조금 숙였다. 확실히, 채관형. 이상하긴 이상하다. "야, 가자. 점심은 먹어야지." 저 쪽에서 조일수가 소리치자, 한지태가 몸을 조금 돌리는가 싶더니, 다시금 멈춰서서 지옹을 노려보았다. "야, 꼴깝 그만 떨어. 씨발.. 그 동안 보자보자 했더니 사정없이 날뛰는 구만? 채관형만 없었음, 넌 이미 죽었어. 뭐 같은 새끼가..." 팍 하고 밀쳐진 지옹이 쿠다당 책상에 뒹굴었다. 씨발.. 어제 맞은 델 또 때리냐.. 비열한 새끼! 등을 움켜쥐고 작게 신음하는 동안, 녀석들은 어느새 급식소 쪽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그제야 긴장이 풀리는 지 반 아이들이 조금씩 웅성대기 시작했다. 그리곤 녀석들도 각자 급식소 쪽으로 가는 것이었다. 결국 교실안에 덩그라니 남겨진 지옹은 어쩐지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아서 손바닥을 꾹 눌러 참았다. "....발....." 눈시울이 뜨거워지자,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리게 된다. "....씨발!! 채관형!! 누가 학교 나오지 말랬냐고!!" 버럭 버럭 소리지르며 눈물을 참으려 애쓰는데, 교실 앞문이 드르륵 열리는 것이었다. 금세 쫄아버린 지옹은 소리를 지르다 말고 무의식적으로 책상 밑으로 허리를 숙여 피해버렸다. "어라? 서지옹 녀석. 어딜 간거야?"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오자, 지옹은 재빨리 몸을 들어 앞문 쪽을 바라보았다. 려태풍이었다. "태.. 태풍아!!" 이렇게 려태풍이 반가웠던 적이 있었을까? 지옹은 후다닥 태풍이 있는 앞문 쪽으로 달려갔다. "어라? 너 얼굴 왜 그래?" 유심히 지옹의 얼굴을 바라보던 태풍이 손을 들어 얼굴 쪽을 쓰다듬으며 물어보았다. 지옹은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결국 눈물을 글썽이며 토해내기 시작했다. "사실은... 으흑.. 어제.. 딸꾹.. 그게....어흥.. 그.. 그래서... 훌쩍...." 뭐라고 지껄이는 지도 모를정도로 어이없이 뱉어내던 지옹의 말을 아무런 대꾸 없이 가만히 듣고 있던 태풍이, 이야기가 끝나기가 무섭게 지옹을 품에 팍 안았다. 켁. 숨이 막히다. "뭐야, 그럼 그 새끼들이 그런 거냐?" 이.. 이봐, 대답을 할 수 있도록 좀 놔 주라고. 태풍이 녀석의 단단한 가슴 근육에 꽈악 안긴 지옹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미친 듯이 두 팔을 허우적댔다. 그러다가 문득, 이 녀석이 얼마 전에 자신에게 고백 비스무리한 것을 했다는 것이 떠오르자 숨이 가빠오며 심장이 미친 듯 쿵덕대기 시작했다. 이 포즈, 어쩐지 야리꾸리 한 거 아냐? "티웅으.. 이그 줌 누우~. (태풍아 ..이것 좀 놔아~)" "그 새끼들, 가만 놔 둘 수 없어." 그래, 결의에 차서 씩씩대는 건 참으로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으나 숨이 막힌다고!! 게다가.. 어쩐지 얼굴이 빨개지잖아!! "걱정 마. 서지옹. 내가 백 배는 갚아줄게. 많이 아프냐?" 결국 놓여진 지옹은 숨을 헥헥 내쉬기도 전에 시원시원하게 생긴 녀석의 눈 코 입이 시야에 들어오자 얼음 동상처럼 얼어버렸다. "아.. 생각할수록 열 받네!!" 으르렁대는 태풍의 말에 애써 미소지으려 했지만 턱이 땡겨서 더 이상 웃을 수도 없었다. "서지옹. 내가 반 죽여줄게. 앞으로 나만 믿어." 그래, 그래.... 그건 다 좋은데 말이지.. "배고프지, 서지옹. 가서 밥 먹자." 아아, 어째서 말 한마디 할 기회를 안 주냐고!! 어째서 내 주변의 인간들은 다들 이렇게 지들 멋대로냐고!! 손 아파, 새끼야!!!!!!! 학교가 끝나기가 무섭게, 점심시간에 놓았던 팔을 다시금 세게 움켜쥐는 태풍 탓에 얼떨결에 태풍을 쫓아가기 시작했다. 골목골목 모퉁이를 돌 때마다 지가 무슨 에후(..)비아이 요원이라도 된 것 마냥 주위를 두리번대며 엄호(..)하기 시작했다. 아~주 영화를 찍어라.. 너무 오바를 하면서까지 주위를 경계하는 태풍의 모습에, 지옹은 많이 부끄러워 고개를 팍 숙였다. 길가는 사람들이 의아한 눈길로 쳐다본다. "저기.. 태풍아?" "...응?" 여전히 골목 모퉁이에 몸을 숨긴 채 진지하게 눈을 굴리며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는 태풍이 건성으로 대답했다. "저기.. 우리 그냥 일반인처럼 걸으면 안될까?" "나쁜 녀석들이 네 털끝하나 건들지 못하게 해 주겠어." 이봐, 내 말 좀 들어보라고. 게다가 내가 털이 어디 있냐고.. 이 매끈한 몸매에. "너.. 알바 가야 하는 거 아니야?" 괜히 말했다 싶었다. 차리라 이 녀석에게 어제 일을 말하지 말걸. 누구보다도 가장 말하지 말아야 했던 녀석이 바로 이 녀석이었던 것이다.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는데, 려태풍이 밝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바래다주고 가마." "....안 그래도...." "아냐. 그 녀석들, 다시 나타날 지도 모르잖아." 이 녀석아. 너랑 다니는 게 더 위험하다고. 분명히 그 녀석들이 지옹의 얼굴보다는 태풍의 얼굴을 100배는 더 강렬하게 기억하고 있을 터였다. 게다가 여태까지의 경험을 보아, 이 녀석과 함께 있어 평온하게 보낸 날이 거의 없었다. "하.. 하지만.." 결국 려태풍을 설득하기에 실패한 지옹은 재빨리 집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발걸음을 빠르게 돌리려고 해도, 려태풍이 지옹을 막아서며 영화에 나오는 뭐뭐 마냥 엄호(..)하는 탓에 다시금 지체되는 것이었다. "이봐, 내가 먼저 앞장서야 한다고." 따위의 말들을 내뱉으며... 눈물이 주르르 나올 것 같았다. 려태풍, 네가 아니라도 지금 난 충분히 피곤하단 말이다. 게다가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건 어인 일이냔 말인가. 10분을 뛰어 집에가면 될 거리인데, 반을 오는 데 30분가량이 지체되자 이미 마음은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어쩌면 이 자식, 이걸 즐기는 거 아니야? 이를 갈며 태풍의 넓은 등짝을 노려보는데, 아니나 다를까. 등골이 오싹해지기 시작했다. 눈을 서서히 돌려보니, 태풍이 아르바이트하는 24시간 편의점 부근이었다. 아무래도, 어제 그 자식들이 태풍이 녀석을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인가 보다. "오호라~ 이 녀석. 너 내 얼굴 기억하냐?" 어제 편의점에서 담배를 사려했던 그 녀석이 앞장서며 말했다. 녀석들을 보자 턱이 아리는 듯한 기분에 지옹은 주춤 물러났다. 그리곤 태풍에게 도움을 청하는 눈길을 보냈다. "뭐야, 넌. 비켜. 지금 난 바쁘다고." ....그랬다. 이 녀석은 정녕 바보였던 것이다. 여전히 주위를 두리번대며 말하는 태풍이 녀석의 어이없는 대꾸에, 지옹은 식은땀이 났다. 식은땀이 나는 것은 비단 지옹 뿐만이 아니었던 듯 했다. 기가 막힌 듯 려태풍을 노려보던 녀석들이 거칠게 태풍을 떠밀었다. "이 새끼, 지금 죽고 싶어 환장했나." 콰당 하고 바닥에 쓰러진 려태풍을 보며 안타까운 한숨을 내쉰 지옹은 눈을 질끈 감고 소리치기 시작했다. "려태풍.. 이 멍청아!! 저.. 저 녀석들이란 말이다. 어제 날 때린 그....!!" 지옹의 외침에 멍한 얼굴을 하던 태풍의 눈빛이 달라졌다. "이 새끼.. 아아.. 어제 그 녀석이군. 졸라 약한 새끼.." 녀석들 중 한 명이 그제야 지옹을 알아본 듯, 건들거리며 지옹에게 다가왔다. 제기랄. 이럴 줄 알았다. 려태풍 이 자식과 함께 없었다면 처음부터 문제될 건 없었단 얘기잖아!! 머릿속으론 무수히 많은 려태풍 욕을 하며 지옹이 한 걸음씩 뒷걸음질 쳤다. 녀석의 큰손이 어깨를 꽉 움켜쥐는 순간, 퍽 하는 소리와 함께 태풍이, 녀석에게 주먹을 날렸다. "윽.." "그럼 진작 말을 하지 그랬어, 서지옹.." 눈빛이 달라진 얼굴로 려태풍이 고개를 탁탁 털며 말했다. 뒤에서 지켜보던 녀석이 당황한 얼굴로 려태풍에게 달려들기도 전에 퍼억 하는 소리가 나더니 나가떨어졌다. 아아, 역시 이 녀석은 강하다. 정말 강하다. "감히 누가 내 귀여운 서지옹에게..." 저런 낯뜨거운 말만 안 한다면... "서지옹. 누구냐, 누가 가장 많이 때렸어?" 그렇게 말하면 어떻게 말하냐, 바보천치야!! ....라고 생각하며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들어 가운데 서 있는 녀석을 가리켰다. "이 녀석?" "저.. 씨발.. 뭐야, 이건!!" 태풍이 손가락으로 녀석을 같이 가리키자, 가운데 선 녀석이 주춤하며 열을 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성을 내던 녀석에게 태풍이 주먹을 날리자, 아무런 말도 못하고 비명만 지르는 것이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한 녀석이 바닥에 뒹굴고 있는 병을 들어 조심스레 려태풍에게 다가갔다. 힘차게 내리치려는 순간, 지옹이, "조심해 려태풍!! 뒤!!" 라고 소리치자, 녀석은 어느새 바닥에 나가떨어져 있었다. 한명 씩 쓰러뜨리기 시작한 려태풍이 숨 하나 가쁘지 않은 듯 브이자를 그리며 이쪽을 바라보더니 씩 웃었다. 가방을 꼭 움켜쥐고 있던 지옹도 어느새 멍든 얼굴을 한 채 활짝 웃고 있었다. "하아.. 하아..." "그러게, 처음부터 항복을 하지 그랬어." ".....하아.... 하아....." 거친 숨을 내뱉으며 다리에 힘이 풀릴 것 같은 걸 억지로 참고 있었다. 쓰러지면 안 된다. 여기서 쓰러지면 안 된다, 채관형. 앞으로 두 명. 떨리는 시선으로 재빨리 앞에 서 있는 녀석들을 훑어보았다. 다른 녀석들은 이미 기운이 빠진 듯 자신처럼 숨을 거칠게 내쉬고 있었기에, 녀석들의 우두머리인 오정진과 다른 녀석 한 명만이 시야에 들어왔다. 녀석들만 쓰러지면 다른 녀석들도 감히 덤비지 못할 것이라는 계산을 한 관형은 후들거리는 다리를 힘겹게 움직이며 녀석들에게 한걸음씩 다가갔다. "약한데, 채관형. 이렇게 약한 녀석인 줄 알았으면 진작에 칠 걸 그랬어." 느긋한 웃음을 지으며 담배꽁초를 탁탁 터는 오정진. 녀석과는 중학교 때 이미 실력을 겨룬 적이 있었다. 그 때도 굉장히 힘겹게 싸워서 이겼었는데.. 게다가... 게다가 그땐 자신의 곁에 그 녀석이 있었다. 그 생각까지 미치자, 관형은 이를 악물었다. "더 싸울만한 힘은 없는 것 같은데 그래." 오정진 옆의 녀석이 빈정대는 목소리로 말하기가 무섭게, 채관형은 있는 힘을 다 해 발을 날렸다. 퍼억-- 하고 정통으로 녀석의 어깨 옆 목뼈 근처에 부딪치자, 갑작스러운 공격에 놀란 녀석들이 우왕좌왕 하기 시작했다. 한 녀석이 관형의 몸을 붙잡으려고 했지만, 관형이 재빨리 몸을 돌려 멍청히 서 있는 오정진을 향해 온 몸을 부딪쳤다. 콰당 하는 소리가 나며 오정진이 바닥에 쓰러지기가 무섭게 녀석의 몸에 타올라 얼굴을 주먹으로 갈기기 시작했다. 질 수 없다.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서지옹의 얼굴과, 어느 순간부터 지옹의 곁에 함께 그려지기 시작한 한 녀석의 얼굴이 떠오르자 마음이 격해지기 시작했다. 분노가 쌓이고, 가슴속에 타오르는 울분이 주먹에 실리기 시작했다. 뒤에서 누군가 발로 머리를 걷어찼지만 고통조차 느낄수가 없었다. 이미 자신의 밑에 쓰러져 있는 녀석은 의식을 잃은 듯 저항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우두머리가 기절까지 하자 다른 녀석들이 모두 주춤 한 듯, 관형이 자리에서 거칠게 얼굴에 흐르는 피를 닦으며 일어서자 한 걸음 물러섰다. "....덤벼." 변함없이 냉정하고도 차가운 목소리에 기가 질린 듯, 한 녀석이 오정진의 몸을 붙잡은 채 달아나기 시작했다. "제.. 제길!!" 순식간에 텅 비어진 공터 한가운데 서서, 관형은 멍청이 오정진이 피던 담배꽁초를 집어들었다. 불도 붙여지지 않은 담배를 입에 물었다. 담배를 피진 않았다. 누군가 담배 연기를 지독하게 싫어했기 때문에 중학교 2학년 때 이후론 담배를 입에 댄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독히도 담배가 그리워졌다. ? 자신은 무엇 때문에 싸우는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 미친 듯이 세상과 싸우는 걸까. 과연 무엇을 지키기 위해서. 불도 붙여져 있지 않은 담배를 여전히 입에 문 채 관형은 공터 바닥에 비틀대며 털썩 주저앉았다. "하아...." 한여름의 도시는 외롭고 쓸쓸하기만 했다.